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33화 (434/448)

#433

17권-32화

하지만 놈들도 바보는 아니다. 애당초 전함을 타고 특공을 걸어온 목적이 상대방의 진형을 무너뜨려서 오합지졸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대로 둘 것 같으냐?]

루클라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썼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린 순간, 방대한 영력이 눈부신 은빛을 발하며 압축되었다.

아랑조(餓狼爪)

월령기(月靈氣) 은광명동(銀光鳴動)

멸인광(滅刃光)

그의 손을 따라 허공에 그어지는 거대한 월광의 궤적. 그것은 지시에 따라 뒤로 물러서던 전함들 중 한 척을 순식간에 가르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곤 곧 잘려나간 전함이 성대한 폭음과 함께 침몰하기 시작했다.

[오···오퍼드가 다운!? 단 일격이라니, 이 무슨!?]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악했다. 출력공유 덕분에 배리어의 방어력이 평소보다 배 이상 오른 준대형 전함을 단 일격에 베어버리다니···. 이건 상대가 설령 그랜드 급이라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즉 현재 루클라의 역량이 그랜드 급 이상이란 반증이나 다름없었다.

[어디냐? 이진운인지 유태진인지 뭔지 하는 인간은 어디 있는 거냐? 자, 나와라!]

물러나고 있던 전함들 중 뒤쳐진 것들을 잇달아 침몰시킨 그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말도 안 돼.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잖아?”

아리엔은 예전의 루클라가 아님을 깨달았다. 저만한 규모의 힘을 가볍게 다룰 수 있다면 그건 이미 필멸자의 영역을 벗어난 수준이니까.

레이첸도 그 사실을 눈치 채고는 곤혹스런 얼굴이 되었다.

“젠장, 위험천만하게 됐어. 저 늑돌이가 그렇게 강해지다니.”

분명 몇 년 전만 해더라도 그랜드 급이었던 적이 갑작스럽게 강해져 등장했다. 공교롭다 못해 기가 막힐 일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야. 옆에 있는 저 두 놈도 루클라와 동급으로 보인다는 거지.”

연정운이 말한 그들이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특히 레이첸과 아리엔은 라인트라 대전에서 직접 맞서 싸웠던 만큼 몰라볼 수가 없었다.

사혼검 카르발타와 죽음의 인도자 데이모스.

데이모스는 겉모습이 예전과 좀 달라지긴 했지만, 풍기는 기질과 영자패턴은 그때와 변함없어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칫, 저 작자들이 아주 작정을 했군. 이번엔 분신을 보내지 않고 본인들이 직접 온 모양이야.”

레이첸의 투덜거림에 아리엔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신을 보냈던 라인트라 대전 때의 강함과 비교하면 확실히 차원이 다른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천외 오천 중 일인인 사토 류지도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난감하네. 저 괴물들을 우리가 상대해야 한다고?”

무려 오버 그랜드, 즉 반신 급의 괴물들이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랜드 급에 도달한 강자들이라고는 하지만 저 셋을 상대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지켜야 할 입장이라면 베어야 한다.]

진지하고 굳건하기까지 한 목소리. 용천군의 태도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베르트 슈마허도 그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게다가 우리가 여기서 물러나면 아군 함대가 희생되겠지. 어떻게든 진열을 재정비할 때까진 시간을 벌어야 해.”

헌데 그때였다. 공화국 전함을 공격하던 데이모스가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건지 비웃듯 중얼거렸다.

[과연 네 녀석들이 그럴 수 있을까?]

우우우웅!

압도적인 힘이 공간을 짓눌러오기 시작했다. 네거티브 플레인의 에너지가 아리엔들이 있는 곳을 향해 직접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큭, 이탈해!”

로베르트 슈마허의 외침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즉시 압력을 떨쳐내고 벗어났다.

[후, 역시. 그래도 하던 가락은 있다 그 말이지?]

데이모스는 픽 웃으며 오른손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공간을 짓누르던 압력이 곧 창백한 섬광으로 화해 아리엔들을 덮쳤다.

콰우우우!

실로 무시무시했다. 놈이 가볍게 펼친 그 수법이 거의 재해나 다름없는 규모로 밀려들고 있었다.

아리엔들은 제각기 특기를 발휘해 방어에 나섰다. 특정 공간에만 작용하던 힘이 마치 급류와 같은 형태로 변해 밀려오면 피할 여지조차 없었다.

“윽!”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그 안에 담긴 저주와 악념이 그들을 갉아먹었다. 역시 흑마법사답게 공격 하나하나가 지독하고 악랄했다.

“데이모스!”

카르테인의 계약자의 증명이나 다름없는 청화를 끌어올려 저주를 떨쳐낸 레이첸이 두 눈을 부릅뜨며 우주 공간 위로 일보를 내딛는다.

그리고 이보에 진력을 모으고, 뒤이은 삼 보에 기운을 오른 주먹으로 집중시켰다.

양을 상징하는 인력과 음을 상징하는 척력이 서로 반발하면서 곧 강대한 파괴력으로 전환되었다.

패천권(覇天拳)

번천파열인(翻天破裂印)

곧게 내뻗는 주먹과 함께 우주공간을 관통하는 강대한 역도! 그것은 데이모스를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그때처럼 당할 것 같으냐?]

데이모스가 석장을 들어 올린 순간, 질척이는 어둠이 그 위로 집중되었다.

최상계 흑마법. 렉시온 카이더<천중천압파天重舛壓波>

석장을 내뻗는 순간, 무시무시한 어둠이 닥쳐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닌, 막대한 규모의 중력파라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레이첸의 안색이 굳어졌다.

