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
17권-36화
죽음을 입에 담는 그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바로 대상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언령 그 자체였다.
실체를 갖지 않는 무시무시한 죽음이 아리엔들을 향해 다가섰지만, 그때 보이지 않는 것을 절단하는 첨예한 힘이 그것을 끊어내었다.
바로 베네트 국장의 특기인 절현금이었다.
그 결과, 죽음의 절대명령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 잔재만으로는 이 자리에 있는 그랜드 급의 강자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이를 확인한 오르쿤이 픽 웃으며 말했다.
[하, 진짜 저 벌레들 중에서 죽은 녀석이 없군. 모르스가 네 녀석도 이젠 다 된 거냐?]
[시끄럽다. 네놈이라고 다를 것 같나?]
그렇게 한 차례 쏘아붙인 모르스가의 시선이 베네트 국장을 향했다.
[그건 그렇고 역시 베네트로군. 그 찰나지간에 내 권능언령을 끊어 내다니. 그 솜씨는 여전히 변함없었나 보지?]
그렇게 말하는 모르스가의 표정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아르탈 행성 연합의 3대 중추기관 중 하나인 이능관리국 국장 베네트. 그의 존재는 신좌들이라 해도 결코 경시할만한 게 아니었다.
그가 가진 고유스킬인 [징벌자의 저울]도 그랬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지금까지 보여준 역량 자체가 그만큼 대단했다는 뜻이다.
그가 그냥 평범한 그랜드 급 강자였을 뿐이라면, 신좌들이 이렇게까지 그를 인상 깊게 기억할 이유가 없었다.
베네트 국장이 빈정대듯 대꾸했다.
“일부러 몸소 강림까지 해주신 신좌들께선 생각보다 상태가 별로인 듯 하군. 역시 제대로 된 강림이 아니었나보지? 하긴 제아무리 신좌라 해도 막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제 힘을 발휘하는 건 어려울 테지.”
[벌써 알아챈 거냐?]
“대단할 것도 없지. 방금 전 권능언령이 제대로 된 거였다면 나라도 막기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당신들이라면 나라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군.”
[역시 눈썰미 하난 날카롭구나.]
그 말대로였다. 현재 신좌들은 데이모스를 비롯한 반신들의 몸에 강림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제대로 된 강림을 하기엔 간섭력도 부족한데다, 현재 루클라나 데이모스들이 아리엔들의 공격에 꽤 깊은 데미지를 입은 탓도 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르스가는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되물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느냐?]
“······.”
베네트 국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말처럼 확실히 이 싸움에서의 승산은 극히 적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들은 루클라 같은 반쪽짜리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진정한 초월자들이었다. 제아무리 불완전한 강림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격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현재 아군 함대는 후방으로 이동해 재정비에 들어간 상황. 여기서 신좌들이 마음껏 활보하게 놔둔다면, 기껏 후방으로 빼서 정비에 들어간 아군 함대가 혼란에 빠질 것은 자명해 보였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군. 여기서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베네트 국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결심을 굳혔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확실히 당신들 같은 초월자를 상대로 승산은 별로 많지 않은 건 사실이지. 하지만 가진 모든 걸 쥐어짜면 대적하지 못할 것도 아니야.”
[호오, 그 말은 결심을 굳혔다는 건가.]
“······.”
베네트 국장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거침없이 뜯어냈다. 그리곤 목걸이의 액세서리처럼 달려 있던 작은 큐브를 손에 쥐었다.
“봉인을 해제한다.”
그 말과 동시에 그가 쥔 큐브에서 균열이 발생하더니 푸른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곧 큐브를 박살내며 완전히 해방되었다.
화아아아악!
“이 압력은!?”
레이첸이 깜짝 놀란 얼굴로 빛을 주시했다. 눈부실 정도로 넘실거리는 푸른빛은 베네트 국장을 중심으로 파동 형태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 일대를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존재감. 그것은 반신 급 이상에게서나 볼 법한 강대한 영압 현상이었다.
“뭐야, 이거?”
“베네트 국장이 반신 급 초월자였다고?”
연정운과 레이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뱉었다. 그동안 그들이 알던 베네트 국장의 실력은 그랜드 급이라는 게 전부였다.
물론 [징벌자의 저울]같은 놀라운 고유스킬 때문에 평가가 높은 편이긴 했지만 그에 대한 대체적인 인식은 그랜드 급의 틀을 넘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런 차원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것도 거의 하급신에 준하는 수준이야. 어떻게 국장님이 이런 힘을···.”
유태진의 존재감을 상시로 접해왔던 아리엔은 베네트 국장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대체 그동안 어떻게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는지 불가해할 정도였다.
모르스가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본 모습을 되찾았군, 베네트. 물질계에 머무는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신성과 격을 봉인해두었던 건가.]
“···역시 알고 있었나.”
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되묻는 베네트 국장의 그 말에, 모르스가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너 정도 되는 자가 고작 그랜드 급에서 수백 년 동안 머물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지금까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었는데, 역시 초월자는 초월자라 이건가.”
베네트 국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실을 완전히 꿰뚫어본 자는 오직 루네리아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고 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태껏 본신역량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그룬베일의 화신을 상대하기 위해 아껴뒀던 것 같던데··· 그 정도로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우릴 너무 우습게 본 거다.]
