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31화 (432/448)

#431

17권-30화

‘미친! 이런 게 가능하다고?’

유태진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만큼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가 너무 놀라워서였다.

그리고 중급신에 달하는 자신에게 이만한 변화를 일으켜줄 수 있는 용신의 권능이 실로 놀랍고도 경악스러웠다.

어째서 우주의 수많은 초월자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그토록 경외하는 것인지 비로소 조금 알 것 같았다.

허나 정작 이런 기적같은 결과를 만들어낸 레니우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이 정도면 꽤 도움이 되겠지.]

그냥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받은 축복만으로도 그의 역량은 말 그대로 한 차원 도약을 맛보았다. 이제 막 중급신의 경지를 넘어선 수준이 아니라 중급신 중에서도 충분히 상위권이라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그걸로 끝난 게 아니다. 그에게 축복을 내려줄 마음을 먹고 있었던 건 용신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번엔 제가 당신에게 성신의 축복을 내려주도록 하죠.]

[당신께서도?]

[솔직히 전 당신의 행보를 응원하고 있었어요. 지성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르탈 행성 연합이란 세력을 일구고 우주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노력한 것은 충분히 훌륭했으니까요.]

아서였던 시절의 성과를 칭찬하는 그 말에 유태진은 조금 민망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 점이 더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당신에게 주어질 섭리의 제약을 최대한 줄여드릴 겁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불합리하게 핍박받거나 우주의 평안을 어지럽히는 ]

[그런 게··· 가능 합니까?]

유태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섭리의 제약은 조물주가 만든 유그드라실 시스템(창멸법칙)에 의해 가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임의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 섭리의 제약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지만, 특정 조건을 붙이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죠.]

그렇게 말하면서 크레이시아는 자신의 오른손을 유태진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제부터 제노디안 당신을 나 성신 크레이시아의 대행자로서 권세를 부여하겠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지성체가 사는 모든 성계의 수호자로서 활동할 수 있으며, 그 권한은 성계신에 준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 권세는 약자를 위해 싸우고,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며, 사욕을 위해 싸우지 않는 자를 위한 겁니다. 당신이 우주의 평안이 아닌 불의한 목적을 갖게 된다면 이 권한은 곧바로 회수될 테니 항상 경계하며 지금의 초심을 유지하도록 하세요.]

[···정말 터무니없군.]

유태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받은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성계신이 갖는 권한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자신의 성계에 한해서라면 거의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헌데 그런 권한을 지금 유태진도 갖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것도 하나의 성계에 국한된 것이 아닌, 지성체가 사는 모든 성계에 적용되는 놀라운 권한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신명은 다름 아닌 성신(星神). 풀어서 말하자면 별의 신이었다.

창세성검의 주인이자 조물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운명을 계승하는 자’인 그녀는 성계신의 권한을 부여하고 박탈할 수 있는 권한마저 가졌다.

‘그래, 이 축복은 바로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였군.’

그녀가 지성체가 사는 행성으로 권세를 국한시킨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이 힘을 특정 이권이나 사욕을 위한 침략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결국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면 이 권한도 결국 그녀에게 다시 회수될 것이다.

‘상관없지. 어차피 이 힘을 내가 침략에 쓸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애당초 아서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는 오직 지키기 위해서만 싸워왔다. 가까운 이들을, 그리고 지구를, 이제는 지성체들이 사는 모든 성계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니 그녀가 내려준 이 축복이 오용될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그 정도면 볼만하군. 그 녀석과도 대등한 위치에서 제대로 싸워 볼 수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레니우스의 그 물음에 유태진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의 전생 기억을 되찾고, 레니우스와 크레이시아의 축복마저 받아들인 자신의 역량은 중상위신에 버금갔다. 거기에 완전히 부활한 엑스칼리버까지 쥔 이상 태무환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긴 했지만, 우린 그룬베일을 단순히 악의 축으로만 볼 순 없다. 놈은 조물주가 만든 시스템에 절망한 신들 중 하나일 뿐이니까.]

[······.]

[너도 지금쯤이면 알 거다. 녀석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예.]

유태진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가 딱히 사욕을 위해 이런 참혹스런 짓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그가 중급 신격을 획득하면서 얻은 아카식 레코드의 열람능력이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있었다.

본디 수많은 영혼들을 완성에 이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윤회전생 시스템. 하지만 그룬베일은 그것에 분노하고 연민하면서 그 속에서 겪는 영겁에 이르는 고통과 시련에서 모든 필멸자들을 해방시키고, 다시 원초로 되돌려 완전한 창세를 완성하겠다는 망상에 가까운 집착을 갖고 있었다.

[윤회영겁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고통의 연쇄를 끊어내겠다는 목적 자체는 숭고하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식 자체는 글러먹었지. 아니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야. 조물주가 창조한 근원의 일곱 차원, 그리고 나란히 선 평행차원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무한한 차원을 무슨 수로 원초로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결국 헛된 꿈일 뿐이다.]

레니우스는 시니컬한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으면서 유태진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은 단호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그러니 네가 끊어줘라. 놈의 오랜 망집을. 그것이 잘못된 연민이고 분노라는 걸 놈에게 깨닫게 해 주는 거다.]

[예, 반드시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각오가 서린 그 대답에 레니우스는 한 차례 피식 웃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불청객인 우린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건투하길 빌겠다.]

[제노디안, 당신이 부디 승리하길 기원하겠어요.]

