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47화 (448/448)

#447

에필로그-3

그때 다수의 인원이 항구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유문택도 익히 잘 아는 이들이었다.

그쪽에서도 유문택을 알아본 듯 즉시 우르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중 선두에 선 인물이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는 다름아닌 원탁의 기사의 실질적인 리더라 할 수 있는 갤러해드였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갤러해드 경이 아니십니까. 그럼 원탁의 기사도 참석하는 겁니까?”

먼저 인사를 건네오는 갤러해드에게 화답하는 유문택. 그러자 갤러해드가 정색하며 말했다.

“말씀을 낮추시죠. 주군의 조부께 존대를 듣는 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알았네. 그러도록 하지.”

유문택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저들에게 존대 받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저들은 지구의 오랜 역사 속에 존재해온 전설의 인물들.

평범한 기업의 회장에 불과한 자신이 저들에게 존대를 받게 될 날이 오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더군다나 현재 원탁의 기사들의 인기와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한낱 이야기 속 전설이라 여겨지던 그들의 존재가 사실로 증명된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손자의 전생이 그 아서왕이라는데···.

아직도 믿기지 않는 진실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온 모양이군.”

유문택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려졌다. 그곳에는 지구연방의 핵심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연방의 수상을 비롯한 정재계의 거물들. 그리고 그도 잘 아는 로스차일드 가의 가주 조나단도 보였다.

먼저 그들이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유문택 회장님.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오래간만이군요.”

“그러게요. 정말 반갑습니다. 회장님.”

“아, 조나단 가주님. 그리고 메켈린 수상께서도 오셨군요.”

그밖에도 많은 인사들과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유문택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유문택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의미였다.

“그건 그렇고 축하드립니다.”

“별 말씀을. 기껏 해봐야 손자 결혼식일 뿐인데요, 뭘. 별로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튼 축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랬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바로 유태진의 결혼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렇듯 조부인 유문택에게 앞 다퉈 얼굴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할 것도 없다니요. 그분의 이름이 얼마나 우주 만방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그분의 경사가 바로 우리 지구의 경사 아닙니까.”

“하긴 그분 덕분에 우리 지구의 위상이 이만큼 되었지요.”

하나같이 아부를 주워섬기는 사람들.

물론 듣기 좋은 소리이긴 하나 그것도 어느 정도다. 유문택은 화제를 전환했다.

“이만 시간이 되었군요. 자, 다들 함에 오르도록 하지요.”

늦진 않았지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결혼식 일자는 오늘로부터 며칠 뒤였지만, 결혼식일 치러지는 장소가 바로 다름아는 연합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아르탈 행성이다.

그곳까지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늦지 않을 것이다.

* * *

연합의 중심지인 아르탈 행성은 완연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연합의 창시자이자 윤회전생을 거쳐 만능신이라는 신명을 얻은 유태진의 결혼식 당일.

연합에 속한 이들이라면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이 평범한 위정자가 치르는 결혼식이라면 딱히 기뻐할 이유가 없겠지만, 유태진은 연합의 수호자이자 그들을 공명정대하게 다스리는 신 그 자체.

그러니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

한편 이제 막 아르탈 행성에 도착한 지구 사람들은 컬쳐쇼크를 느껴야 했다.

“여, 여기가 바로 그···!”

“···놀랍군. 우리 지구와는 비교도 안 돼.”

현재 지구가 경이로울 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지만, 그래봐야 아르탈 행성연합의 평균 수준에 겨우 가까워지고 있을 뿐이다. 가장 발달한 본성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변두리 시골 행성만도 못했다.

먼저 메켈린 수상이 일행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 다들 아시겠지만 행동거지에 주의합시다. 그 분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말이지요. 여긴 지구가 아닙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 지구의 명예가 달렸습니다.”

“예.”

“물론이지요.”

사실 지구의 정재계 인사들의 위치는 이런 큰 행사에 초대받을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로스차일드가의 가주인 조나단조차 그럴진대, 다른 이들이야 말해 뭣하겠는가.

지구연방을 대표하는 수상인 메켈린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 외에는 어느 누구 하나 초대받을 자격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본성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유태진의 후광 때문이었다. 그가 지구 출신인 만큼 지구인에 대해 더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행사장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거물들이 즐비했다.

