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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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나?”
가히 우주를 뒤흔들 만큼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덕분에 유태진은 태무환이 드디어 태양계 인근까지 다가왔음을 알아챘다.
그것은 멀린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안 좋은 예감은 잘 맞는군요. 그룬베일의 화신이 엑스칼리버가 부활하기도 전에 당도하다니···.”
그러자 옆에 있던 루네리아가 자신이 내다 본 사실을 말했다.
[그가 적극 힘을 사용 했더군요.]
“그 말은 권능을 사용했단 말이군요?”
[그래요. 워프항법이나 권능으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방법은 사용하지 못해도, 권능으로 함대의 전진속도를 약간이나마 가속시키는 건 가능하니까요.]
확실히 그 정도 편법이라면 불가능하지만도 않았다. 현재 섭리의 제약마저 무시할 수 있는 태무환이라면 이미 태반의 힘을 상실한 의례주법의 영향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유태진의 얼굴 위로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를 눈치 챈 멀린이 슬그머니 물음을 던졌다.
“설마 싸우러 가실 생각은 아니겠죠?”
유태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는 수 없잖나. 이대로 두면 엑스칼리버가 부활하기 전에 아군 함대가 전멸할 게 뻔한데, 그걸 그냥 두고 보라는 건가?”
엑스칼리버의 부활도 중요하지만, 연합과 공화국 함대의 전력을 보전하는 것도 중요했다. 제아무리 엑스칼리버를 무사히 부활시킨다 하더라도 함대의 전력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 인베이더와 단독으로 맞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루네리아는 염려할 것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군요. 그룬베일의 화신은 반쯤 방관하기로 결정했으니까요.]
“방관이라면···?”
[그는 유태진 당신과의 재전을 기다리는 모양이더군요. 그것도 대등한 입장에서.]
“그 말은··· 엑스칼리버가 부활하길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까?”
[예, 그런 셈이죠.]
“태무환, 그 작자가······.”
루네리아의 말을 듣고서야 유태진은 태무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놈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무인 대 무인으로서의 대결을 바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생 때 제대로 내지 못했던 싸움의 결판을 제대로 내 보자 이건가.’
유태진도 그 심정은 나름 이해가 갔다.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 전생의 마지막 대결의 승패를 다시 가늠하고 싶은 것은 그도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렇지만 자신의 손에 이 차원의 명운이 걸려 있는 상황. 그런 개인적인 감정에 이끌려 움직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우리 입장에선 정말 다행스런 일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유태진 씨는 엑스칼리버가 완전히 부활할 때까지는 절대 움직여선 안 됩니다. 설령 함대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말이죠.”
“어째서지?”
“엑스칼리버의 부활 의식은 과정도 중요하거든요. 엑스칼리버의 주인인 당신이 이 자리에 없으면 이 의식은 실패하고 마니까요.”
“···과정도 의식의 한 부분이라 중도에 빠질 수 없다는 말이군.”
유태진도 그와 비슷한 술식들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그건 행성의 운행을 이용한 술식이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기일식을 이용한 술식이었다. 이때 태양이 위성에 의해 가려지는 진행과정 자체가 술식의 일부분으로 작용하는데, 엑스칼리버의 부활의식도 그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뭘 어떻게 의식을 치른다는 거지? 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현재 유태진과 멀린들은 달의 뒷면 부근에 정지해 있는 다목적 공업함 루크아딘의 함상 위에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멀린은 이곳에서 의식을 치른다고 했는데, 유태진의 눈에는 딱히 준비했다고 생각될만한 건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큰 규모의 의식은 아무것도 없이 그냥 맨바닥에서 치른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오래 전 성계신의 주도로 처음 엑스칼리버가 탄생될 때에도 꽤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지구의 사상과 의념이 집중되는 성지에서 치른데다, 방대한 규모의 술식을 지탱할 수 있는 의례법진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유태진의 의문에 멀린이 말했다.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답니다.”
그는 석장 끝으로 함의 상판을 가볍게 몇 번 두들겼다. 그러자 낮은 구동음과 함께 함의 상판이 크게 변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제단이었다. 전함의 상판 외장갑 파츠들이 이러 저리 꿰맞춰지고 변형하면서 의식용 제단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루크아딘은 유태진이 지구로 오게 되었던 당시에 인수받았던 다목적 공업함이었다. 그게 벌써 2년도 더 된 일이었으니, 지금 가동 중인 변형식 제단은 그보다 더 이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런 걸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지···?”
유태진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멀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생각보다는 꽤 오래 되었죠. 한 10년 쯤 되었던 것 같군요.”
“···그 말은 진작부터 여기까지 내다봤다는 건가?”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선 도저히 불가능한 준비성이었다. 그렇지만 멀린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미래를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우주에 없죠. 설령 제아무리 대단한 초월자라 해도 말이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해서 수많은 경우의 수를 감안해 대비할 순 있죠. 바로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렇군.”
하긴 무려 1500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룬베일의 재침에 온갖 대비와 수단을 준비해 온 멀린이었다. 그 긴 시간에 비한다면 이 정도 준비쯤은 그리 대단할 것도 못 된다.
