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
17권-35화
한계를 넘어설 만큼 극도로 응집된 강기에 9위계에 준하는 마법까지 더해진 이 일격은 위력만큼은 필시 초월의 영역에 이르렀다.
쿠오오오!
무시무시한 기세로 내리그어지는 칠흑빛 뇌전의 일검! 여기에는 카르발타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이게 저 자가 가진 전심전력!’
아리엔도 각오를 다졌다.
지금까지는 거의 대등하게 싸운 듯 보이겠지만, 사실 그녀의 상태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만상개화 의검천추는 그녀의 깨달음을 한 차원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려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준비되지 않은 육신까지 변화시켜주는 건 아니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생사경의 경지를 억지로 체현한 덕분인지 육신 이곳저곳이 삐걱대는 것이 느껴지고 있는 상태.
그나마 유태진에게 배운 외공의 극치인 철환극강기를 체득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몸이 붕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특히 저런 가공할 공격과 정면으로 맞부딪친다면 싸움에서 이기는 건 둘째 치고 자멸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검 끝에서 일렁이기 시작한 검풍이 더욱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허공에 이지러짐을 낳을 만큼 맹렬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급풍쾌검(急風快劍) 1식. 풍령추인섬(風靈追認閃)
비의. 질공무흔(疾空無痕)
잦아드는 바람과 함께 아리엔의 신형 또한 흐려져 갔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 자리에서 소실되는 것 같았다.
[어디서 허튼 짓을! 피하거나 도망친다고 해서 내 공격에서 벗어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카르발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진 아리엔을 더 이상 인지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당황하거나 하진 않았다.
애당초 인과성립으로 자신의 공격을 회피할 때부터 이 정도는 예상했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회피하던 벗어날 수 없는 광범위 공격으로 쓸어버리면 될 일이다.
콰르르릉! 콰콰콰쾅!
무시무시한 칠흑빛 벼락이 검격을 따라 번져나가며 이 일대를 덮치듯 범람했다. 얼마나 강대하던지 주변 주역 전체가 검은 벼락으로 가득 찰 정도였다.
그 반경은 무려 수천 킬로미터. 제아무리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심지어 같은 인베이더들마저 여기에 휩쓸려 소멸하거나 침몰하는 전함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미친! 아군이고 뭐고도 없이 이런 공격을 막 퍼붓는다고?]
인베이더 함대를 상대로 시간을 끌던 로베르트 슈마허는 기가 막힌다는 듯 내뱉으면서 즉시 대응에 나섰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후방으로 물러나던 아군 함대까지 휘말릴 수 있었다.
[AT필드 전개!]
그가 구현한 보랏빛 장갑을 두른 로봇이 손을 펼친 순간, 기이한 파형을 이루는 역장이 크게 확장하면서 전방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AT필드의 방어력이 높은 편이라지만 카르발타의 흑뢰범천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작용한 뒤에 밀려드는 여파 정도라면 충분히 버틸 만 했다.
쿠구구구!
하지만 흑뢰범천이 쓸고 지나간 뒤에도 아리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직경 1만 킬로미터가 넘는 범위를 그 찰나 사이에 벗어났을 리 없을 텐데도 여전히 기척을 인지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렇듯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카르발타가 당혹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반신에 이른 자신의 감각은 분명 이 주역 전체를 감지 하에 두고 있거늘, 아리엔의 존재감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헌데 그 순간, 갑자기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그는 즉각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건지, 아리엔이 검을 치켜든 채 서 있었다.
오오오오오!
그녀의 전신에서 시작된 장대한 힘이 올곧게 피어나 눈부신 빛이 되어 솟구쳤다.
그것은 실로 고고하면서도 장대한 빛의 거검.
이것이야말로 무인들이 추구하는 극고의 무리이자, 베고자 한다면 인과섭리조차 배제한다는 초월의 심상이었다.
“이게 내 전심전력을 담은 한수! 이걸로 끝내겠어!”
아리엔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가눈 채 이를 악물며 외쳤다. 스승이 세계수를 베어냈던 당시를 떠올리며 어떻게든 그 경지를 재현했지만, 불완전한 재현만으로도 자멸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네년이!? 네년 따위가 어떻게!]
위기감을 느낀 카르발타가 발악적으로 영언을 토하며 서둘러 달려들었지만, 그보다는 아리엔의 거검이 먼저 휘둘러졌다.
애당초 의형광검이란 시간의 개념을 초월한 무리. 이미 베고자 마음먹은 이상 결과는 성립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 제 2식. 천룡쇄공조(天龍碎空爪)
비의. 단천일섬(斷天一閃)
수직으로 우주를 가르는 빛의 일검이 카르발타를 베어나갔다. 그것은 너무도 크고 강렬하기 그지없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우주가 그대로 쪼개지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 정도였다.
그리고 그 빛이 사그라진 뒤 아리엔은 거의 탈진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다. 그녀의 경지를 억지로 끌어올렸던 만상개화 의검천추도 이미 해제된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거의 도박에 가까웠다. 검풍으로 가시영역을 굴절시키고 존재감을 지우는 질공무흔으로 모습을 숨기고, 분광착영의 일보섬영을 공간을 압축하는 축지의 영역에 다다른 형태로 전개해 카르발타의 뒤를 선점했으며, 불완전하게나마 의형광검을 재현해 그를 베어내기까지 했다.