연합을 주름잡는 오대 가문의 인물들은 물론, 우주의 정재계 인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구의 인사들로서는 그저 사진이나 영상으로밖에 접하지 못했던 그런 거물들이었다.

헌데 그런 거물들이 죄다 유문택에게 몰려들었다.

“오셨군요, 어르신.”

“축하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진작 찾아뵈어야 했는데···.”

“세상에나···.”

지구 인사들의 입이 절로 떡하니 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는 천문학적인 부와 권력을 누리는 로스차일드 가조차 이곳에서는 일개 구멍가게만도 못했다. 그만큼 여기 모인 이들이 거물이라는 말이었다.

헌데 그런 거물들이 앞 다퉈 축하인사를 올리는 광경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때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간신히 충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빠도 오셨어요?

“엘레나. 여기 있었구나.”

조나단은 그제야 자신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자신의 딸임을 인식했다. 그동안 인베이더 무리를 소탕하느라 지구에도 찾아오지 못할 만큼 바쁘다고 들었는데, 오늘 결혼식에는 참석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런 딸의 옆에 누군가가 자리했다. 훤칠한 사내 녀석이었는데, 엘레나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런 조나단의 시선을 눈치 챈 엘레나가 선수를 치듯 입을 열었다.

“레이첸이라고 해요. 제 보이 프렌드죠.”

“보··· 보이 프렌드라고!?”

조나단이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레이첸에 대해서는 조나단도 모르지 않았다. 이전에 지구에 방문했었을 때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딱히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젊은 나이에 믿기지 않는 강자라고 해서 기억해 두었는데, 설마 딸의 보이프렌드가 되어 다시 나타날 줄이야!

조나단의 인상이 절로 험악해졌다. 애지중지하던 딸이 하루아침에 웬 사내 녀석을 보이프렌드라고 데려왔으니 딸 가진 아비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바빠서 지구에도 안 찾아오더니 연애질 중이었냐? 게다가 보이 프렌드라니! 이 아버지는 한 번도 들은 적도 없다. 어떻게 된 거냐?”

“아빠도 참. 저도 이제 스물이라고요. 언제까지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요?”

“그래도 그렇지! 이 아버지가 이런 중요한 일을 까맣게 몰라서야 되겠니?”

“아이, 몰라요. 아무튼 그런 줄 아세요.”

조나단은 몇 번의 설득 끝에 결국 둘의 교제를 허락하고 말았다.

“휴우···.”

어지간한 놈팡이였다면 어떻게든 떼어놨을 테지만, 레이첸은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거물이었다.

본인 실력도 그랜드 급 이상인데다 그의 가문은 연합 내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는다는 5대 가문 중 하나.

로스차일드 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매달려도 부족할 정도인 것이다.

아무튼 레이첸을 딸의 보이프렌드로 인정한 덕분일까? 조나단은 레이첸과 엘레나를 통해 많은 연합의 거물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5대 가문은 물론, 최근 연합 내에서 입지가 크게 부상하고 있는 이들도 만났다.

‘리클 데이미안이라고 했지?’

리클 데이미안은 5대 가문인 크리스첸 가문의 혈족이었지만, 따로 독립해 라이트닝 운송 서비스를 창설한 인물이었다.

현재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차원단층을 뛰어넘는 기술을 개발하였고, 이를 통해 사업을 전 우주규모로 크게 확장하였다.

현재 가장 빠른 운송하면 라이트낭 운송 서비스를 떠올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기억할만한 인물은 그뿐만이 아니다. 특히 잠재되어 있던 하이엘프의 피를 일깨운 제이나는 엘프들의 여왕으로 추앙받았다.

그녀는 최근 테라포밍 사업을 시작했는데, 일반적인 테라포밍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이 완전히 제어 하에 둔 에메랄드 헤븐을 통해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불모지 행성을 단기간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거주행성으로 탈바꿈시키는 방식이었다.

기존의 테라포밍보다 훨씬 기간이 짧은데다, 세계수를 통한 방대한 수림을 조성하여 자연친화적으로 행성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현재 많은 개척자들이 그녀의 테라포밍을 선택했다.

지구도 앞으로 우주로 진출해 세력을 확장하려면 제이나와의 협력이 필요할 것이다.

[자, 착석해 주십시오. 곧 결혼식이 거행됩니다.]