크레이시아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그들의 모습은 유태진의 사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아득해진 순간, 그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가 부활한 엑스칼리버의 손잡이를 잡던 그 시점이었다. 심상세계에서 용신과 성신을 대면했지만, 현실의 시간은 조금도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이게···!?”

멀린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언제나 능글맞게 웃던 평소의 그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그리고 루네리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상위신인 그녀는 멀린보다도 유태진에게 발생한 변화를 확연히 읽고 있었다.

[세상에··· 성신과 용신께서!? 그분들의 가호를 받은 거군요.]

유태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루네리아. 그분들께서 도와주셨지.]

[당신!?]

전혀 달라진 말투에 루네리아가 더욱 놀라 반응했다. 지금까지 유태진은 루네리아에게 언제나 존대를 취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평대를 하고 있어서였다.

물론 유태진도 중상위 급 수준의 신이 된 만큼, 여태까지처럼 공손한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지금 찾아온 변화는 그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루네리아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서 시절과는 얼굴은 많이 달라졌지만, 풍기는 느낌과 분위기가 그때와 흡사해졌다는 사실을.

그런 짐작을 확신이라도 시켜주듯, 유태진이 씁쓸한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전해왔다.

[미안, 그동안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서···. 너무 오랫동안 널 홀로 놔두고 말았어.]

[아서, 당신··· 정말로 기억을 전부 되찾았군요?]

[그래, 계획대로 그렇게 되었어. 거의 도박에 가까운 짓이었지만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이야.]

애당초 생을 포기하고 윤회전생을 선택한 것은 아서에게도 도박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후에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봉인하긴 했지만, 윤회전생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되찾으리란 보장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엑스칼리버가 있었다. 인베이더의 신좌들을 억누르기 위해 아발론의 의례법진의 핵심 축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엑스칼리버는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자신의 주인을 따라 화신을 만들어 언제나 뒤쫓아 다녔다.

그렇기에 엑스칼리버의 화신은 다양한 형태로 그 옆에 항상 존재해왔다. 그가 천화운 시절에 사용하던 천룡파마신검 또한 그런 엑스칼리버의 화신들 중 하나였다.

엑스칼리버는 그런 주인의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보전해왔고, 완전히 부활한 지금에 와서야 이 모든 것을 되찾게 해준 것이다.

[아아,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당신이 너무 그리웠다고요. 왜 이제야···!]

루네리아는 무너지듯 그의 품에 안겨왔다. 무려 1000년이었다. 물론 신에게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그가 부재했던 하루하루가 천년 같았다.

너무도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지난 세월동안 쌓인 그리움이 그가 기억을 되찾은 것을 계기로 단번에 터져 나오고 만 것이다.

유태진은 그녀의 머리와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널 너무 기다리게 했어. 네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게다가 기억을 되찾기 전의 유태진은 그녀를 내심 원망하기까지 했다. 의동생인 윤재민의 희생 때문이었다. 그녀의 강림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잘 알지만, 그 결과 윤재민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그녀를 은근히 불편해 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루네리아는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을까? 자신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은 연인에게 미움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참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선 그녀를 계속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태무환이 시간을 끌면서 여유를 부리고 있지만, 언제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유태진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루네리아, 나···.]

하지만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루네리아가 먼저 알아채고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알아요. 자, 가세요.]

[루네리아.]

어느새 그의 품에서 벗어난 그녀가 힘겨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머뭇거리지 말아요. 모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당신이 걸어온 길을 아는데 당신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순 없죠.]

[······.]

오히려 가라면서 등을 떠미는 그녀 덕분에 유태진은 일말의 주저함마저 떨쳐낼 수 있었다.

[대신 무사히만 돌아와요. 그래주면 전 충분해요.]

[···그래, 꼭 약속할게.]

그녀가 건넨 유일한 소망. 유태진은 다짐하듯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곧바로 전장을 향해 이동한 것이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면서 멀린이 중얼거렸다.

“가셨군요.”

[그래요. 그는 자신의 숙명을 위해, 모두의 안녕을 위해 싸우겠죠. 저는 그런 그를 막을 수가 없네요.]

처연하기까지 한 그 목소리에 멀린도 평소처럼 웃지 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애타게 그를 그리워하면서 기다려왔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000년 만에 되돌아온 연인을 다시 싸움터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심정은 그녀만이 알 것이다.

그때였다. 루네리아의 모습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엑스칼리버를 부활시키는 데에 너무 많은 간섭력을 소모한 탓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현신을 유지할 여력이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전 이만 돌아가겠어요. 다시 보게 되는 때는 이 싸움이 끝나고 정리가 된 다음이겠죠. 그러니 그에게 전해주세요. 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 돌아와 달라고요.]

“예, 꼭 전하겠습니다.”

멀린은 사라지는 여신을 향해 대답하고는 옆에 쓰러져 있던 엘레나를 안아들었다. 그녀는 엑스칼리버의 부활하는 과정에서 혼신의 힘을 다 쏟은 탓에 탈진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전처럼 혼에 타격을 입은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멀린은 그런 엘레나를 루크아딘의 승무원에게 맡긴 뒤 자신도 전장을 향해 움직였다.

바야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클라이막스였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오늘의 싸움을 위해 준비해 온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지지부진한 것만큼 시시한 것도 없지요. 오늘로서 오랫동안 지구를 옭아매온 재앙을 완전히 떨쳐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멀린도 공간이동을 통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야 진정으로 지구의 운명을 좌우하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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