“게다가 이 제단은 어디까지나 우주 곳곳에 존재하는 의식제단과 연동하기 위한 매개일 뿐입니다. 즉, 의식의 핵심 코어 역할을 하는 거지요.”
우우우웅!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무런 반응도 없던 제단 전체에 서서히 거대한 흐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은하계 행성들의 형상이 점차 그랜드 크로스에 가깝게 다가가면서 저절로 의식이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자동차로 친다면 이제 겨우 시동이 걸리면서 엔진 예열이 되어가는 단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웠다. 이미 엑스칼리버를 만드는 과정을 아서의 기억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해봤던 유태진이었지만, 이건 그 당시를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막대한 사상과 의념이라니! 그때보다 수십, 아니 수백 배 이상이다! 이건 지구 단독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수준인데··· 설마!?’
지구가 탄생한 이후로 지금까지 누적된 지성체들의 사상과 의념을 합친다 하더라도 백억을 채 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로 몰려들고 있는 사상과 의념은 수천억,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건 마치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지성체들의 의념과 사상을 죄다 이곳으로 끌어당겨오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유태진이 낮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랜드 크로스를!”
“이제야 눈치 채셨군요. 그렇습니다. 그랜드 크로스는 우주 각지에 세워진 비밀 제단을 통해 모인 막대한 사상과 의념을 중계해 이곳으로 끌어오는 역할을 하고 있죠. 그리고 행성의 교차 배열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우주의 에너지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고요.”
그랬다. 멀린이 의식에 도입한 그랜드 크로스는 단순히 우주의 운행에서 생성되는 막대한 힘만 이용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지난 1500년 동안 아르탈 행성 연합이라는 세력을 바탕으로 은하계 각지 행성에 수많은 제단을 세워두었다. 물론 철저히 비밀에 붙여 세운 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무려 1500년 이상 긴 시간을 투자한 덕분에 적지 않은 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오랜 노력과 수고가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이 도래했다.
“저는 그냥 1500년 전과 같은 엑스칼리버의 부활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전 그때 이상으로 완벽한, 결코 낡거나 쇠하지 않는 그런 완전한 성검의 완성을 바라고 있지요. 지금 보시는 게 바로 그 준비들 중 하나고요.”
유태진은 그런 멀린의 장담이 결코 허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온갖 감각을 통해 이곳에 몰려드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사상과 의념을 느끼고 있었다.
하급신에 반쯤 발을 들인 그조차도 전율스러울 정도니, 그 양이 얼마나 방대한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때 유태진의 뇌리로 수많은 소리들이 흘러들었다.
‘들린다. 우주의 수많은 지성체들의 갈망이··· 그 목소리가···!’
그들은 하나같이 외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구원이 있기를, 평화가 지속되기를!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인베이더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유태진은 이 염원과 갈망이 어떻게 모여들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도했고 바랐는지, 그리고 그들의 염원이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 그 모든 과정이 낱낱이 읽혀지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까지 읽고 준비한 거냐?
너무 놀라운 나머지 그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멀린이 지금까지 준비했다는 비밀 제단들은 그냥 아무렇게나 세워진 게 아니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것들은 우주 각지에 있는 루네리아의 신전들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를 향한 신앙 중 인베이더로부터 구원을 바라거나 혹은 그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모여 지금처럼 엑스칼리버의 부활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준비한 게 이게 전부라면 오히려 과유불급이지.’
막대한 양의 의념과 사상은 엑스칼리버와 같은 성검의 형태를 구체화 할 수 있지만, 이것을 완벽하게 고정하고 결집시킬 힘이 필요했다.
쉽게 말하자면 재료의 양과 질이 뛰어나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제련할 수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 정도로 방대한 의념과 사상이라면 그 난이도는 1500년 전 엑스칼리버를 만들 때보다 더 높을 터.
대체 멀린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규모의 의념과 사상을 모아들인 것인지 의해가 되질 않았다.
평소와 달리 진지한 목소리로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멀린을 향해, 유태진이 심각한 안색으로 물었다.
“과연 가능하긴 한 거냐? 이런 미친 규모를 다루는 게.”
물론 지금 이 자리에는 멀린이 있고, 지구의 성계신 대신 여신 루네리아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천년 전과 같은 엑스칼리버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더 막대한 사상과 의념을 결집시켜 검을 완성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짐작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멀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렵겠지요. 지금만으로는요.”
“그럼 대책이 있다는?”
“예, 다만 어떤 분의 조력이 필요하죠.”
“조력? 누구의···?”
유태진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저만한 사상과 의념을 검의 형태로 고정화 하는 과정은 어지간한 역량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하급신 이상, 아니 그보다 더 높은 격을 가진 초월자 수준은 되어야 했다.
설마 자신들을 도울만한 그런 이가 또 있었던가?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어 의문을 드러내던 그때, 이어진 멀린의 목소리가 유태진을 크게 격동하게 만들었다.
“엘레나 양.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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