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화 (1/500)

프롤로그

언제부턴가 내 눈에 가끔 숫자가 보였다.

물론 항상 보이는 것은 아니다.

숫자를 보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가끔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숫자가 매우 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한 중소기업에서였다.

“어? 왜 숫자가 안 맞지?”

말만 중소기업이지 매출액은 200억에 달한다.

당연히 왔다 갔다 하는 돈도 꽤 되었다.

총무과 직원인 나는 어느 순간 통장을 열어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처음엔 단순히 계산 실수라고 생각했다.

“부장님. 좀 이상한 게 있는데요. 혹시 저희 팀에서 실수한 건가 해 서…….”

“아, 이거. 내가 아는 건이니까 그냥 넘어가.”

“네? 이거 탈세 아니에요? 큰일 날 것 같은데요.”

“그냥 넘어가라고.”

내가 발견한 것을 바로 상사에게 말한 다음 주, 내게 내려온 것은 해고 통지서였다.

그때 깨달았다.

횡령이구나.

갑작스러운 해고 통지.

연차수당도 퇴직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나는 정의감 반, 복수심 반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9자리 숫자를 띄우고 다니던 낙하산 상무는 횡령한 돈을 토해냈다.

세금도 토해냈다.

놀랍게도 상무가 뱉어낸 세금은 내가 본 숫자와 같았다.

1화. 수렁 밑엔 수렁

-사각사각.

펜이 종이에 부드럽게 스쳤다.

문제를 읽어 나가는 속도도 빠르고 정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도 순조로웠다.

중간에 막히는 문제가 몇 있었지만 그리 시간을 잡아먹지도 않았다.

느낌이 좋았다.

“후우…….”

그렇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남은 시간을 체크했다.

15분.

남은 문제를 얼추 세어 보고 OMR카드에 내가 고른 답을 마킹했다.

심혈을 기울여 삐끗하거나 밀려 쓰는 일 없이 빠른 속도로 옮겨나갔다.

수십, 수백 번을 연습한 대로다.

남은 시간 10분.

순조로웠다.

정말 이게 진짜 실전인가 싶을 정도로.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을 가득 메운 수험생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시험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차피 시험은 상대평가다.

저들도 나와 다를 바 없이 절실한 마음으로 공부했겠지만 안쓰러운 마음은 없었다.

항상 경쟁에 이겨야 제 몫을 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 아닌가.

남은 시간 5분.

내 합격을 가로막은 난관도 이제 세 문제만 남았다.

마지막까지 미뤄 둔 문제에 덤벼들어 머리를 쥐어짜 냈다.

인강에서 들은 것 같은데.

마른 오징어 쥐어짜듯 뇌를 혹사하고서 마지막 문제를 답지에 마킹한 순간이었다.

-딩동.

“헉.”

뒷자리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손 책상 아래로 내리세요. 지금부터 펜 움직이는 사람은 무조건 부정행위입니다.”

시험 감독관의 으름장에 울상을 지은 수험생들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답지가 내 책상에서 감독관의 손으로 옮겨가는 순간 폐가 텅 비도록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건, 합격이다.

감독관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내가 정말 잘 푼 것인지 응시생의 단순한 착각이었는지 가채점 답안과 맞춰 볼 생각이었다.

[7급 공무원 시험 D-Day]

대기화면에 대문짝만하게 박힌 스케줄을 배경으로 문자 두 개가 와 있었다.

부모님인가?

드디어 좋은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문자함을 열었다.

[서울중앙병원 응급실입니다. 전화가 닿지 않아 문자 남깁니다. 이명자 씨 가족분은 속히 내원 바랍니다.]

[이명자 씨 당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습니다.]

1시간 전 도착한 두 개의 문자가 어지럽게 눈앞에서 흩어졌다.

***

“675,000원입니다.”

지갑에서 두 개의 카드 중 무엇을 잡을까 고민하다 냅다 하나를 꺼내 수납원에게 건넸다.

뭘 고르든 어차피 한도가 아슬아슬하다.

“몇 개월로 해 드릴까요?”

“……6개월이요.”

단 이틀의 입원이었지만 긴급치료비와 처치비는 상상외로 비쌌다.

그나마도 건강보험료가 적용된 금액이라 이 정도다.

“처방전 있으니까 꼭 약국 들렀다 가세요.”

“네.”

카드를 꺼낼 때 머뭇거리는 것을 봐서인지 수납원이 신신당부했다.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지출로 이미 이번 달 예산은 진즉에 오버했다.

그렇다고 내가 어머니 약을 포기할 만큼 패륜아는 아니다.