사회자의 그 말에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 앉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놀랍게도 관리국의 국장인 베네트 국장이었다. 연합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그가 사회자를 떠맡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결혼식을 치르는 건 바로 유태진이었다. 그러니 베네트 국장 정도 되는 거물이 사회를 맡아야 급이 맞았다.

[자, 신랑 입장.]

베네트 국장의 외침에 흰색 정장을 걸친 사내가 저 행사장 끝에서부터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유태진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 치르는 결혼식에 여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단상에 선 주례자를 마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주례자는 공화국의 수상인 베이노아. 그가 오늘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주었다.

[그럼 이번에는 신부 입장.]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신부가 입장하기 시작했다. 희디흰 웨딩드레스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고 고결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여신이었으니까.

아르탈 행성 연합이 세워진 이후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온 빛과 생명의 여신 루네리아가 바로 이번 결혼식의 신부인 것이다.

‘루네리아···.’

유태진은 감상에 젖은 표정으로 루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던가.

15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렇듯 간신히 그녀와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참고 견뎌준 그녀에게 너무도 고맙고도 미안했다.

하지만 그건 루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아서···.’

처음부터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단지 필멸자이면서도 지구를 침공했던 신좌들을 격퇴했다는 사실에 조금 흥미를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주로 진출해 인베이더에게 피해를 입은 자들을 규합했고, 그들을 하나로 엮어 거대한 세력을 일구었다.

그리고는 직접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우리의 신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루네리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인베이더의 위협은 아르탈 행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문제로 여러모로 골치 아팠는데, 우주의 많은 행성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한다면 한층 대응하기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아서와 함께했다. 그러면서 점점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아서는 지독하리만치 재능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끝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대신했다.

그런 열정은 그를 지켜보는 어느 누구라도 응원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루네리아조차 그를 내버려두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가 연합을 대표하는 수호신이 된 것은. 결국 아서의 필사적인 노력에 감동한 나머지 한 행성의 성계신이란 입장마저 잊고 적극 나서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이젠 신과 필멸자의 관계가 아닌 서로를 대등하게 마주하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무려 1000년의 세월을 인내해온 루네리아로서는 그 누구보다도 고대했던 순간이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이번 결혼을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가운데, 이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아리엔과 리스티 두 사람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네.’

리스티는 착잡한 얼굴로 그 둘의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유태진의 존재는 리스티에게 있어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제 막 소환된 주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었고, 거기에 영능이 봉인된 행성 출신이라고는 이해되지 않는 고급 영력 운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지식은 생각 이상으로 폭넓고도 깊었다.

지금까지 리스티는 자신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나마 찾는다면 자신의 친 핏줄인 오빠 한 사람 뿐.

그 외에 다른 사람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천재성은 압도적이었다.

그렇지만 유태진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자신만큼 천재는 아니지만, 그것을 커버하고도 남는 막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와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 즐거웠다.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자신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있었던가?

어느 순간부터 리스티는 유태진의 존재를 가슴 깊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로서 유태진은 저 드높고 고결한 여신 루네리아의 남편이 되었으니까.

더 이상은 바랄 수도, 사모할 수도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심정은 그 옆에 앉은 아리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승님···.’

처음에는 동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모하는 마음이 되었고, 또 사랑이 되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순 없었다.

그는 가문의 비전을 복원해준 은인이었고, 자신에게 가르침을 내려준 스승이었으니까.

언강생심 사랑이란 감정을 내비칠 순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렇듯 누군가의 남편이 된다고 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않은 게 너무도 한스러웠다.

어느덧 결혼식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신부가 던진 부케가 공중을 날고 있었다.

“어어?”

일순 아리엔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하필 루네리아가 던진 부케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부케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였던 부케가 도중에 다수의 인원이 항구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유문택도 익히 잘 아는 이들이었다.

그쪽에서도 유문택을 알아본 듯 즉시 우르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중 선두에 선 인물이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는 다름아닌 원탁의 기사의 실질적인 리더라 할 수 있는 갤러해드였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갤러해드 경이 아니십니까. 그럼 원탁의 기사도 참석하는 겁니까?”

먼저 인사를 건네오는 갤러해드에게 화답하는 유문택. 그러자 갤러해드가 정색하며 말했다.

“말씀을 낮추시죠. 주군의 조부께 존대를 듣는 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알았네. 그러도록 하지.”

