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
17권-37화
* * *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인베이더들에게 전술적으로 허를 찔린 공화국과 연합 함대는 재정비를 위해 물러나는 상태였고, 후퇴하는 아군의 후방을 지키기 위해 베네트 국장을 비롯한 그랜드 급 강자들이 나섰다.
그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던 리겔은 조용히 분노를 삼켰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처음 시작은 크리스첸 가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원수들은 가문 내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전부 죽어버렸고, 그가 품은 복수심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크리스첸 가문을 장악한 이들은 그의 원수가 아니었다. 그들 또한 직계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 받던 부류였으니까.
그렇다면 이 원한과 분노를 어디에 풀어야 한단 말인가.
리겔은 자신이 품은 원한의 근원에 대해 차근차근 짚어보기 시작했고, 이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애당초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타인의 것에 탐욕을 부리는 세상이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이 우주에 창조된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지성체들은 너무도 불완전했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언제나 싸우고 헐뜯고 미워했으며, 탐욕을 부리며 타인의 것을 빼앗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가족들이었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누군가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이런 세상은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나아.’
그리고 원한에 불타서 증오를 키워가고 있는 자신마저도 전부 사라졌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제아무리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부조리함을 미워한다 해도, 이를 뜯어고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건 설령 상위의 초월자들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오갈 데 없는 분노와 원념을 어디다 풀어야 하나? 그렇다고 세상을 부순다고 혼자 날뛰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다.
결국 리겔은 지성체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인베이더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의 구체적인 목적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인베이더는 모든 지성체들의 천적이고 공적이었으며,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은밀히 인베이더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이 썩어빠지고 불완전한 세상을 없애려면 저들에게 협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인베이더들이 맘에 드는 건 아니었다. 놈들은 과격했고 난폭했으며, 무작정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세상을, 아니 이 우주의 지성체들을 지울 의지를 가진 세력은 오직 이들 뿐이었다. 이들이 아니고선 결코 불가능했다.
물론 인베이더 놈들이 갖는 불신에 대한 문제도 적지 않았다. 리겔은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영입된 존재였다. 심지어 포섭된 것도 아니고 스스로 제 발로 찾아온 인사를 쉽게 믿고 신뢰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던 중 리겔은 우연찮게 신을 영접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베이더들이 떠받드는 신적 존재. 그런 신좌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 알려진 어둠의 신좌 그룬베일이었다.
물론 외부에서 영입된 하찮은 필멸자 따윈 감히 신좌와 영접할 기회조차 없는 게 당연했지만, 그룬베일 쪽에서 먼저 리겔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는 말 그대로 신적 존재였고, 리겔이 심중에 품고 있는 분노와 원념을 고스란히 읽어냈던 것이다.
[너의 존재는 참으로 흥미롭구나, 필멸자야. 살아 있는 지성체이면서 멸망을 바란다니. 너와 같은 뜻을 품은 자가 아주 없던 건 아니지만, 진심으로 우리 휘하에 가담한 건 네가 처음이로군.]
우주가 탄생한 이후 세상의 부조리함에 분노를 품고 원념을 불태워간 자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자들 중 정말로 세상의 멸망을 위해 인베이더에 몸담기까지 한 경우는 그룬베일로서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제안을 했다.
[좋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일하라. 네가 바라는 그 원념과 갈망, 내가 이뤄주지.]
최상급 신격인 그가 일개 필멸자에게 이렇듯 직접 제안한다는 건 가히 파격적이었지만, 그만큼 리겔의 존재는 유용했다.
그가 가진 크리스첸 가문의 고유능력은 물론, 그가 가진 자질과 잠재능력까지··· 지구에서의 실패로 거의 활동 자체가 불가능한 그룬베일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은 장기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리겔에게 직접 접촉하는 수단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그에게 인베이더라는 세력을 일구고 세상을 멸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목적을 털어놓았다.
‘그렇군.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불완전한 세상을 구축하고, 새로운 창세를 열겠다니! 이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나 다름없지 않은가.’
리겔은 그룬베일이 밝힌 사상과 목적에 깊게 공감했다. 그리고 그의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세상의 멸망과 재창조가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그룬베일이 추진하는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리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계획이 이젠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유니버셜 테라 코어만 장악한다면 이 우주의 모든 문명은 멸망의 기로로 접어들 것이고, 이곳을 중심으로 우주는 새롭게 재탄생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난관은 다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룬베일의 화신인 태무환은 거의 방관하는 상태로 멈춰서 있고, 이를 보다 못한 신좌들이 자신의 사도들의 몸을 빌려 강림했지만, 그들마저 베네트 국장을 비롯한 그랜드 급 강자들의 저지에 가로막혔다.
이대로라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놔둘 성 싶으냐?”
수십 년 동안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자신의 생명은 물론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이 계획이 파탄 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게다가···.
“마침 때가 됐군.”
신좌들이 보낸 신호가 포착되었다.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를 대비한 신호였다.
리겔은 자신의 품속에서 다량의 디멘션 쿼츠를 꺼내들었다. 이것들은 그가 보유한 마지막 수량이기도 했다.
대규모 인베이더 함대를 무인행성 QX-NA01로 불러들이면서 대부분의 디멘션 쿼츠를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우우우우웅!
우주공간에 떠오른 디멘션 쿼츠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리겔의 능력과 연동하면서 더욱 큰 폭으로 증폭되었고, 곧 거대한 일그러짐을 낳았다.
끄그그그긋!
시공간이 일그러지고 그 너머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거대한 질량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표면이 온통 녹색으로 가득 찬 행성이었다.
그 이름은 에메랄드 헤븐. 변질된 세계수로 뒤덮어버린, 인베이더들이 개발한 행성병기였다.
