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28화 (429/448)

#428

17권-27화

“뭐? 엘레나라니!? 지금 무슨···.”

유태진이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갑자기 여기서 엘레나의 이름이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놀람을 추스를 새도 없었다. 좀 전까지 없던 기척이 갑자기 바로 옆에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그 기척의 주인이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유태진이 신음하듯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엘레나···.”

여신의 힘에 의해 먼 거리를 뛰어넘어 이곳으로 소환된 엘레나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그녀의 소환이 이미 사전에 논의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루네리아! 당신은 이 아이까지 휘말리게 할 셈인가?”

유태진은 그녀에게 꼬박꼬박 붙였던 존칭마저 내팽개친 채 외쳤다.

그러자 루네리아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은 채 복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씁쓸한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슬퍼 보이기도 했다.

‘왜 그런 표정을···?’

이 상황에서 그녀가 보여준 표정에 그가 의문을 느끼고 멈칫하던 그때, 멀린이 끼어들었다.

“유태진 씨, 엘레나 양을 이 일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한 건 접니다. 여신께 무례를 범하진 마시죠.”

“···뭐 그렇다고 치자. 그럼 엘레나를 어째서 끌어들인 거지?”

“엘레나 양의 고유능력이 엑스칼리버의 부활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죠.”

유태진의 물음에 곧장 답하는 멀린. 그 대답을 들은 유태진의 눈이 더욱 차가워졌다.

“엘레나의 고유능력을 이용하겠다고? 멀린,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건가?”

“물론 잘 알고 있지요. 그녀의 고유영능은 무구의 구현! 전설로 남아 있든 현존하든 기록이 남은 무기라면 그 어떤 것이든 구현해내는 능력 아닙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역량이지. 본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무구구현은 엘레나 자신마저 파멸시킬 수 있어. 이미 그와 비슷한 경우도 겪었었고.”

천룡파마신검을 구현해냈던 그 당시, 엘레나는 반쯤 사경을 헤매야 했다. 만일 루네리아의 사도인 베르다인에게 치료받지 못했더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지금은 천룡파마신검도 아니고 그 진신이라 할 수 있는 엑스칼리버를 부활시키는 일이다. 거기에 엘레나가 힘을 보탤 경우 어떤 불행한 참사가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도 그런 위험천만한 역할을 엘레나에게 맡기겠다고? 엑스칼리버의 부활을 위해 그 아이를 희생시키겠다는 거냐?”

“이 차원의 흥망이 걸린 일입니다. 작은 여자아이 하나의 희생으로 우주가 멸망의 기로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희생 아닐까요?”

멀린은 태연스런 표정으로 희생이란 말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유태진은 그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웃기지 마! 그런 구원이라면 나부터 사양한다!”

자연스럽게 살기가 피어오른다. 그 기세는 단순히 살의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형상화 되고 있었다.

주변에서 집결된 거대한 힘. 그것이 그 뜻에 따라 무형검이 되어 멀린을 향해 겨누어졌다.

하급신에 버금가는 영역에 접어들면서 이런 힘의 수발조차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그렇지만 멀린은 그런 위협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흐음, 의사가 확고해서 좋군요.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겁니다. 엘레나 양을 희생양으로 삼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 말을 믿을 수 있나?”

불신 섞인 그 말에 멀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엘레나 양이 맡을 역할은 검의 주조 설계 과정이지, 그걸 구현화 하는 건 제 몫이니까요. 그 정도라면 큰 부담 없을 겁니다.”

확실히 일리는 있었다. 엘레나의 무구구현 과정은 대략 셋으로 나뉜다.

첫 단계는 구현하고자 하는 무구의 기록 검색이고, 그 다음에는 검색된 무구의 정보와 설계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불러들인 정보와 설계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실제 구현화 하는 것이다.

물론 살펴보면 보다 더 세세한 과정들이 있을 테지만 크게 분류한다면 그 정도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세 과정 중 엘레나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것은 바로 3번째 단계. 무구의 격이나 힘의 크기가 클수록 그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그렇지만 멀린의 말처럼 구현과정 자체를 그가 전적으로 부담한다면 예전과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한없이 낮은 가능성조차도 유태진으로선 불안할 뿐이었다.

그러자 엘레나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으면서 말했다.

“스승님, 화 내지 마세요. 전 진짜 괜찮으니까요.”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 유태진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일부러 짓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제자가 먼저 이렇게 나오니 그도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그래, 알았다.”

흥분을 겨우 진정시킨 유태진은 차분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자면 멀린의 결정이 옳았다. 엑스칼리버의 부활에 완벽을 기하려면 엘레나의 고유능력만큼 걸맞는 게 없었다.

다만 그러한 판단에 인간적인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니, 차원의 흥망이 좌우되는 이 상황에선 일개 개인의 희생 따윈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건가.’

유태진은 쓰게 웃고 말았다. 대의적으로 보면 맞는 판단이지만, 사적으로는 엘레나의 스승이 되는 만큼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그럼 시작하죠. 슬슬 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문득 던져진 멀린의 목소리. 유태진은 그제야 의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엑스칼리버의 부활 의식은 그랜드 크로스 현상을 이용하는 만큼, 행성의 배열이 그 형상에 가까워질수록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이제 준비하고 있던 의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만큼, 행성의 배열이 갖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우우!