유문택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저들에게 존대 받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저들은 지구의 오랜 역사 속에 존재해온 전설의 인물들.

평범한 기업의 회장에 불과한 자신이 저들에게 존대를 받게 될 날이 오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더군다나 현재 원탁의 기사들의 인기와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한낱 이야기 속 전설이라 여겨지던 그들의 존재가 사실로 증명된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손자의 전생이 그 아서왕이라는데···.

아직도 믿기지 않는 진실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온 모양이군.”

유문택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려졌다. 그곳에는 지구연방의 핵심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연방의 수상을 비롯한 정재계의 거물들. 그리고 그도 잘 아는 로스차일드 가의 가주 조나단도 보였다.

먼저 그들이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유문택 회장님.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오래간만이군요.”

“그러게요. 정말 반갑습니다. 회장님.”

“아, 조나단 가주님. 그리고 메켈린 수상께서도 오셨군요.”

그밖에도 많은 인사들과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유문택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유문택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의미였다.

“그건 그렇고 축하드립니다.”

“별 말씀을. 기껏 해봐야 손자 결혼식일 뿐인데요, 뭘. 별로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튼 축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랬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바로 유태진의 결혼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렇듯 조부인 유문택에게 앞 다퉈 얼굴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할 것도 없다니요. 그분의 이름이 얼마나 우주 만방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그분의 경사가 바로 우리 지구의 경사 아닙니까.”

“하긴 그분 덕분에 우리 지구의 위상이 이만큼 되었지요.”

하나같이 아부를 주워섬기는 사람들.

물론 듣기 좋은 소리이긴 하나 그것도 어느 정도다. 유문택은 화제를 전환했다.

“이만 시간이 되었군요. 자, 다들 함에 오르도록 하지요.”

늦진 않았지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결혼식 일자는 오늘로부터 며칠 뒤였지만, 결혼식일 치러지는 장소가 바로 다름아는 연합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아르탈 행성이다.

그곳까지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늦지 않을 것이다.

* * *

연합의 중심지인 아르탈 행성은 완연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연합의 창시자이자 윤회전생을 거쳐 만능신이라는 신명을 얻은 유태진의 결혼식 당일.

연합에 속한 이들이라면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이 평범한 위정자가 치르는 결혼식이라면 딱히 기뻐할 이유가 없겠지만, 유태진은 연합의 수호자이자 그들을 공명정대하게 다스리는 신 그 자체.

그러니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

한편 이제 막 아르탈 행성에 도착한 지구 사람들은 컬쳐쇼크를 느껴야 했다.

“여, 여기가 바로 그···!”

“···놀랍군. 우리 지구와는 비교도 안 돼.”

현재 지구가 경이로울 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지만, 그래봐야 아르탈 행성연합의 평균 수준에 겨우 가까워지고 있을 뿐이다. 가장 발달한 본성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변두리 시골 행성만도 못했다.

먼저 메켈린 수상이 일행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 다들 아시겠지만 행동거지에 주의합시다. 그 분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말이지요. 여긴 지구가 아닙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 지구의 명예가 달렸습니다.”

“예.”

“물론이지요.”

사실 지구의 정재계 인사들의 위치는 이런 큰 행사에 초대받을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심지어 로스차일드가의 가주인 조나단조차 그럴진대, 다른 이들이야 말해 뭣하겠는가.

지구연방을 대표하는 수상인 메켈린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 외에는 어느 누구 하나 초대받을 자격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본성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유태진의 후광 때문이었다. 그가 지구 출신인 만큼 지구인에 대해 더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행사장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거물들이 즐비했다.

연합을 주름잡는 오대 가문의 인물들은 물론, 우주의 정재계 인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구의 인사들로서는 그저 사진이나 영상으로밖에 접하지 못했던 그런 거물들이었다.

헌데 그런 거물들이 죄다 유문택에게 몰려들었다.

“오셨군요, 어르신.”

“축하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진작 찾아뵈어야 했는데···.”

“세상에나···.”

지구 인사들의 입이 절로 떡하니 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는 천문학적인 부와 권력을 누리는 로스차일드 가조차 이곳에서는 일개 구멍가게만도 못했다. 그만큼 여기 모인 이들이 거물이라는 말이었다.