“크흡!”
위상차원 너머에 숨겨져 있던 에메랄드 헤븐을 현실공간으로 끌어오던 리겔이 돌연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베이더들이 위상차원에 감춰둔 에메랄드 헤븐은 모두 다섯. 그것도 심지어 목성 규모의 행성들이었다.
리겔의 본신 역량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온몸이 부서지고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개의치 않았고, 전신에 흐르는 영력이 폭주해 역류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그는 이를 악물며 버텨냈다.
애당초 자신의 목숨 따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이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마지막 최후의 힘까지 쥐어짜낸 그가 원념에 찬 목소리로 고했다.
“우주여! 너를 향한 나의 증오를 받아라!”
드디어 에메랄드 헤븐들이 현실의 우주공간으로 그 실체를 오롯이 드러냈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다섯 행성이 출현한 순간, 인베이더 함대를 비롯한 모든 개체들의 전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에메랄드 헤븐의 기능 중 하나인 행성에너지 공유였다.
“쿨럭! 큽··· 크크크 크하하하하! 그래, 모두 멸망해버려라! 하나도 남김없이!”
리겔은 격렬히 피를 토하면서도 참을 수 없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무려 다섯 기의 에메랄드 헤븐을 등에 업게 된 인베이더 함대와 신좌들의 힘은 항거할 수 없는 재앙 그 자체.
이제 더 이상 예정된 멸망을 막을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 * *
에메랄드 헤븐이 위상차원으로부터 넘어온 순간부터 전세는 완전히 인베이더 측으로 기울었다. 안 그래도 태양계를 방어하기 위해 수세에 집중하던 공화국과 연합 함대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특히 인베이더 함대의 선봉장이 된 세 신좌의 힘은 막강했다.
베네트 국장의 고유스킬인 [징벌자의 저울]에 의해 여전히 반신 급 수준으로 제약되고 있었지만, 에메랄드 헤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막대한 힘은 그들을 하급신에 거의 준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콰아아앙! 쿠구구구!
모르스가가 일으킨 막대한 저주와 흑마법이 우주를 오염시키고, 오르쿤의 막강한 괴력이 광범위한 파괴를 일으켰으며, 카룬다임의 무생의 군단은 죽지 않고 계속 복원되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삼면초가의 상황. 워낙 전세가 위태롭다 보니 결국 예비전력으로 대기 중이었던 드래곤들과 다른 반신들까지 나서게 되었지만 크게 나아진 건 없었다.
[이런 괴물 같은 놈들!]
[믿기지가 않는군.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에 의해 억제된 게 이 정도라고?]
다들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래곤들의 권능억제진인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는 이미 전개 중이었지만, 세 신좌의 역량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시간을 옥죄어라!]
드높게 울려 퍼지는 모르스가의 영언! 그것이 이 일대의 시간을 구속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드래곤들도 만만찮았다.
[우린 구속을 거절한다.]
권능을 억제하는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에 기반한 드래곤들의 용언은 모르스가의 영언의 힘을 그대로 분쇄하였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시간구속은 어디까지나 수 싸움 중 하나일 뿐이다. 드래곤들의 용언이 시간구속을 방어하는 데에 집중된 사이, 오르쿤의 무자비한 폭력과 카룬다임의 군세가 밀려든 것이다.
[하하하! 자, 어디 받아봐라!]
오르쿤이 주먹을 내뻗는 순간, 무시무시할 만큼 대규모 공간의 일그러짐이 발생했다. 그것은 마치 준대형 전함의 중력포 수십 발이 동시에 펼쳐진 것 이상의 위력이었다.
“끊어져라!”
베네트 국장의 성명기인 절현금이 또 한 번 재현되었다. 모든 것을 절단하고 끊는다는 이 기술은 정확히 오르쿤의 권격에 의해 발생한 공간의 일그러짐의 인과를 절단해 소실시켜버렸다.
이젠 그도 봉인을 풀고 하급신에 준하는 반신의 위에 다다른 만큼 절현금의 공능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에 올라선 것이다.
그렇지만 오르쿤의 공격을 방어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그 뒤엔 카룬다임의 군세가 도사리고 있었다.
쿠오오오!
우우우!
무생의 군단. 고렘을 비롯해서 각종 무생명체로 이루어진 다양한 종류의 병력이 밀려들었다.
고렘이라고 해서 그 옛적 흙이나 돌 따위로 구축된 원시적인 고렘이 아니었다. 각종 금속과 합리적인 구동 골격을 갖춘 기계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기존의 고렘들과 비교해 월등히 강력했으며, 심지어 함선처럼 포격이나 이능을 발휘하는 타입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와 같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놈들에겐 드래곤만큼 적합한 상대도 없었다.
[다 불살라주마, 트리플 헬파이어!]
[레이즈 오브 더 헤븐(Rage Of The Heaven)!]
[익스플로시브 클라우드(Explosive Cloud)!]
9클래스에 준하는 위력의 마법들이 그야말로 폭격처럼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드래곤 하트라는 막대한 영자기관을 보유한데다, 언령에 버금가는 공능을 가진 용언을 발휘할 수 있는 드래곤들은 대규모 전투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금 그들이 내보이고 있는 화력은 어지간한 대규모 함대마저 크게 웃돌았다.
그렇지만 카룬다임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가 만든 군세는 드래곤들의 마법에 견디지 못했지만, 그건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녹든 부서지든 얼마든지 다시 복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시간을 거꾸로 되감듯 다시 본래 모습을 되찾아가는 무생의 군단의 모습에 드래곤들조차 진저리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지긋지긋한 것들!]
[정말 끝이 안 보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