애초에 어머니가 이렇게 악화될 정도로 병원을 오지 않은 건 내 탓이 크다.

아버지도 안 계시는데 내가 공부한답시고 학원에 처박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아픔을 참고 일했으니.

참고 참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병이 많이 진행된 후였다.

“약은 일단 한 달 치예요. 절대 빼먹지 말고 꼭 챙겨 주세요.”

이번엔 3개월 할부를 긁고 약을 받아들고 나오자 병원 로비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일어섰다.

퇴원해도 좋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어머니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재현아, 얼마 나왔어?”

“생각보다 많이 안 나왔어. 신경 쓰지 마.”

무언가 말을 더 이으려던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안다.

“택시 타고 가자.”

“버스 타면 돼. 무슨 택시야.”

“괜찮아. 나 이제 시험 끝나서 학원비 안 나가잖아.”

어머니는 그제야 납득한 듯 내가 잡은 택시에 올라탔다.

사실은 이제 막 필기시험이 끝났을 뿐이다.

면접 강의가 남아 있지만 정 안 되면 독학이라도 하자.

“시험은 어때? 잘 봤어?”

“합격할 것 같아. 가채점 결과도 좋고.”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붙을 것 같더라.”

나와 어머니의 대화를 들은 택시 기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시험 보셨어요?”

“공무원이요.”

“아이고, 요즘엔 공무원이 최고지! 어떤 거 봤어요?”

“7급 세무직입니다.”

“아, 국세청 그거? 좋은 데로 보셨네! 축하해요.”

“아직 면접 남았는데요, 뭘.”

“면접이야 보면 붙는 거지. 청렴하고 좋은 공무원 되세요.”

“예. 꼭 그러겠습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자 옆자리의 어머니가 대견스럽다는 듯 날 바라보고 계셨다.

어릴 땐 이런 눈길을 받고 싶어서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정작 모든 기대와 사랑을 받은 형은 막상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뛰쳐나갔지만.

택시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부축한 후 집으로 들어섰다.

하루 비웠을 뿐인데 우편물이 꽤 쌓여 있었다.

편지가 올 리는 없으니 전부 고지서다.

건강보험공단의 로고가 찍힌 봉투를 거칠게 뜯었다.

[보험료 체납자의 건강보험 적용 제외 안내]

-대상 : 건강보험료 6회 이상 체납자

-건강보험 적용 제외 범위 : 병·의원, 약국 등 건강보험이 부담하는 모든 진료비

-다음 달 1일부터 진료 받은 사람이 진료비 전액(100%)을 부담하게 됩니다.

심장에 돌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듯했다.

어머니는 매달 대학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야 한다.

안 그래도 잘 쓰러지는 어머니가 약마저 끊긴다면 병이 얼마나 악화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보험료는 내야 했다.

그러나 수중에 돈이 없다.

신용카드는 대충 계산해 봐도 한도가 턱밑인데 현금 서비스도 더 뽑았다간 감당할 수 없다.

나는 시험장에 들어섰을 때처럼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몇 번을 생각해도 역시 돈이 나올 구석이 없었다.

“무슨 일이야?”

내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어머니가 약봉지를 정리하다 말고 다가왔다.

재빨리 뒤로 숨겼지만, 어머니의 손이 더 빨랐다.

보험료 통지서를 본 어머니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미안…… 미안하다, 재현아.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뭘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약으로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한다 해도 쓰러진 사람이 일하러 나갈 순 없다.

아마 또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려는 거겠지.

나는 지난밤 한숨도 못 자고 고민한 해결책을 말했다.

“나 그냥…… 취직할게.”

“재현아!”

어머니가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픈 사람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나 싶을 정도의 박력이었다.

“자식 앞길 열어 주는 건 부모가 해야 할 일이야. 너는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그렇다고 집안 사정 뻔히 아는데 나 몰라라 할 순 없잖아.”

“재현아.”

어머니가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작고 주름진 손이었다.

“너 처음 공무원 시험 보겠다고 했을 때, 네 아버지 사진 보면서 결심했다. 돈 없다고 대학교 포기하고 취직한 거, 우리 둘이 평생 갖고 가야 할 짐이라고. 앞으로 하고 싶다는 게 있으면 앞길 막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줘야 한다고.”

“엄마.”

“재현아. 아직 네 엄마 멀쩡해. 일할 수 있고 버틸 수 있어. 이번엔 네 앞길 안 막을 거다. 너는 하고 싶은 걸 해. 그게 네 엄마 소원이다.”

어머니가 눈물 젖은 눈으로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켰다.

나 역시 비어져 나오는 물기를 닦으며 간신히 한 마디를 뱉었다.

