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
17권-41화
그때 유태진의 검 끝이 그들을 겨누었다. 그러자 우주를 쪼갤 것 같은 첨예한 기세가 신좌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음···.]
모르스가들이 움찔하며 침음성을 삼켰다. 단지 기세를 뿌린 것만으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지금 유태진은 일반적인 중상위 신이 아니다. 심지어 창세성검의 파편으로 완성된 엑스칼리버까지 쥔 지금은 상위신이라 해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긴장한 그들의 모습을 본 유태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내가 네놈들을 직접 박살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선약이 있어서 힘들겠군.”
[···그렇군. 그 게으른 녀석이 이제야 나섰나?]
[빌어먹을 화신 놈! 일이 이지경이 돼서야 나서다니.]
신좌들은 그 말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방금 유태진이 드러낸 칼날 같은 기세는 신좌들을 압박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바로 뒤에서 방관하듯 지켜보던 태무환에게 보내는, 일종의 전언이었다.
유태진의 신형이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이미 저 멀리 우주공간 위에 서 있는 태무환을 향해 있었다.
모르스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냐? 그럼 우릴 내버려두고 그룬베일의 화신을 상대하겠다는 거냐?]
“물론이다. 애초부터 그럴 예정이었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이대로 간다면 너와 함께 한 버러지들이 우리 손에 죽게 될 거란 걸 잘 알 텐데. 이들이 죽어도 괜찮다는 거냐?]
모르스가들에게는 유태진이 태무환을 상대하는 게 최상이지만, 그렇기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모인 필멸자들이나 반신 중에는 유태진과 가까운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을 방치하고 태무환을 상대하러 간다는 건 뭔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런 그들의 혼란을 읽은 유태진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네놈들이 강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들이라면 네놈들을 충분히 상대해 줄 거다.”
그가 자신의 등 뒤를 향해 나직이 내뱉었다.
“멀린. 뒤는 맡겨 두겠다. 믿어도 되겠지?”
“예, 그 명령 받드옵니다. 나의 왕이시여.”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이는 멀린. 좀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없던 그가 공간을 뛰어넘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웃기는군. 고작 이런 몽마 혼혈 따위로 뭘 어쩌겠다고?]
[건방지구나! 네놈이 신격을 얻었다고 해서 우릴 지금 무시하는 거냐!]
멀리 떠나가는 유태진의 뒷 모습에 신좌들이 대노하며 외쳤다.
멀린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긴 하나, 그래봤자 그랜드 급 수준. 그 정도 전력 하나가 더해진다고 해서 지금의 전세를 뒤엎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멀린은 그들의 강대한 살기를 마주하면서도 태연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물론 저 뿐이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전 혼자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주변으로 다수의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차 눈덩이처럼 커지더니 이내 온전한 사람의 형체를 갖추었다.
이를 목도한 신좌들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것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이 정도의 전력을 감춰두고 있었다고?]
그들이 놀랄 만도 했다. 지금 멀린에 의해 불려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반신초월자에 다다른 강자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수만 무려 수백에 이르렀다. 제아무리 반신급 초월자들을 하찮게 여기는 신좌들이라지만 수백에 이르는 반신급 초월자들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그들 중 선두에 선 자가 모두를 대표해 입을 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홀로 아발론을 지키고 있던 원탁의 기사 랜슬롯이었다.
“우리는 원탁의 기사(Knight of Round). 진정한 왕 아서 팬드리건을 섬기는 기사이며 지구를 지키기 위해 천오백년을 예비해 온 수호자의 자격으로 그 어떤 침략자들도 용납하지 않겠다.”
[···네놈들, 아직까지 살아 있었더냐?]
모르스가가 두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신좌들이라면 저들의 정체를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지구를 점령하기 직전에 다다르고도 실패한 이유 중 하나가 저들의 목숨을 건 저항 때문 아니던가.
그런데 그 당시 대부분 사망했던 놈들이 어떻게 살아서 다시 눈앞에 나타난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좌들은 곧 내막을 알아챘다. 좀 전까지 열람이 금지되어 있던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가 해금되었기 때문이었다.
[큭! 과연 그렇게 된 거였군. 빌어먹을 쥬헬 그리아드! 소멸된 지금까지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거냐?]
지금은 소멸하고 사라졌지만, 성계신 쥬헬 그리아드가 건재했을 당시 맺은 계약은 여전히 원탁의 기사들을 성지의 신전 안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좌들과의 싸움으로 죽음을 맞이하고도 그들은 윤회전생에 들지 않고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고행에 가까운 수련을 거치면서 다들 하나같이 반신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었다.
물론 자질에 따라서 초입에 간신히 발을 걸친 자도 있었고, 반신의 끝에 이르러 그보다 위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품은 각오는 동일했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인베이더의 침략에 맞서 싸우겠다고! 그렇게 결의하면서 그 긴 세월을 한 마음이 되어 버텨왔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또다시 보게 되었군. 악신들이여! 1500년 전 당시에도 격퇴되었으면서,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지구를 노리는가. 이번만큼은 결코 가만 두지 않겠다!”
신좌들을 향해 검을 겨누며 기세를 활짝 개방한 사내. 그는 랜슬롯과 더불어 원탁의 최강을 논하는 기사 갤러해드였다.
그가 전력을 개방하자 초월적인 존재감이 사위를 장악했다. 그랜드 급에 머물던 1500년 전 당시에도 그의 힘은 반신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하물며 반신의 끝에 다다라 하급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능력은 이 자리에 있는 신좌에 필적했다.