헌데 그런 거물들이 앞 다퉈 축하인사를 올리는 광경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때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간신히 충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빠도 오셨어요?"

“엘레나. 여기 있었구나.”

조나단은 그제야 자신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자신의 딸임을 인식했다. 그동안 인베이더 무리를 소탕하느라 지구에도 찾아오지 못할 만큼 바쁘다고 들었는데, 오늘 결혼식에는 참석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런 딸의 옆에 누군가가 자리했다. 훤칠한 사내 녀석이었는데, 엘레나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런 조나단의 시선을 눈치 챈 엘레나가 선수를 치듯 입을 열었다.

“레이첸이라고 해요. 제 보이 프렌드죠.”

“보··· 보이 프렌드라고!?”

조나단이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레이첸에 대해서는 조나단도 모르지 않았다. 이전에 지구에 방문했었을 때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딱히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젊은 나이에 믿기지 않는 강자라고 해서 기억해 두었는데, 설마 딸의 보이프렌드가 되어 다시 나타날 줄이야!

조나단의 인상이 절로 험악해졌다. 애지중지하던 딸이 하루아침에 웬 사내 녀석을 보이프렌드라고 데려왔으니 딸 가진 아비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바빠서 지구에도 안 찾아오더니 연애질 중이었냐? 게다가 보이 프렌드라니! 이 아버지는 한 번도 들은 적도 없다. 어떻게 된 거냐?”

“아빠도 참. 저도 이제 스물이라고요. 언제까지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요?”

“그래도 그렇지! 이 아버지가 이런 중요한 일을 까맣게 몰라서야 되겠니?”

“아이, 몰라요. 아무튼 그런 줄 아세요.”

조나단은 몇 번의 설득 끝에 결국 둘의 교제를 허락하고 말았다.

“휴우···.”

어지간한 놈팡이였다면 어떻게든 떼어놨을 테지만, 레이첸은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거물이었다.

본인 실력도 그랜드 급 이상인데다 그의 가문은 연합 내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는다는 5대 가문 중 하나.

로스차일드 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매달려도 부족할 정도인 것이다.

아무튼 레이첸을 딸의 보이프렌드로 인정한 덕분일까? 조나단은 레이첸과 엘레나를 통해 많은 연합의 거물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5대 가문은 물론, 최근 연합 내에서 입지가 크게 부상하고 있는 이들도 만났다.

‘리클 데이미안이라고 했지?’

리클 데이미안은 5대 가문인 크리스첸 가문의 혈족이었지만, 따로 독립해 라이트닝 운송 서비스를 창설한 인물이었다.

현재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차원단층을 뛰어넘는 기술을 개발하였고, 이를 통해 사업을 전 우주규모로 크게 확장하였다.

현재 가장 빠른 운송하면 라이트낭 운송 서비스를 떠올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기억할만한 인물은 그뿐만이 아니다. 특히 잠재되어 있던 하이엘프의 피를 일깨운 제이나는 엘프들의 여왕으로 추앙받았다.

그녀는 최근 테라포밍 사업을 시작했는데, 일반적인 테라포밍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이 완전히 제어 하에 둔 에메랄드 헤븐을 통해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불모지 행성을 단기간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거주행성으로 탈바꿈시키는 방식이었다.

기존의 테라포밍보다 훨씬 기간이 짧은데다, 세계수를 통한 방대한 수림을 조성하여 자연친화적으로 행성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현재 많은 개척자들이 그녀의 테라포밍을 선택했다.

지구도 앞으로 우주로 진출해 세력을 확장하려면 제이나와의 협력이 필요할 것이다.

[자, 착석해 주십시오. 곧 결혼식이 거행됩니다.]

사회자의 그 말에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 앉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놀랍게도 관리국의 국장인 베네트 국장이었다. 연합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그가 사회자를 떠맡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결혼식을 치르는 건 바로 유태진이었다. 그러니 베네트 국장 정도 되는 거물이 사회를 맡아야 급이 맞았다.

[자, 신랑 입장.]

베네트 국장의 외침에 흰색 정장을 걸친 사내가 저 행사장 끝에서부터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유태진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 치르는 결혼식에 여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단상에 선 주례자를 마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주례자는 공화국의 수상인 베이노아. 그가 오늘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주었다.

[그럼 이번에는 신부 입장.]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신부가 입장하기 시작했다. 희디흰 웨딩드레스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고 고결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여신이었으니까.

