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
17권-38화
무생의 군세는 개체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마이스터 급에 버금가는데다, 그 수는 무려 1억에 이르렀다. 이 정도 숫자면 제아무리 여기 모인 반신 급과 그랜드 급 강자들이 다수라 해도 벅찰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무생의 군세뿐이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물량공세를 앞세워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하는 세 명의 신좌가 문제였다.
베네트 국장도 안색을 굳혔다.
‘이래선 승산이 없겠군.’
제아무리 이들이 에메랄드 헤븐의 지원을 받고 있다지만 이건 도저히 반신 급으로 격하된 상태로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일단 필멸자 입장에서 감당하기 힘든 권능 쪽은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와 징벌자의 저울로 최대한 억누르고 있지만, 문제는 다루는 힘의 규모.
이 정도면 권능을 제외한 하급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면 이쪽이 먼저 지쳐. 놈들은 에메랄드 헤븐으로부터 무한정에 가까운 힘을 공급받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 이 상황 자체를 뒤엎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이 전황을 좀 정리해야겠군.”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궤적이 활짝 펼쳐지면서 무수한 선들을 낳았다. 그것들은 일제히 뻗어나가 닿는 모든 것을 난자해 버렸다.
절현광 난무(亂舞)!
다가오던 무생의 군세 일각이 베네트 국장의 한 수에 허물어졌다. 제아무리 불사나 다름없는 무생의 군세라 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카룬다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정말 성가신 능력이군.]
절현광 또는 절현금이라 불리는 베네트 국장의 성명기술은 그저 대상을 베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이에 베인 상대에게 특정 금제나 제약을 가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베네트 국장에 의해 쓰러진 무생의 병사들은 불사나 다름없는 복원능력에 제약을 받아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카룬다임이 힘을 쓰면 쓰러진 병력을 새로 채워 넣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때까지 약간의 공백이 발생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베네트 국장이 지금 노린 것도 바로 그 짧은 공백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가 돌연 크게 외쳤다.
“나 베네트 국장의 이름으로 명한다. 지금 즉시 페이즈 2에 돌입한다.”
[뭐?]
갑작스런 그 말에 모르스가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한창 궁지에 몰린 줄 알았더니, 뭔가 다른 패를 감춰두고 있었다는 건가?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의 머리 위쪽에 해당하는 우주 공간으로부터 거대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행성이었다. 인베이더 함대가 위상차원 속에 감쳐온 에메랄드 헤븐과 맞먹는 크기의 초록빛 행성.
그리고 그 행성으로부터 청아한 음성이 공화국과 연합 함대를 향해 울려 퍼졌다.
[에메랄드 오딧세이. 지금부터 행성에너지 공유 시작합니다.]
그 순간, 말 그대로 전황이 격변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에너지가 공화국과 연합 함대, 그리고 오버러들에게 전달되면서 전력이 급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우리가 인지 못한 정보라고?]
난데없는 에메랄드 헤븐의 출현에 신좌들이 당황하다 못해 경악을 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초월자로서 만상의 정보를 담고 있는 아카식 레코드를 열람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완전한 전지는 아니더라도 필멸자들에 한해서라면 거의 그에 준하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거늘, 지금 이 상황만큼은 전혀 읽지 못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베네트 국장은 만사를 철두철미하게 대비하는 부류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늘 최악의 상황들을 가정하고, 그에 맞춰 자신이 가진 패를 나눠서 대응할 수 있도록 작전을 세웠다.
그건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그룬베일의 화신인 태무환 이외의 다른 신좌들의 개입 가능을 점쳤고, 이를 위해 두 가지 패를 숨겨두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제이나에게 장악된 에메랄드 헤븐이었다.
리클의 도움으로 위상차원에 숨겨두었고, 다른 초월자들이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정보를 읽어내지 못하도록 새벽의 여신 윌키아의 도움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니 신좌들이 눈치 채지 못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웃기는군! 고작 에메랄드 헤븐 하나로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모스르가가 코웃음 치며 곧바로 공격을 준비했다.
에메랄드 헤븐이 꽤 대단한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건 아니다. 하물며 이쪽이 보유한 에메랄드 헤븐은 다섯이 아니던가. 라인트라에서 강탈해 간 에메랄드 헤븐 하나로는 절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우우우우웅!
막대한 영력이 집중되었다. 모르스가가 들어 올린 석장 위로 형성되는 것은 강력한 저주의 집합체였다.
어지간한 소행성 규모의 보랏빛 구체, 데스티니 엔드.
악령과 저주의 힘을 온전히 파괴의 힘으로 전환하여 대상을 멸절시키는 최고위 흑마법 중 하나였다.
[그래도 있으면 성가신 건 사실이니 그 전에 통째로 날려주마.]
제아무리 불완전한 강림에 징벌자의 저울로 격이 하락되었다고는 해도, 에메랄드 헤븐 다섯 기의 지원을 받고 있는 지금이라면 행성을 부숴버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시도하기도 전에 불발되고 말았다. 갑자기 다섯 기의 에메랄드 헤븐으로부터 공급되던 에너지 라인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데스티니 엔드의 보랏빛 구체가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모르스가도 일순 당황한 안색이 되었다.
[뭐, 뭐지? 에너지 공급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두 신좌들은 물론 인베이더 함대에 공급되던 에너지도 마찬가지로 불안정해졌다.
베네트 국장이 조소를 베물었다.