“꼭 합격할게.”

“그래. 그거면 됐어.”

***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로 가방에 책을 쑤셔 넣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에게 알바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마음 아파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핸드폰으로 알바 모집 공고를 찾기도 하고 계산기를 두드려 임금을 계산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단 몇 시간만 일할 수 있는 곳을 찾기란 어려웠다.

필기만 붙으면 면접은 통과라는 말은 옛말이다.

지금은 면접도 강의를 듣고 연습을 해야 할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

잠을 줄인다 쳐도 일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3~4시간 정도.

게다가 1~2개월 단기다.

내 형편에 맞는 일자리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데, 그 구멍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딱 하나 있기는 하다.

나는 연락처를 켜고 익숙한 이름 하나를 검색했다.

[신우현]

막상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자 손이 주저했다.

그동안 고비는 몇 번 있었지만, 지금껏 신우현 그 새끼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응급실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자 내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뚜루루.

통화음이 지루하게 이어져도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면 오기다.

두 번, 세 번 끊었다 걸기를 반복하자 결국 전화가 연결되었다.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

“그 노친네 안 아픈 적이 있긴 했어?”

“형. 어머니야.”

“됐고. 그래서 오늘내일한대? 장례식 날짜나 정해지면 문자해라. 나 바쁘니까 끊는다.”

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역시 맨 정신으론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미친 새끼야. 너 같은 놈도 아들이라고 낳아서 고생한 부모님 생각은 안 하냐? 부모님 등골은 뽑아먹을 대로 뽑아먹고 살 만하니까 나가면 다냐?”

“왜 또 갑자기 전화해서 시비야. 너네 집구석은 너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너네 집구석이 아니라 네 집구석이기도 하잖아.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어머니 아프시다고!”

“내 집구석은 무슨. 아, 그래서 돈 달라고 전화한 거냐? 아프다는 핑계 대면서? 참나. 그런 거면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야, 신우현!”

전화 너머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이름으로 막 부르냐? 아, 그래. 어차피 남남이니까 상관없지. 됐고, 내 발목 좀 그만 잡으라고 전해라. 그 집에 갖다 줄 돈은 없으니까 두 번 다시 전화하지 말고.”

“야, 기다려. 신우현! 신우…….”

다급하게 외쳤지만 들은 척도 안 하고 전화가 뚝 끊겼다.

“이 개새끼야!”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알고서 전화했다.

형이란 놈이 집을 뛰쳐나가면서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 내 발목은 안 잡겠네.’

그래도 신우현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집 앞이었다.

어머니가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이라도 열고 내다보면 보일 거리다.

나는 정처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허억허억.”

목표 없이 왔더니 익숙한 한강변이었다.

가끔 답답해지면 맥주 한 캔 들고 오던 곳이라 절로 발길이 향했나 보다.

터덜터덜 걷는 나와는 다르게 주변에는 여유롭게 산책이나 조깅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 사람들은 평일 낮인데도 산책하는구나. 돈 걱정이 없으니 그렇겠지.

근처 부촌에서 나온 사람들일까. 세금은 똑바로 내고 있나…….

문득 세상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깟 건강보험료가 없어서 병원도 못 가고 생명을 위협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나라엔 수억 원의 재산을 갖고도 세금을 안 내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부자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부를 쌓는 데 고충이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먹고사는 데 여유가 있으면 주위를 한 번쯤 둘러봐야 하는 거 아니냐, 새끼들아!”

잠수교 한가운데 난간을 붙잡고 강을 향해 외쳤다.

듣는 이 없는 공허한 외침은 오가는 자동차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그러나 한 번 터져 나오자 나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나도 살고 싶다고, 이 빌어먹을 세상아! 무단횡단 한 번 안 하고 살았는데 대가가 이거냐! 공무원 그까짓 거 하면 뭐 하냐! 개새끼들은 탈세하고도 잘 사는데!”

나는 등 뒤에 매고 있던 가방에서 면접 수험서를 꺼냈다.

틈틈이 보려고 가지고 다니던 것이다.

“씨발, 이딴 거!”

수험서를 든 손을 뒤로 크게 젖혔다.

손을 뻗기만 하면 책은 한강으로 추락할 것이다.

던지기만 하면 되는데, 뇌리에 어머니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스쳤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던지려던 자세 그대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내 손목을 탁 잡더니 책을 낚아채 갔다.

“공무원 하겠다는 사람이 한강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됩니다.”

단호하지만 어딘지 부드럽게 느껴지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면접 책이라. 필기까지 합격한 사람이 시험을 포기할 땐 무슨 사정이 있는 거겠지요.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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