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25화 (426/448)

17권-25화

최종결정권자인 두 사람이 결정을 내리자마자 공화국과 연합 함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반신 급 초월자를 비롯하여 에인션트 드래곤들까지 있었지만, 지휘권을 보유한 베네트 국장과 베이노아 수상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일단 에인션트 드래곤을 비롯한 반신초월자들의 참전을 제지시켰다.

애당초 그들은 그룬베일의 화신을 상대하기 위한 전력이었다. 태무환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고 공언한 이상,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 두는 게 현명했다.

[역시 그런 식으로 나왔군.]

연합과 공화국 측의 함대가 전진하기 시작하자, 태무환은 미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대로였다. 놈들이 구축한 유사차원결계는 제법 놀랍긴 했지만, 그 뿐이다. 제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일방적으로 방어만 한다면 뚫을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함대의 화력을 집중시킨다면 차원결계를 무너뜨리진 못해도 일각을 허물 순 있지. 놈들도 역시 그 정도 상황파악은 할 줄 아는군.’

바로 그때, 태무환의 뇌리로 초월적인 존재감을 품은 영언이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이곳에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존재가 보내오는 것이었다.

<태무환.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태무환은 갑작스런 영언에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죽 웃었다. 영언을 보낸 주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뭘?]

<당장 나서도 모자랄 판국에 직접 손을 쓰지 않고 방관하겠다니. 이번 대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는 거냐?>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 어지간한 자였다면 이 영언에 담긴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려 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무환은 태연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정리될 상황이었다. 굳이 힘을 쓸 이유가 없지. 계획도 예정대로 진행 중이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는 태도에 영언의 주인이 더욱 격한 반응을 드러냈다.

<허튼 소리 마라.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기가 차는 군. 모든 일에는 무한에 가까운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나 같이 전지에 접근한 초월자들도 그런 변수들을 전부 예측할 수 없지. 하물며 화신에 불과한 네 녀석 따위가 어찌 장담한다는 거냐?>

영언의 주인은 강압적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움직여라. 그리고 저 너저분한 것들을 전부 쓸어 버려! 그리고 서둘러 유니버셜 테라 코어를 손에 넣어라! 반드시!>

태무환이 착 가라앉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룬베일. 지금 내게 명령하는 거냐?]

<명령? 기가 막히는군. 마리오네트 주제에 감히 내 말에 불복하다니!>

영언의 주인, 그룬베일이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그 영언에는 숨길 수 없는 진한 노여움이 담겨 있었다.

<넌 기껏 해봐야 내가 만들어낸 화신 따위에 불과하다. 그런 녀석이 꽤 건방진 소릴 할 수 있게 되었구나. 평소였다면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밖에 못하던 것이!]

[그래, 네 말처럼 평범한 상황에서는 난 네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

되받아쳐진 그 말에 그룬베일은 영언을 멈췄다. 마치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

[너무 무리한 계획을 시도한 게 문제였다. 알카데인 황제를 부추긴 뒤 그 육신으로 강림한다는 계획은 좋았지만, 섭리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제약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했어야지.]

그랬다. 태무환은 그룬베일이 만들어낸 화신이었지만, 지금은 그의 지배를 거의 받고 있지 않았다.

아직 물질계에 대한 정명한 운명을 소유하고 있던 알카데인 황제의 육체를 강탈함으로서 섭리의 제약을 무시하고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까지 손에 넣었지만, 그 대신 그룬베일은 태무환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만큼 편법을 써가며 자신의 화신을 내려 보낸 리스크가 꽤 컸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지금 그룬베일이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 뿐. 그 외엔 어떤 제제를 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니 네가 내 본신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날 강제할 생각은 마라. 난 내 주관대로 행동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태무환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뒤 그룬베일이 무거운 목소리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래. 인정하지. 널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명심해라. 이번 일에 우리의 많은 것이 달렸다는 사실을. 이런 시시한 여흥 따위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어! 나의 화신이라면 누구보다 더 잘 알 텐데도 왜 고집을 부리는 거냐? 이렇게 시간을 끌다 엑스칼리버가 부활하게 되면 승산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그 위험성은 네놈도 잘 알 텐데!>

그 말처럼 태무환도 엑스칼리버의 위험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재 엑스칼리버가 미처 부활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읽어낼 수 있었다.

만일 지금 그가 직접 나서서 지구로 들이친다면 그 발길을 저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것엔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당초 이런 전쟁 따윈 내 관심 밖이었다. 유니버셜 테라 코어? 차원의 흥망을 좌우하는 저울추를 손에 넣겠다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지금 내가 바라는 건 천화운과의 정정당당한 재전이다. 그 외엔 그 무엇도 관심 없어.]

<이 멍청하고 미련한 것! 그딴 호승심 때문에 오랜 대업을 그르치겠다고?>

그룬베일은 일순 기가 막혀 외쳤다. 태무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더 미칠 것 같았다.

설마 그런 시시한 이유로 예정된 계획을 무시하고 행동하겠다니!

그렇지만 태무환은 그룬베일이 추구하는 대업이 더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시시하다고? 우습군. 나는 여전히 무인이다. 그룬베일의 화신이라는 새로운 명함이 따라붙긴 했지만 내가 무인이란 사실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 내게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건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이다. 네가 추구하는 대업 따윈 내 알바 아니지. 아니 애당초 그 대업이란 것 자체부터가 허황된 게 아닌가.]