“초월자라 해도 멍청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
[뭣이? 이 건방진 것이?]
“아직도 모르겠나? 네놈들이 변질시켜 사용하고 있는 세계수의 근본이 뭐라 생각하는 거냐?”
그제야 뭔가를 눈치 챈 모르스가가 이를 갈아붙였다.
[이런 젠장! 하이 엘프의 혈통이라고!?]
[격세유전의 돌연변이라니! 이건 오히려 어지간한 하이 엘프들보다 혈통이 더 진한 경우잖아!]
[전부 잡아 죽인 줄 알았는데 살아남은 개체가 있었다니!]
신좌들도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에메랄드 헤븐을 통제하고 있는 주체인 제이나의 존재를 비로소 알아챈 모양이었다.
[일이 꼬이긴 했지만 어쨌든 상관없다! 라인이 불안정해졌다 해도 그 전에 저 에메랄드 헤븐을 정리하면 끝날 일이지.]
다시 한 번 데스티니 엔드를 구현하는 모르스가. 물론 좀 전과 달리 여유는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에메랄드 헤븐을 통째로 날려버리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그걸 보면서도 베네트 국장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뭐라?]
“당신이 본신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또 모르지. 하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나의 에메랄드 헤븐, 아니 에메랄드 오딧세이 옆으로 거대한 함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나단이 건조하고 현재 리스티가 물려받은 초월신함 아마페레오스였다. 지금까지 참전하지 않고 모습을 감췄던 아마페레오스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놀라운 힘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천체창조!]
* * *
“···역시 쉽지 않네요.”
에메랄드 오딧세이를 관할하던 제이나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최근 대부분의 기억을 되찾으면서 그랜드 급을 넘어 반신의 영역까지 넘보는 수준에 다다른 제이나는 변질된 세계수조차 자신의 제어 하에 두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알아챈 베네트 국장은 그녀를 이번 전쟁에서 비장의 패로 삼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에메랄드 오딧세이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제이나의 지배력이 인베이더 소속의 에메랄드 헤븐의 제어권을 강제로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에너지 공급 라인을 완전히 끊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에메랄드 오딧세이라는 코드네임을 얻은 자신의 행성과 동조함으로서 얻은 막대한 지배력으로 이를 방해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에메랄드 오딧세이의 옆에는 최강의 전력이 갖춰져 있었다.
초월신함 아마페레오스. 지금까지 조나단의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아온 리스티가 함장 석에 앉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었다.
현재 인베이더 함대는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에메랄드 헤븐 다섯 기로부터 흘러들어오던 막대한 에너지가 불안정해지면서 유리하던 전세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두고 보기만 할 생각은 없었는지, 신좌들 쪽에서도 반응이 잡혔다.
[막대한 음차원 에너지 응집 포착했습니다. 신좌 모르스가의 흑마법 데스티니 엔드. 예측되는 위력은 6400만 테라클론입니다.]
“아예 우리를 통째로 날려버리겠다는 건데,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있을 순 없지.”
통제 인공지능인 알렉시안의 보고에 리스티는 차가운 조소를 머금고는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그럼 우리도 시작하자.”
그때부터 막대한 힘이 함체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초월의 격에 어울리는 신화적인 영역의 힘이 그녀가 바라는 대로 특정한 형태로 빚어지고 있었다.
사실 리스티의 역량은 아리엔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이긴 했어도, 전투 방면보다는 연구 쪽에 치우쳐 있었으니까.
그래서 기껏 해봐야 마이스터 급에 턱걸이 하고 있었을 뿐, 딱히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진 않았다. 연구만 우선한다면 지금 현재만으로도 딱히 아쉽지 않아서였다.
그렇지만 조나단의 죽음으로 상황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애당초 그녀의 경지가 정체되어 있던 건 깨달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당장 복수를 위해선 힘이 필요했으며, 또한 조나단이 물려준 유산인 아마페레오스를 다루기 위해선 그녀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알렉시안의 도움으로 아마페레오스를 운용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한편, 자신의 경지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불과 몇 주 만에 목표했던 그랜드 급에 올라섰다. 그녀의 아버지인 가이란 프론사이드와 완전히 대등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아마페레오스와 동조된 상태로 초월의 영역에 들어선 리스티가 우주 한편을 노려보며 낭랑히 외쳤다.
“천체창조!”
화아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태양이 우주공간에 출현하였다. 그것은 강렬한 열기로 모든 것을 태우고 있었다.
물론 인베이더 함대도 거기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콰아아앙! 콰앙! 쿠구구궁!
단순히 간접 열기뿐이라면 인베이더의 전함들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메페레오스가 창조한 태양은 하필이면 인베이더 함대의 한복판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막대한 질량과 열기를 직접 맞부딪친 이상 제아무리 배리어가 견고하다 해도 오래 버틸 순 없었다.
[이 무슨? 한순간에 함대 전력의 1/10이 날아가?]
[이놈! 이걸 노리고 있었구나!]
신좌들도 눈앞에 펼쳐진 결과에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설마 에메랄드 오딧세이뿐만 아니라, 이런 패까지 준비하고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놀랄지언정 패닉에 빠져 이성을 잃진 않았다. 지금까지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지내오면서 온갖 수라장들을 경험해 온 만큼, 그들의 냉정함 또한 필멸자와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신좌들은 서둘러 아마페레오스와 에메랄드 오딧세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선 승산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