아리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운이 좋았어. 조금만 어긋났어도 당하는 건 나였을 거야.’
[크으으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고작 필멸자 따위에게 내가!]
아리엔의 의형광검에 베인 카르발타는 아직 죽지 않았다. 치명상을 입었을지언정 당장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웃기지 마라! 내가 이대로 당할 성 싶으냐?]
확실히 마무리 짓기 위해 아리엔이 다시 검을 들어 올리자 카르발타가 영력을 끌어올린다. 그렇지만 기세는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리엔의 경지가 불완전했기 때문에 겨우 죽지 않았을 뿐, 지금의 타격은 제아무리 원영신의 몸이라 해도 치명적이었다.
물론 아리엔도 그리 정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 죽어가는 상대를 끝장낼 여력은 남아 있는 상태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발악해봐야 무의미하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저도 이런 식으로 끝내는 건 아쉽지만 이걸로 마무리 지어 드리죠. 그럼 이만···.”
우우우웅!
검 위로 짙은 검강이 일어났다. 그녀는 이것으로 카르발타를 확실히 끝장낼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휘두른 검은 카르발타에게 닿지 못했다. 갑자기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막대한 영기가 그녀의 일검을 가로막은 것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아리엔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단천일섬에 베인 카르발타에게 자신의 검강을 막을만한 여력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전신에서 치솟는 저 막대한 힘은 뭐란 말인가?
고오오오!
실로 압도적인 존재감. 그것은 지금까지 카르발타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거대한 격의 실체였다.
[이 무슨!?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흑뢰범천의 여파를 막아주었던 로베르트 슈마허가 경악에 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만큼 지금 카르발타로부터 뿜어지는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허나 그것은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루클라와 데이모스를 밀어붙이던 이들도 그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약자인 마왕 카르테인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 아리엔 못지않은 신위를 발휘한 레이첸은 데이모스를 완전히 쓰러뜨리기 직전에 이르렀지만, 완벽히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돌연 뿜어지기 시작한 거대한 영기와 드높은 격이 그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으··· 설마 이런 치욕을 겪게 될 줄이야. 그분께 감히 얼굴을 못 들겠구나.]
소멸 직전에 이를 때까지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을 내려다본 데이모스가 음울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놈에게서 풍기는 존재감이 더욱 크고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섬뜩하던지 나름 대범하다고 자부하던 레이첸도 일순 놀라 거리를 두고 물러섰을 정도였다.
“뭐지? 다 죽어가던 놈이 갑자기 용을 쓰는 건데?”
“조심해라. 뭔가 심상치가 않아!”
베이노아 수상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데이모스의 존재감이 넓게 퍼져나가 사위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재해나 다름없었다.
쿠구구구!
딱히 의도적으로 힘을 분출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강대한 영압.
이젠 사람을 질식시킬 것만 같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데이모스가 자신의 양 팔을 활짝 펼치며 선언했다.
[자, 이제부터 보아라. 네놈들을 짓밟기 위해 나의 주인께서 강림하신다.]
“뭐라고?”
레이첸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베이노아 수상은 단번에 알아채고는 안색을 굳혔다.
“설마 강림인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이모스의 전신으로 거대한 신격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을 다룬다 하는 아홉 번째 신좌, 죽음의 왕 모르스가였다.
허나 그뿐만이 아니다. 루클라와 카르발타에게도 거대한 신격이 깃들었다. 루클라에게는 그가 섬기는 신좌인 투쟁의 좌 오르쿤이, 그리고 카르발타에게는 무생의 좌 카룬다임이 깃들었다. 본디 카르발타는 죽음의 왕 모르스가를 섬기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카룬다임이 강림할 수 있도록 양보 받은 것이다.
순식간에 세 명의 반신 급 강자가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되었다.
“하, 이런 빌어먹을!”
연정운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난데없이 신좌의 강림이라니! 반신 급이었던 루클라를 상대로도 그토록 애를 먹었던 그들로서는 너무나도 막막할 따름이었다.
다들 바짝 긴장한 상태로 강림한 신좌들을 경계했지만, 정작 신좌들은 그들의 반응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강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짜증을 드러내고 있었다.
루클라의 몸에 강림한 오르쿤이 성가시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결국 강림까지 하게 될 줄이야. 이 얼간이들이 제 역할을 다 못해준 덕분에 불필요한 간섭력만 소모하게 생겼군.]
그러자 이번에는 카룬다임이 그 말을 받았다.
[그래도 그냥 지켜보는 것보단 낫다고 본다. 애당초 그룬베일의 이번 화신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대로 방관했다면 오랜 계획이 걷잡을 수 없이 틀어졌을 거다.]
신좌들이 이렇듯 손해를 감수해가면서 강림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룬베일의 화신인 태무환은 자신들의 애초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놈이 직접 손을 썼다면 이런 미지근한 저항 따윈 금방 짓밟아버리고 지구를 점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강림한 이상 더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모르스가가 좌중을 훑더니 영언을 내뱉었다.
[모탈들아. 너희들의 분전을 치하하마. 꽤나 일을 성가시게 만들더군. 벌레들의 성과 치고는 참으로 대단했다. 그 점은 치하하도록 하지.]
“뭐야?”
자신들을 벌레 취급하는 그 말에 레이첸이 두 눈을 치떴지만, 모르스가의 영언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네놈들의 저항도 여기까지다. 우리는 너희들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그만 조용히 죽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