루크아딘의 갑판에 형성된 제단 위롤 거대한 힘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복잡한 회로와 같은 형상을 한 술식구조체들이 진한 빛을 뿌리며 발광하였고, 그 위로 여기에 모인 막대한 의념과 사상마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제 창세성검의 파편을 꺼내주시죠.”

멀린의 그 말에 유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안에 존재하는 그것을 꺼내들었다.

화아악!

휘황찬란한 광휘와 함께 작은 빛 덩어리가 그의 몸안에서 솟구쳐 오른손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일반적인 물질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밀도 영적 정보체였다. 그렇기에 단지 꺼내겠다는 생각만으로도 그 즉각 반응하여 이렇게 외부로 표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건 정말이지 터무니없군.’

이 작은 빛 덩어리 안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하급신에 버금가는 유태진조차 이 작은 파편을 다루는 게 버거울 정도니, 도대체 온전한 창세성검은 어떤 힘을 갖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꺼낸 창세성검의 파편을 제단의 중심으로 유도하였다.

그런 뒤 유태진과 멀린, 루네리아, 그리고 엘레나가 그 주변을 둘러싸는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그때였다. 유태진의 바로 좌측 옆에 선 루네리아가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형태의 영언을 보내왔다.

[유태진 씨. 염려하는 바는 걱정 말아요. 그건 제가 감당할 테니까요.]

그 말에 유태진은 흠칫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건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여차하면 엘레나에게 가해질 부담을 스스로 떠안을 생각이었겠죠? 하지만 당신은 그룬베일의 화신과 일전을 벌여야 할 몸입니다. 그러니 그 나머지 것들은 제게 맡기세요.]

전부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유태진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엘레나를 공간이동으로 불러낸 것 자체에 대해 나름 여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떠안을 부담을 전부 감당하겠다고 하니, 그 배려에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유태진은 그렇게 은밀히 영언으로 화답했다. 이렇게까지 배려를 받은 이상 말로나마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의식은 점차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창세성검의 파편과 우주에서 밀려든 사상과 의념, 그리고 그랜드 크로스에 의해 밀려든 거대한 힘이 한데 어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힘으로 이제 검을 연단해야 했다.

“자, 그럼 저부터 시작하지요.”

멀린이 자신이 가진 고유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능력은 현실과 분간할 수 없는 환상을 구현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영원히 지속되진 않더라도 현실에 간섭할 수 있는 환상이라면 이건 일종의 현실개변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 힘으로 검의 형상을 빚어낸다. 그것은 바로 오래 전 엑스칼리버가 가졌던 형상이었다.

반투명하기까지 한 그 형상 앞에 창세성검의 파편이 깃들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멀린의 환상은 아직 완성된 게 아니었으니까.

“엘레나 양. 시작해주세요.”

“예!”

멀린의 주문에 엘레나는 바싹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그녀가 해야 할 역할은 명확했다. 멀린이 빚어낸 껍데기뿐인 환상에 세세한 설계와 이념, 목적, 구조와 원리를 더하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엑스칼리버가 엑스칼리버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뚜렷한 설계사상이라 할 수 있었다.

엘레나는 가만히 서서 떠올렸다. 그녀가 보고 느꼈던 천룡파마신검의 흔적을. 당시에는 천룡파마신검이란 형태로 나타났었지만, 그 실체는 다른 데에 있었다.

예전이라면 몰랐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능력도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한데다, 천룡파마신검의 실체가 엑스칼리버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형태로···.’

엘레나는 다른 이들이 진실을 몰랐을 때에도 유태진의 비밀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득할 정도로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곳에 존재하던 천룡파마신검과 교감할 수 있었고, 그런 소통으로 천화운 시절의 기억과 경험을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천룡파마신검이란 기존의 허물을 벗어나, 엑스칼리버라는 진면목을 드러낸 지금 그녀가 접할 수 있게 된 진실은 그런 차원을 아득히 넘어섰다.

무려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와 기억들이 일시에 그녀의 뇌리로 흘러지나갔다.

덕분에 엘레나는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구가 어째서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엑스칼리버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모조리 알게 되었다.

그리고 브리튼의 왕이었던 아서 팬드래건이 후에 우주로 나아가 아르탈 행성 연합을 세우고 제노디안 리피라이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 진실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렇다면 그토록 대단해 보이던 아르탈 행성 연합조차 지구인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건가?

한꺼번에 쏟아진 진실들 덕분에 엘레나는 놀람에 놀람을 거듭해야 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잊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러한 진실들이 아니었다. 그녀가 쥐어야 할 것은 오직 엑스칼리버! 그것에 대한 정보와 설계사상이었다.

지구상의 수많은 사상과 의념을 담은 채, 검이란 형태로 고정화될 수 있는 논리와 구조!

그것을 이끌어내는 것이 그녀의 역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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