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
17권-34화
‘그렇다면 좋아. 나도 여기서 승부수를 던지겠어!’
아리엔의 얼굴 위로 결연한 감정이 떠오른 순간, 그녀의 체내로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상중하단이 급격히 부풀어 오르면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막대한 기운.
발현! 천룡무상신공(天龍無上神功)!
용성무진(龍成無盡)!
천룡무상신공의 용성무진은 자신의 그릇을 일순간 크게 확장시키고, 나아가 기운의 지배권을 대폭 신장-증폭시킴으로서 막대한 진기의 흐름을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해주는 비기.
여기에 외부의 기운을 유입시키는 만유합원신기까지 더해짐으로서 그녀는 평소의 수배에 이르는 방대한 기운을 아우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처럼 경지를 넘어선 규모의 힘을 다룬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아니 평범하게 다루는 것 만이라면 별반 문제가 없지만, 좀 전과 같이 섬세하면서도 정밀한 운용을 바라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자신의 역량 이상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룬 유태진이 비정상인 것이다.
그렇지만 아리엔에게는 유태진에게도 없는 비장의 한수가 존재했다.
그녀는 의념을 활짝 열고, 자신만의 고유한 영능을 개방하였다.
특정 현상을 직접 발현하는 이능은 아니지만, 활용하기에 따라선 그 이상으로 강력한 그녀만의 고유능력!
만상개화 의검천추(萬象開化 意劍天墜)
좁은 틀 속에 갇혀있던 의식과 사고가 크게 확장되고,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무리들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좀처럼 넘볼 수 없던 영역의 경지가 자신의 손에 닿을 만큼 다가온 것이다.
물론 이 깨달음은 휘발성을 가진 효과인 만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난밤의 꿈처럼 사라질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득히 먼 미래에나 닿을지 모를 무위를 고스란히 체현할 수 있었다.
쿠구구구!
칠흑빛 영력의 검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유성우를 방불케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아리엔은 물러서지 않았다.
일보섬영의 묘리에 허공답보의 이치를 더한 수법으로 우주공간을 박찬 그녀의 신형이 단숨에 공간을 압축하듯 쏘아진 것이다.
그 순간 카르발타의 영언이 울려 퍼졌다.
[이미 늦었다.]
모든 걸 압도하는 거대한 힘의 실체. 그것이 바로 아리엔의 지척에 닿아 있었다.
크고 거대하다고 해서 느리거나 둔하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빠르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영력의 검들은 정확히 아리엔의 전 방위를 감싸듯 다가오고 있었다.
좀 전이라면 절대 감당하지 못했을 공격. 하지만 지금의 아리엔에게는 힘의 크기와 방향성, 그리고 궤적의 변화들이 정확하게 머릿속에 새겨졌다.
우우우웅!
검 끝에 서린 압축된 강기의 흐름이 부드럽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허나 겉보기에 부드럽다고 해서 실제로 부드러운 건 아니었다.
검로를 따라 부드럽게 소용돌이치는 아홉 줄기 강기의 흐름은 그 무엇보다 격렬했으며, 흉험했다.
이것이 바로 회풍무류사십팔검의 절초 회풍구도(回風九導).
우주공간 위로 형성된 아홉 줄기의 강기폭풍은 날아드는 영력의 검들의 궤도를 엉뚱한 방향으로 비틀어버리기 시작했다.
[이 무슨!?]
카르발타가 당혹스런 반응을 내보였다.
단순히 힘의 규모만 따진다면 영력의 검이 회풍구도보다 훨씬 압도적이었다. 그렇지만 영능으로 승패를 가늠하는 싸움에서 힘의 크기가 전부는 아니었다.
힘의 배분과 효율, 제어 등 다양한 요소가 승패를 좌우하며 특히 아리엔이 구사한 회풍구도에는 유능제강과 이화접목 등의 무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물론 카르발타도 이런 이치들을 아주 모르진 않았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어하고 느림으로 빠름을 제압하는 방식은 굳이 무공이 아니더라도 많이들 사용되는 방식이니까.
하지만 아리엔이 보여주고 있는 한 수는 그런 차원을 아득히 넘어섰다. 콤마 단위보다 더 미세한 차이만 나도 파탄 날 수밖에 없는 그것을 조금도 오차 없이 완벽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여기에 기봉검의 이치까지 더해졌다. 기봉검은 중검을 표방하고 있지만, 좀 더 명확히 구분한다면 무게중심의 변화를 제어하는 검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천운구봉(天運究鳳)은 중검의 경력을 다변화시켜서 상대의 무게중심을 비틀어버리는 공능을 갖고 있었다.
회풍구도의 부드러움에 천운구봉의 묘리가 더해진 한수는 카르발타가 자신 있게 쏟아낸 영력의 검들을 죄다 다른 방향으로 뒤틀어 날려버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날아간 방향이 인베이더 함대 중 일부가 모인 곳이었다.
쾅! 콰아아앙!
방향성을 잃고 날아간 영력의 검들이 인베이더 함대의 진형 일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너무 갑작스런 탓에 미처 피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수백 척에 이르는 전함들이 잇따라 성대한 기세로 터져나가며 침몰하고 말았다. 대부분이 중형 급 전함이었지만, 개중 준대형 전함도 세 척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후퇴하던 연합과 공화국 함대는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졸지에 아군함대에게 피해를 입힌 카르발타가 분개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이!]
놈이 왼손을 치켜드는 순간, 막대한 칠흑빛 전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카르발타는 사실 순수한 무인이라 할 수 없었다. 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데스 나이트.
일반적인 데스 나이트들이 검과 흑마법을 취급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카르발타의 정체성은 마검사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쿠르르릉!