아르탈 행성 연합이 세워진 이후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온 빛과 생명의 여신 루네리아가 바로 이번 결혼식의 신부인 것이다.

‘루네리아···.’

유태진은 감상에 젖은 표정으로 루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던가.

15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렇듯 간신히 그녀와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참고 견뎌준 그녀에게 너무도 고맙고도 미안했다.

하지만 그건 루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아서···.’

처음부터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단지 필멸자이면서도 지구를 침공했던 신좌들을 격퇴했다는 사실에 조금 흥미를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주로 진출해 인베이더에게 피해를 입은 자들을 규합했고, 그들을 하나로 엮어 거대한 세력을 일구었다.

그리고는 직접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우리의 신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루네리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인베이더의 위협은 아르탈 행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문제로 여러모로 골치 아팠는데, 우주의 많은 행성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한다면 한층 대응하기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아서와 함께했다. 그러면서 점점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아서는 지독하리만치 재능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끝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대신했다.

그런 열정은 그를 지켜보는 어느 누구라도 응원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루네리아조차 그를 내버려두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가 연합을 대표하는 수호신이 된 것은. 결국 아서의 필사적인 노력에 감동한 나머지 한 행성의 성계신이란 입장마저 잊고 적극 나서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이젠 신과 필멸자의 관계가 아닌 서로를 대등하게 마주하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무려 1000년의 세월을 인내해온 루네리아로서는 그 누구보다도 고대했던 순간이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이번 결혼을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가운데, 이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아리엔과 리스티 두 사람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네.’

리스티는 착잡한 얼굴로 그 둘의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유태진의 존재는 리스티에게 있어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제 막 소환된 주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었고, 거기에 영능이 봉인된 행성 출신이라고는 이해되지 않는 고급 영력 운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지식은 생각 이상으로 폭넓고도 깊었다.

지금까지 리스티는 자신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나마 찾는다면 자신의 친 핏줄인 오빠 한 사람 뿐.

그 외에 다른 사람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천재성은 압도적이었다.

그렇지만 유태진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자신만큼 천재는 아니지만, 그것을 커버하고도 남는 막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와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 즐거웠다.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자신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있었던가?

어느 순간부터 리스티는 유태진의 존재를 가슴 깊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로서 유태진은 저 드높고 고결한 여신 루네리아의 남편이 되었으니까.

더 이상은 바랄 수도, 사모할 수도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심정은 그 옆에 앉은 아리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승님···.’

처음에는 동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모하는 마음이 되었고, 또 사랑이 되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순 없었다.

그는 가문의 비전을 복원해준 은인이었고, 자신에게 가르침을 내려준 스승이었으니까.

언강생심 사랑이란 감정을 내비칠 순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렇듯 누군가의 남편이 된다고 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않은 게 너무도 한스러웠다.

어느덧 결혼식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신부가 던진 부케가 공중을 날고 있었다.

“어어?”

일순 아리엔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하필 루네리아가 던진 부케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부케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였던 부케가 도중에 둘로 분열해 떨어지고 있었다.

아리엔은 자신에게 날아온 부케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부케는 그 옆에 앉은 리스티가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루네리아는 여신이었다. 그런 그녀가 던진 부케가 우연히 자신들에게 날아올 리가 없었다. 그것도 멀쩡했던 부케가 자신들의 숫자에 맞춰 분열했다면 더욱 확실했다.

당황하는 그녀들에게 루네리아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놀랄 것 없어요. 당신들이 그를 사모하고 있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그 말에 아리엔과 리스티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신님. 그분의 마음을 가로챌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예, 여신님께서 우려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흰 포기할 테니까요.”

[탓하자는 게 아니에요. 그는 그만큼 매력적이니까. 여러분들이 그에게 반해도 이상할 건 없는 일이죠.]

“그럼?”

[단지 이야기 해두고 싶어서요. 지금도 그를 사모하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두 사람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대체 이런 질문을 왜 던진단 말인가?

“그건···.”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그들에게 그녀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그가 저와 이어졌다 해도요? 앞으로도 계속 그를 사모할 건가요?]