그들의 권능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정면에서 맞설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한 것이다.
이를 본 신좌들이 격노를 터뜨렸다.
[건방진!]
[감히 천한 필멸자 놈들이 격이 높아졌다고 해서 초월자의 가휘를 범하는가!]
[버러지는 버러지일 뿐이지. 내 손으로 모조리 죽여주겠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젠 뒤를 생각하지 않고 본신으로부터 힘을 끌어내기 시작한 신좌들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여파를 흩뿌리면서 우주를 뒤흔들었다.
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진정한 마지막 싸움의 시작이었다.
* * *
아득히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한 유태진을 맞이해준 건 태무환이었다. 그가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왔군.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기다렸다면 미안하군. 생각보다 과정이 좀 복잡해야 말이지.”
[그럼 오래 기다린 만큼 이 몸을 실망시키진 않겠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곧바로 투지를 드러내는 태무환. 유태진도 지금까지 전쟁에 나서지 않고 기다려준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말했다.
“물론,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다. 내 검으로 보여주지.”
어느덧 그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다른 이들에게는 느껴지지 않겠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지금 심상을 통한 무수한 공방이 오고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치 끝에 보이지 않던 공방이 드디어 격돌의 시발탄이 되었다.
콰아아아앙!
내뻗는 일검과 지르는 일권!
그것은 둘 다 평이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들이 지금까지 쌓은 깨달음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고, 물리적인 충격의 규모를 넘어선 그들의 첫 수는 시공간마저 찢었다.
끄그그그극!
찢겨나간 시공간은 곧 복원력에 의해 원상태로 되돌아갔지만, 복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듭된 격돌에 의한 여파가 시공간을 무참히 난자해 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자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 격돌의 여파만으로도 전 함대의 화력을 능가하고 있어!”
“이게 진짜 상위신의 힘이란 건가?”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이 얽히고 부서졌다. 유태진과 태무환의 격돌은 빠르고 강함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일보를 내딛을 때마다 시공간을 벗어나 이동하고, 손을 쓸 때마다 시간을 역행하고 거스르며, 한번 펼친 공세는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공간의 한계마저 초월했다.
이것이 바로 신의 영역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하하하! 그래 바로 이거야! 이제야 제대로 싸우는 기분이군!]
태무환은 희열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더욱 광기어린 모습으로 맹공을 퍼부어왔다. 그 모습은 가히 투쟁의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손에서 온갖 천마신교의 절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중원무림 시절 천마신교의 지존인 천마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가 아는 무공은 천마신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천마신교가 보유했던 대부분의 무공을 섭렵하고 있었다.
유태진도 그에 맞서 각종 절기를 쏟아냈다. 점창의 무학을 기반으로 그가 배웠었던 수많은 종류의 무학들이 완성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백여 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태무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제 이 우주를 통틀어 봐도 너밖에 없다! 나와 손속을 섞을 수 있는 것도, 그리고 대등하게 맞서 제대로 승패를 겨룰 수 있는 것도 오직 네 녀석뿐이다! 아아!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거의 집착에 가까운 목소리. 아니, 태무환은 분명 유태진과의 승부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유태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 가지만 묻지. 어째서 날 기다린 거냐? 분명 네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너와 인베이더들은 지금쯤 목적을 이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왜지?”
사실 유태진 입장에서는 인베이더 함대의 손실을 감수해가며 방관한 태무환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착을 짓고 싶은 건 마찬가지지만 그와 같이 집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게 궁금했었군. 뭐,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만큼은 너와 제대로 결착을 짓고 싶어서다.]
“뭐?”
[중원무림 시절 너와 내가 제대로 내지 못했던 마지막 승부를 잊지 않았겠지?]
“물론이지. 그걸 어떻게 잊을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잊을 수 없었지. 그리고 그때만큼 내 인생 중에 후회되는 결말도 없었고.]
당시 유태진과 태무환은 양패구상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함께 죽음을 맞이했었다. 결과만 보면 무승부나 다름없었지만, 싸움의 내용을 보면 사실 그렇지 않았다.
사실 그때의 싸움에서 승기는 유태진이 잡고 있었다. 그리고 태무환은 점점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결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드는 순간, 위기감을 느낀 태무환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마성을 폭발시켰고, 그 결과··· 어느 누구도 승자도 패자도 되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다시 되살아나 자신이 그룬베일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결말은 결코 다시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네놈과 확실히 승패를 가늠할 거다. 어떠한 후회도 남기지 않고 분명하게. 그러니 네 녀석도 피할 생각은 마라.]
“···그런 거였나.”
유태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태무환이 저런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물론 그도 그때의 싸움에서 양패구상 했던 것에 대해 미련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저 작자는 당시 마성을 폭발시켜서 기울었던 승패를 뒤집었던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겠지.’
태무환은 극히 패도적이고 강자지존의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겁하거나 졸렬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패한 거나 다름없는 싸움에서 본의 아니게 마성을 폭발시켜 동귀어진 했던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게 틀림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그때의 미련을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다는 건 좀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과의 승부에 집착하는 태무환을 외면할 수 없었다.
“뭐, 좋다. 그렇다면 네 녀석이 건 싸움 받아주지! 어떤 후회나 미련을 남기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하하하! 바라던 바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무환의 전신에서 어둠이 뭉클대며 뿜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어디까지나 탐색전이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싸움인 것이다.
그건 유태진도 마찬가지. 이제야 전력을 드러내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내 모든 걸 사용하겠다. 무공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걸! 진심으로 상대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