전방을 가득 메울 듯한 칠흑빛 전광의 해일이 밀려들었다.
저주에 의한 성질변화를 거친 전격마법, 흑천재뢰(黑天災雷).
그것은 9클래스 급에 버금가는 위력의 흑마법이었다. 산 자를 저주하는 네거티브 플레인의 힘이 담긴 만큼 닿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어서, 설령 방금 전처럼 막거나 흘린다 하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터.
하지만 대상을 저주하며 불살라야 할 그것은 아리엔의 신형에 닿는 순간 그대로 투과해 지나갔다.
카르발타가 깜짝 놀라 외쳤다.
[뭣!? 허상이라고?]
점차 아른거리며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리엔이 남긴 잔영일 뿐. 그녀의 실체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광영(光影). 진기로 응축된 잔상을 남겨 상대를 속이고 움직인다는 점창의 보법절기 분광착영(分光捉影)의 비기였다.
하지만 그가 놀란 것은 단지 자신의 눈을 속이고 사라졌다는 점이 아니다. 단순히 빠르기만 했다면 인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바로 지척에 나타난 아리엔. 그녀의 검이 카르발타를 노리고 다가들었다.
맹렬한 광풍을 동반한 검세. 그것은 급풍쾌검(急風快劍)의 제 2식인 광풍노격(狂風怒擊)이었다.
본디 진공이나 다름없는 우주에서 바람이 불 리 만무하지만, 본디 진기로 검풍을 일으키는 급풍쾌검에게 있어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는다.
맹렬한 검풍을 동반한 108연환쾌검! 그것은 말 그대로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카르발타를 몰아붙였다.
명색이 반신의 영역에 다다른 만큼 카르발타도 그리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었다. 그는 거의 허를 찔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아리엔의 공격을 전부 받아내었다.
그렇지만 공세를 이어나갈수록 그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그럴 리가 없다, 네년이!?]
흑천재뢰를 잔상만 남기고 피해냈을 때만 해도 설마 했지만, 이렇게 검을 부딪칠수록 점점 확실해졌다.
자신보다 명백히 하위의 경지에 있는 아리엔이 어째서 이렇듯 대등하게 자신에게 대적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점점 버거워지고 있는 것인지를···.
그리고 그건 당사자인 아리엔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구나. 이게 바로···!’
이제야 그 차이를 알 것 같았다.
과정과 결과가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느껴지고 있었다.
아리엔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가 바로 다름 아닌 생사경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경의 경지가 마음이 일면 즉시 행한다 하는 심즉행(心卽行) 기즉심(氣卽心)이라면, 생사경은 그것을 넘어 마음이 일면 그 즉시 결과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미세한 차이 같지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영역이라 할 수 있었다. 마음먹은 즉시 행할 수 있다는 것과, 마음먹은 즉시 그것이 결과로 성립된다는 건 명백히 다른 의미니까.
물론 이 깨달음은 만상개화 의검천추의 유효시간이 다 지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이 사라지겠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때부터 아리엔이 배운 모든 무공의 정수가 그대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삼절검을 시작으로 타루검, 양의검, 백금검, 절편검 등 무수한 검공이 펼쳐졌으며, 검을 쥐지 않은 좌수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권장지공이 전개되었다.
물론 힘의 크기나 빠름은 여전히 카르발타가 압도적이었다. 하나 그것도 상대에게 제대로 적중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리엔은 자신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그의 공격을 받아내고 흘려냈다. 그리고 그렇게 공세를 받아내면서 만든 빈틈을 이용해 상대방의 허를 찔렀다.
[크윽!]
카르발타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말았다.
도무지 눈앞의 결과가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은 분명 반신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런데 고작 그랜드 급에 머물고 있는 필멸자에게 이렇게 이토록 궁지에 몰릴 수 있단 말인가.
제아무리 베네트 국장 때문에 인과성립이 봉인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애당초 다루는 힘의 규모도, 그리고 속도도 분명 자신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데도 도저히 저 계집을 당해내 수가 없었다.
피하고, 흘리고, 비틀어내며 공격을 상쇄하고, 이쪽의 허점을 파고든다. 말로는 쉽지만 그게 과연 쉬울까?
개미가 제아무리 기교가 넘쳐도 공룡을 감당하기 어렵듯, 아리엔과 카르발타 사이에는 그 이상의 격차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적같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내가··· 고작 기술에서 밀린다고?’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천재뢰를 잔상만 남기고 이동했을 때부터 아리엔은 조금씩 믿을 수 없는 조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인과성립. 반신의 위에 도달하고 나서야 간신히 인지할 수 있는 초월의 영역에 조금씩 발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군. 그의 제자가 된지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 영역을 넘본다는 건가?’
한편 카르발타를 상대로 함께 공세를 펼치고 있는 베네트 국장도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아리엔이 보여주고 있는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것이 결코 정상적인 깨달음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챘다.
‘본래 역량보다 더 상위의 경지를 체현하는 고유스킬의 일종인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 정도면 정말로 닿게 될 날도 그리 머지않겠어.’
아직은 여러모로 어설프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인과성립의 힘은 결코 가볍게 폄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궁지에 몰리고 있는 카르발타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니야. 이런 게 아니야! 고작 내가 이 따위에 몰린다고!?]
격앙된 영언을 토해낸 카르발타가 막대한 힘을 쥐어짜내기 시작했다.
쩌저저정!
무시무시한 칠흑빛 전뢰가 그가 쥔 검신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도 거대하고 강렬해서 마치 우주공간 위로 칠흑빛 태양이 떠오른 것 같았다.
흑천재뢰의 힘을 고스란히 검에 담아낸 일격필살의 비기, 흑뢰범천(黑雷犯天).
마법과 검술을 융합한 그만의 마검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