그룬베일의 화신으로 확실히 자각하게 된 태무환은 그룬베일이 추구하는 대업의 실체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그가 바라는 지성체들의 멸망.

그것은 그냥 평범한 악의에서 나온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수렁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측은지심에 가까웠다.

그 원인은 그룬베일의 탄생에 있었다. 그룬베일은 일반적인 초월자들과 탄생 기원부터가 달랐다.

초월자들은 대략적으로 두 분류로 나뉘어 진다. 창세부터 탄생했던 존재이거나, 후천적으로 윤회영겁을 통해 업을 쌓아올려 초월자가 되는 경우였다.

하지만 그룬베일은 그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창세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성체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을 쏟아내었다. 그 중 어둠과 절망이 하나로 뭉쳐서 형상화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룬베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개념이 형상화 된 존재에 가까웠다.

하지만 절망과 어둠의 형상화라 해서 그가 부정적이거나 악의적인 성향으로 탄생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을 기반으로 탄생된 만큼 필멸자들의 삶에 공감했고, 그들의 고통을 연민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오랫동안 고뇌했다. 어째서 지성체들은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고통은 윤회영겁을 통해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야 하는지를.

물론 창조주의 목적은 명확했다. 윤회영겁을 거듭함으로서 모든 지성체들이 영적 완성을 향해 다가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룬베일은 이를 납득하지 못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로 만들 것이지, 왜 그런 고통스런 과정을 만들어 지성체들을 영원에 가까운 시간동안 고통 받게 하는가.

그들의 고통은 계속 되었어도 창조주는 여전히 침묵하였다. 아니 창세 이후로는 전 우주를 살펴도 그의 존재감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이건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 창세의 시작은 애당초 잘못되었어.’

그렇게 시작된 작은 반감은 세월을 거듭할수록 커지면서 결국 극단적인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원초로 되돌리겠다. 그리고 그 힘으로 새로운 창세를 열어서 모든 이들을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의 인베이더가 결성되었고, 온 우주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지금까지 그는 수많은 지성체들을 멸망시켰고, 헤아릴 수 없는 문명을 지웠다. 그럼에도 목표는 아직도 그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모든 지성체를 멸절시켜서 우주를 창세 당시의 원초로 되돌린다는 것 자체는 이론적으로 가능하긴 했으나, 문제는 우주가 너무도 광활하다는 것이었다. 그룬베일이 최상급 신격이라 하더라도 직접 나설 수 있는 경우가 한정되어 있는데다, 멸망시키는 것 이상으로 지성체들은 끝없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룬베일은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이래서는 끝이 없겠군. 계속해봐야 평행선만 달릴 뿐이다.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하겠구나.’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유니버셜 테라 코어였다. 그곳을 장악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전우주는 불가능하더라도, 이곳 차원만큼은 확실히 원초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곳을 기반으로 더욱 확장시켜서 온 우주를 원초로 되돌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첫 시도에서 실패의 쓴물을 마셔야 했다. 아서와 그의 휘하 기사들의 저항에 직면한 탓이었다. 그들 하나하나는 보잘 것 없었지만, 그룬베일이 받는 제약이 적지 않았던 데다 하필이면 치명적인 무기가 들려 있었다.

결전성검 엑스칼리버. 창세성검의 편린을 담은 그 무기는 그룬베일과 인베이더의 신좌들에게 쥐약과도 같았다.

그렇게 실패의 쓴맛을 곱씹은 그룬베일은 1500년 가량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제 두 번째 분기점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나서서 싸워야 할 자신의 화신이 두 손 놓고 방관하고 있어서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는 이 상황에서, 무슨 정정당당함을 찾겠다고!’

그룬베일은 끓어오르는 격노를 애써 억눌렀다.

그가 굳이 태무환이라는 화신을 만들게 된 것은 우주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태무환은 무공이라는 가능성을 쥔 화신으로서, 권능이 제약되는 상황에서도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엑스칼리버의 대항책이랄 수 있는 화신이 도무지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룬베일은 분노하는 한편 애가 탔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그에게 부여된 자신의 힘을 거둬갈 순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 시도는 그 즉시 실패로 끝난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판을 뒤엎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그룬베일의 속사정을 잘 알기에 태무환도 이렇게 대놓고 각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바라는 건 내가 천화운을 이기고 나면 이뤄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 전까지는 내 결정에 참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만일 필요 이상으로 간섭한다면 너의 계획 자체를 파탄 내버릴 테니까.]

<···알았다. 네 말대로 해 주지.>

그 이후 그룬베일은 침묵에 들어갔다. 더 이상 태무환과 논쟁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그가 조용해지자 태무환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유태진 뿐이었다.

중원무림 시절 그와 벌였던 마지막 싸움에서 맺었던 그 결말을 태무환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시 그는 마성을 폭발시켜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맺었고, 천화운은 죽어가던 중에 얻은 깨달음으로 태무환을 절명시켰다.

말 그대로 동패구사. 승자도 패자도 없는 허무한 종결이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제대로 결말을 보고 싶었다.

‘참으로 오랜 기다림이었다. 그렇기에 충분할 만큼 기다려주마. 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결착을 맺자.’

#42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