그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모르스가를 비롯한 신좌들에게서 한층 더 강대한 영압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강림한 육체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들의 역량은 여기에 있는 모두를 가볍게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베네트 국장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우습게 본 건 아니다. 단지 어떤 게 우선순위인지를 판단했을 뿐이지. 게다가···.”
그가 잠시 말을 멈춘 순간, 기이한 힘이 세 신좌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의 영성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쪽이야 말로 우릴 우습게 본 건 아닌가? 내가 오랜 시간 봉인해둔 이 힘을 사용한 이상 적어도 당신들에게 패하진 않아.”
[···징벌자의 저울. 역시 더 강력해졌군.]
모르스가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베네트 국장을 노려보았다. 초월에 이른 신좌들이 베네트 국장의 존재를 꽤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고유스킬 때문이었다.
상대의 이능을 제약하고, 혹은 경지를 하락시키며, 경우에 따라선 특질능력을 완전히 봉인하기까지 하는 강력한 억지력.
심지어 경지가 높아질수록 능력의 제약 폭도 커져왔기 때문에 신좌들조차도 그의 존재를 경계해 왔던 것이다.
[확실히 성가시긴 해.]
[허 참. 우리가 고작 반신 단계로 격하되다니··· 이건 정말 너무 사기적인 능력이야.]
오르쿤과 카룬다임은 기가 막힌다는 듯 내뱉었다. 봉인된 힘을 개방한 베네트 국장이 징벌자의 저울을 전개하자마자 자신들이 발휘할 수 있는 기본 역량이 반신 급으로 대폭 하락했음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상태로 싸워도 베네트 국장을 비롯한 그랜드 급 강자들에게 결코 지진 않겠지만, 고작 이걸로 끝난다면 기껏 수고스럽게 강림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이걸로 승산이 있는 거야?”
레이첸이 마른 침을 삼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신좌들의 존재감이 크게 꺾인 것이 피부로 와 닿을 정도로 느껴져서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연정운은 이런 결과를 만든 장본인의 등 뒤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베네트 국장. 얕볼 위인이 아니야. 하긴 이러니 이능관리국 국장 자리를 수백 년 간 지켜 왔겠지.’
그랜드 급에 다다랐을 때만 하더라도 그와 거의 동등한 경지에 올라섰다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모든 게 착각임이 드러났다. 그는 무려 반신 급에 도달한 강자였고, 지금까지 그 힘을 남몰래 봉인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대략 짐작이 갔다.
‘하긴 반신 급 이상의 초월자들은 물질계에서 활동하는 데에 시간적 제한이 생기지. 그는 자신의 신성을 봉인함으로서 활동시간을 대폭 늘리려 한 건가?’
물론 힘을 감춰온 이유는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처럼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비장의 한수로 사용하기 위함이었겠지.
그렇지만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징벌자의 저울에 의해 상당한 패널티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신좌들의 얼굴에 서린 여유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 말은 놈들에게도 승리를 확신할만한 승산이나 패가 있다는 의미다.
“다들 긴장하고 조심해! 저 신좌들, 패널티를 받고 있는 상태가 전부가 아닌 것 같아. 뭔가를 숨기고 있어.”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사토 류지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지만, 연정운이 그에 대답하기도 전에 모르스가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호오, 제법 눈치가 있는 놈이로군. 그래 맞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준비를 했지.]
그러자 다들 긴장감에 휩싸였다. 안 그래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신좌들이 심지어 이런 상황에 대비해 준비까지 했다고 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네트의 그 능력은 우리에게도 경계의 대상. 그냥 무작정 강림하기엔 위험부담이 크지. 그런 의미에서 준비했다.]
모르스가가 시선을 옮겼다. 그곳은 다름 아닌 인베이더 함대의 후방이었다.
[리겔, 이제 때가 되었다. 준비한 것을 해방하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이 이지러지는 파장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규모를 늘려가더니 급기야 거대한 공간왜곡 현상을 만들어냈다.
끄그그그긋!
“저··· 저건!?”
“이런 미친! 에메랄드 헤븐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다들 놀라 소리쳤다. 인베이더 함대의 후방에서 발생한 공간왜곡 현상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거대 질량체는 다름 아닌 에메랄드 헤븐이었다.
변질된 세계수들로 뒤덮인 무인 행성병기 에메랄드 헤븐.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그 위험성을 익히 경험해 본 바 있었다.
“···그렇군. 지금까지 위상차원 너머에 숨겨두고 있었던 건가.”
베네트 국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에메랄드 헤븐이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바로 꿰뚫어보았다. 제아무리 큰 질량체라 하더라도 위상이 다른 차원 속에 숨겨두고 있었다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저들이 꺼내든 비장의 패인 에메랄드 헤븐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려 다섯 개에 달하는 초록빛 행성들.
거기서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는 상상을 불허했다.
“세상에··· 다섯 기의 에메랄드 헤븐이라니···!”
아리엔도 질린 표정이 되었다. 라인트라에서 고작 두 기의 에메랄드 헤븐만으로도 그토록 고전했었는데, 다섯 기라면 얼마나 더 막대한 규모의 힘을 저들에게 공급해줄지 예측이 되질 않아서였다.
모르스가가 차가운 조소를 머금은 채 선언했다.
[자, 그럼 시작하지. 지금부터 네놈들을 시작으로 모든 걸 깔끔하게 지워주마.]
거대한 다섯 행성을 등진 신좌들의 존재감이 이전보다 더욱 커다랗게 부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