잠시 갈등하던 아리엔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도 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요. 포기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그게 생각처럼은 안 되네요. 죄송합니다, 여신님. 어떻게든 정리해 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유태진을 사모하는 마음을 좀처럼 돌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어떻게든 포기해야 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여신이었으니까. 초월자인 그녀가 이에 앙심이라도 품는다면 그녀뿐만 아니라 그와 가까운 이들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헌데 그때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여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당신들을 허락할 테니까.]

“예!?”

“그게 무슨?”

두 사람은 당황해 되물었다. 누구보다 영민하던 리스티조차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둘을 향해 루네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아직 잘 실감이 안 가겠지만, 우리는 초월자에요. 영원을 살아가죠. 불과 백여 년에 불과한 필멸자의 삶과는 전혀 달라요.]

영원이나 다름없는 너무나도 긴 삶. 그것은 축복이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이기도 했다.

마음을 준 필멸자들이 늙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해 영원히 이별하는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마음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초월자는 오롯이 홀로 지낼 수밖에 없었고, 무언가에 쉽게 애착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건 그들이 초월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버틸 수 있다고 해서 그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외롭고도 힘든 삶이에요. 그리고 그 삶은 앞으로 당신들도 영유하겠죠.]

“······.”

리스티와 아리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미 그들은 그랜드 급을 넘어 반신의 경지에 한발 내딛은 상태였다. 그녀들의 재능과 경지를 생각한다면 완전한 초월자가 되는 날도 그리 머지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루네리아의 그 말이 그 무엇보다 더욱 가슴 깊이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 거죠?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리스티가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루네리아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였다.

[아서는 당신들을 누구보다 아끼고 있어요.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가장 가까운 친인으로서 친애의 감정을 품고 있는 거겠죠. 그래서 나도 내버려둘 수가 없더군요.]

긴장한 두 사람을 향해 루네리아는 조용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기회를 줄게요. 당신들이 그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서, 설마 그 말은···?”

[그래요. 여러분들이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소리랍니다.]

“어떻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직접 듣고도 귀가 의심될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사랑이 영원하다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랑을 나 혼자 독차지할 생각은 없어요. 영겁이나 다름없는 긴 삶 속에서 당신들 둘 정도라면 너그럽게 받아들일 생각이랍니다.]

“아아···.”

아리엔은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젠 완전히 포기해야 했던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루네리에게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건 리스티도 마찬가지. 단지 그녀는 아리엔보다 조금 더 냉정했다.

“배려 감사해요. 그 자리를 저희에게도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감사를 표하는 그녀의 모습에 루네리아는 조용히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는 이제 그와 함께하는 동반자에요. 은혜 같은 말은 필요 없답니다.]

“···예.”

여신답지 않은 소탈함에 리스티는 깨달았다. 똑같이 그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자신들은 결코 그녀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래도 너무도 고맙고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결혼식은 축복 속에서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 * *

오렌은 상처 입은 몸으로 서둘러 자리를 이탈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아군의 배신이라니! 애당초 이 업계가 더럽고도 추악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뒤통수를 맞고 보니 그것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황급히 허리를 뒤로 뺐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허리어림이 두 동강이 나 지금쯤 황천을 건너고 있었겠지.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좋지 못했다. 허리를 베인 상처가 제법 깊어서였다. 내장을 베이진 않았지만, 지속적인 출혈에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젠장!”

그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약과 붕대를 꺼내 허리를 동여맸다. 허술한 응급처치이기는 했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덕분에 일단 출혈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안전을 장담하긴 어려웠다. 곧 추적하는 자들이 따라붙을 테니까.

‘인생역전 할 기회일 줄 알았는데··· 역시 독이 든 사과였나.’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당초 보물지도를 손에 넣었던 것 자체가 문제였다. 유적을 발굴하고 거기서 얻은 재화로 보다 수준 높은 가르침을 받아 성장하고 싶었는데, 모든 계획이 헝클어지고 말았다.

워낙 유적의 규모가 커서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동료를 모았던 것이 패착이었다.

결국 그 중에서 배신자가 나왔고, 놈은 외부인들을 끌어들였다. 지금 쫒기고 있는 것도 배신자가 끌어들인 무리들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야지. 유적의 유물은 빼앗긴다 해도 어떻게든 살아야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가 살아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상을 입은 데다 그의 싸움 실력은 너무도 보잘 것 없었으니까.