라인트라 대전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지만, 그땐 그가 밀어붙여 승기를 잡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데이모스의 중력파가 오히려 번천파열인의 역도를 무너뜨리면서 밀려들고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준대형 전함의 포격마저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콰아아앙!

“빌어먹을!”

레이첸은 욕지기를 흘리며 간신히 공격을 피해냈다. 만일 관성제어가 아니었더라면 놈의 중력파 공격에 여지없이 쓸려나갔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를 스쳐지나간 중력파의 힘은 그대로 쭉쭉 뻗어나가 가장 후위에 있던 전함 세 척과 인근의 소행성들을 박살내 버렸다.

만일 그 공격이 레이첸을 겨눈 게 아니었다면, 피해는 고작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모스가 내려다보듯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그때의 애송이들이 여기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감개가 무량할 지경이군.]

그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감탄이었다. 분신으로 마주했을 때만 하더라도 마이스터 급에 지나지 않던 재능 넘치는 애송이었는데, 설마 여기까지 치고 올라올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필멸자와 초월자의 간극은 깊고도 넓지. 네놈들이 제아무리 손에 꼽는 강자들이라 해도 내 앞에선 의미가 없다.]

“내게 한번 패했던 녀석이 그런 소리냐?”

[그때는 분신이었지. 게다가 지금 이 몸은 완전히 데미 리치가 되었다. 예전과는 차원이 달라.]

그 말을 듣고서야 레이첸은 데이모스가 예전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진 건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땐 뼈밖에 남지 않은 언데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좀 창백하긴 해도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그런 거였어? 본체라서 뭔가 다른 게 아니라 경지가 높아져서 달라진 거였다 이거지?”

데미리치. 리치화 된 흑마법사가 도달할 수 있는 초월의 경지 중 하나. 즉 데이모스는 언데드로서의 한계마저 뛰어넘어서 다시 생전의 본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아리엔의 안색이 더없이 무거워졌다.

레이첸이 데이모스와 주고받는 사이 카르발타와 루클라를 견제했지만, 역시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반신초월자에 도달한 만큼, 풍기는 기세만으로도 이쪽을 압도하고 있었다.

[젠장 성가시구나.]

루클라가 짜증스런 태도로 힘을 뿜어내었다. 그러자 은빛 광채가 해일과 같은 기세로 뻗어 나와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반신 급의 공격이라 해도 쉽게 당할 이들이 아니었다. 아리엔을 비롯한 천외오천들은 그런 공격을 피하고 흘려내면서 거리를 벌렸다.

[날파리 같은 것들. 내가 상대할 녀석은 유태진 한 명 뿐이다. 네놈들 따위가 아니야.]

애당초 루클라의 관심사는 유태진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라인트라 대전 당시 자신보다 경지가 뒤떨어진 상황에서도 자신을 압도하던 유태진에게 더없는 굴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붙어보기 위해 일부러 특공에 가담했는데, 유태진의 얼굴은 고사하고 이런 녀석들만 만났다. 그로서는 모든 게 짜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연정운이 비웃듯 내뱉었다.

“별 우스운 소릴 다 듣겠군. 아니, 그 실력으로 그를 상대하겠다고?”

[이놈이?]

“유태진 그 친구는 이미 완성된 초월의 영역에 들어섰어. 너처럼 반쪽짜리가 아니라. 그런 친구를 상대한다니 자만도 유분수지. 너 따윈 만나는 즉시 죽을 거다.”

그 말대로였다. 유태진은 이미 반신의 경지를 뛰어넘은 상황. 루클라가 제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루클라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다시 한 번 맞붙고 싶을 뿐이었다.

[정 그렇다면 네놈들을 죽이고 나서 생각해 봐야겠군.]

결심을 굳힌 모양인지, 루클라의 기세가 더욱 흉포해졌다. 이젠 주변의 우주공간이 그의 의념에 따라 패도적인 파동으로 승화되어 모든 것을 짓눌러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계속되지 못했다.

“거기까지다!”

투우우웅!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루클라의 전신이 거대한 압력에 짓눌려졌다. 물론 그 정도는 곧 가볍게 상쇄되었지만 루클라의 안색은 불편한 듯 일그러졌다.

[이 힘··· 그렇군. 베네트 국장이냐?]

“그렇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아리엔들 옆으로 베네트 국장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루클라는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하필이면 이 녀석이···.’

반신초월자들에게 있어 가장 껄끄러운 것이 바로 베네트 국장의 존재였다. 그가 가진 고유스킬 [징벌자의 저울]은 신성을 가진 자들의 격을 하락시키거나 제약을 가한다.

지금 그가 단순한 압력에 눈살을 찌푸린 것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벌써부터 시작된 건가?’

사혼검 카르발타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베네트 국장이 나타난 그 순간부터 기이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징벌자의 저울]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를 비롯한 세 명의 반신초월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바였다.

‘흐음, 역시 불편하군. 그래도 우리 셋에게 전부 그 힘을 작용시키는 데엔 한계가 있어.’

데이모스는 징벌자의 저울에 의해 자신들의 역량이 크게 하락했다는 사실을 절감했지만, 그만큼 한계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예전 라인트라 대전 당시 도무누스를 상대로 징벌자의 저울을 적용시켰을 땐 역량이 그랜드 급까지 하락했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제약된 역량 자체는 간신히 반신 급에 발을 걸친 수준. 단지 반신으로서의 능력을 다 사용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인과성립이나 장악 같은 건 어렵겠군. 통상적인 역량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건가.’

인과성립. 그것이야말로 그랜드 급과 반신초월자의 경계를 나누는 가장 큰 차이점이었지만, 베네트 국장의 고유스킬이 발동된 지금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결국 저들과 직접 손속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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