잘 쳐줘봐야 이류 수준. 그것도 이십년 이상 피나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그에게는 딱히 재능이 없었다.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었고, 배워도 특출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뭐든지 평범 이하. 남들이 하나를 배워 하나를 알면, 그는 그 하나를 완전히 익히는 데에 몇 배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문제는 그의 향상심이 남들보다 더 높다는 것이었다. 그는 체념하지 못했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높은 곳을 바라보았고,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의 재능으로는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언젠가부터 트레져 헌터 기술을 배우고 유적을 전전하게 되었다. 오래된 옛 고대문명의 지식이라면 재능 없는 몸뚱이라도 더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죽게 될 운명이었던가.

“고작 여기까지였나?”

“잘 도망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쉬웠군.”

어느새 추적자들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이 겨눈 무기가 오렌을 노리고 있었다.

“네놈들!”

서둘러 검을 빼들고 겨눴지만, 이미 승산은 희박했다. 저들 중 하나를 감당하는 것도 어려운데다가 부상까지 입은 상황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치더군. 그 운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야.”

배신자가 이죽이며 석궁을 겨눴다. 저것이 발사되는 순간이 바로 오렌의 인생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고마웠다. 네가 찾아준 유적과 유물은 우리가 잘 써주마.”

피융!

시위를 떠난 화살이 파공성과 함께 오렌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섬광 같아서 고작 검 한 자루로는 미처 막을 수도 없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던 그 순간, 어디선가 찾아든 은빛 섬광이 긴 호선을 그리며 공간을 베어냈다.

푸학!

“뭐, 뭣!?”

“이건!?”

추적자들의 입에서 당혹성이 흘렀다. 갑작스런 검광에 석궁의 화살이 베어진 것은 물론, 그것을 쏜 자까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난 것이다.

이건 평범한 실력자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솜씨였다.

“누구냐, 네놈은!?”

“그걸 알 필요가 있을까? 곧 죽을 녀석들이.”

“뭣이!?”

비웃음 섞인 냉소와 함께 나타난 젊은 사내. 그의 손에는 장검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적도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오러 쉐도우(검기.劍氣)!?”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라고?”

“도망쳐!”

유적을 털어먹고 사는 도굴꾼에 지나지 않는 그들로서는 오러 쉐도우를 구사하는 강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중에는 익스퍼트 급의 실력자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들이 뭉쳐도 오러 쉐도우를 받아내는 건 지난했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려는 놈들의 모습에 사내가 차가운 안광을 뿌리며 조소했다.

“도망가겠다고? 그게 맘대로 될 것 같나?”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은색 검기가 번뜩였다. 휘둘러진 것은 분명 한 차례였지만, 공간을 뒤덮은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검광이었다.

그리고 그 검광이 사라진 순간, 적도들의 몸은 수백 수천 토막이 되어 바닥에 쏟아졌다. 놈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부 참살한 것이다.

“으헉!”

오렌은 기겁한 얼굴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세상을 전전하면서 많은 자들을 봐왔지만, 이토록 무서운 솜씨를 가진 실력자를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여기서 죽는 건가?’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배신자들을 죽인 저 사내가 마음먹는다면 자신이 찾아낸 유적을 강탈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대뜸 물음을 던졌다.

“이름이 뭐지?”

“예?”

“이름이 뭐냐고.”

뜬금없는 그 질문에 오렌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 오렌이라고 합니다. 보다시피 트레져 헌터죠.”

“오렌이라···.”

사내는 그 이름을 조용히 곱씹었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그 속내는 감격에 젖어 있었다.

‘이제야 겨우 찾아냈구나.’

유태진은 보는 순간 그 즉시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윤재민이란 것을. 생김새가 달라지고, 성격이 달라졌어도 그가 품은 영혼만큼은 전혀 달라진 바가 없었다.

태무환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업마저도 불사르면서 목숨을 내놨던 그는 이렇듯 재능 없는 범인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래서 찾아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윤재민의 영혼의 행방을 쫓아온 그는 결국 윤재민이 오렌이란 자로 환생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서의 삶을 살아본 그였기에 재능 없는 자의 고통이 어떠한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보살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듯 화신 하나를 만들어내어 윤재민의 환생체 옆에 붙이게 된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 내가 널 보호해주마. 네가 잃은 것들을 전부 되찾을 때까지.’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오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태진은 조용히 결심을 다졌다.

이제부터가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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