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23화 (424/448)

17권-23화

* * *

“전생이라···.”

베네트 국장은 그 단어를 조용히 곱씹으면서 생각했다.

지구 출신인 유태진이 소환된 직후부터 놀라운 무위를 보여준 건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놀라우리만큼 빨리 강해졌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랜드 급이 되었고, 조금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반신을 넘어 하급신을 넘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건 역대급 재능이라 평가받던 천외오천마저 아득히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환생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나니 그런 터무니없는 성장세도 그럭저럭 납득이 되었다.

“하긴 그런 비밀이 있었으니 가능한 성장이었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태진의 경이적인 발전속도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는 불과 몇 년 만에 전생의 경지를 회복함은 물론 그마저도 뛰어넘어 이젠 하급신에 거의 도달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유태진처럼 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도저히 불가능한 성장이었다.

“그건 그렇고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도 믿기 어려운 일이군. 전생의 원수이자 숙적이었던 자가 악신의 화신으로 강림하다니···. 유태진 그의 운명도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하물며 그는 그룬베일의 유일한 상극이라 할 수 있는 엑스칼리버의 전승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룬베일의 화신과는 전생이든 현생이든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베네트 국장은 이 모든 게 그냥 우연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전생을 거쳐 현생까지 이어지는 숙명은 마치 누군가가 짜 놓은 각본과도 같지 않은가.

“그렇군. 그가 그분일 가능성도 없진 않겠어.”

생각해보면 많은 점이 유사했다.

유태진은 그야말로 다양한 영능들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가 전생에 체득했다는 무공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영능들을 높은 수준으로 구사했다. 가히 만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그가 엑스칼리버의 전승자가 되었다는 점도 그런 추측을 낳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이 확실한 사실은 아니지만, 베네트 국장은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했다.

‘루네리아 여신께서도 예전부터 그를 주시하셨던 걸 보면 가능성이 적진 않아.’

하긴 여신의 관심을 받는 자가 결코 평범할 리가 없었다. 만일 자신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이번 싸움에서 이길 승산은 조금이나마 더 높아질 테지.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오른손으로 슬며시 움켜쥐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큐브 형태의 그것은 베네트 국장이 가진 비장의 한수였다.

“이제 마지막 싸움이다. 이걸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이길 테다.”

베네트 국장은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예정된 때에 이르게 되었다.

그랜드 크로스. 은하계 행성들의 운행이 특정 형태로 배열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진은 그답지 않게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분명 깨달음은 하급신의 반열에 다다랐다. 그런데도 여전히 반쪽짜리라니! 뭐가 잘못된 거지?”

지난 한달 동안 유태진은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하고, 스스로를 계속 돌아봤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온전한 하급신이 되려면 권능을 획득해야 하는데, 여전히 꽉 막힌 듯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자신의 깨달음을 살폈지만, 깨달음 자체는 완벽했다. 더 이상 더할 것도 덜한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순간, 멀린의 형상이 그의 등 뒤에 나타났다. 공간이동으로 그를 찾아온 것이다.

“슬슬 때가 됐군요. 준비는 되셨습니까?”

“······.”

멀린의 그 말에 유태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였다.

이미 시간은 다 되었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그나마 최근 성취를 이룬 제자들과 실전 같은 대련을 벌임으로서 녀석들의 성취를 조금이나마 더 끌어올린 게 전부였다.

그런 기색을 눈치 챈 멀린이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말했다.

“별로 성과가 변변찮았나 보군요. 하긴 무리도 아니죠.”

“···무슨 뜻이지?”

그 어투에서 미묘한 뉘앙스를 감지한 유태진이 묻자, 멀린이 곤란하다는 듯 대답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엑스칼리버가 부활하게 되면 유태진씨께서 고민하시는 문제도 해결될 거라는 겁니다.”

“지금 그 말대로라면 내가 지금까지 헛수고를 했다는 건데··· 대체 경지가 정체된 것하고 엑스칼리버가 서로 무슨 연관이라는 거지?”

유태진은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반신반의했지만, 하급신에 반쯤 닿은 그의 신안은 그것이 사실임을 분명히 통찰했다.

그렇기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유태진 씨는 현재 어떤 한 가지 부분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건 어느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어요. 유태진 씨 스스로 자처해 만든 문제니까요.”

“그럴 리가. 그런 문제가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어. 무의식을 통제하는 걸 넘어 자의식에 통합해버린 내가 인지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사람이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제약하거나, 혹은 특정한 습성이나 버릇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지만 유태진에게는 전혀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그랜드 급만 되어도 예전에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의식을 완전히 통제 하에 둘 수 있다. 하물며 하급신에 준하는 수준에 도달한 유태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말도 맞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현재의 당신에 한해서일 뿐입니다.”

“현재의 나? 그 말은 내가 문제를 자처했다는 게 천화운 시절을 말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재가 문제가 아니라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전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설명했다.

“아니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전생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보다 이전의 전생이라니···.”

“유태진 씨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완성된 초월자란 건 바로 그런 겁니다. 자신이 완성되기까지 거쳐 온 모든 전생들의 기억을 통합함으로서 억겁에 이르는 방대한 업을 체계화 하는 거지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그 부분에서 발목이 잡혀 있어요. 이전 생보다 더 먼 전생의 기억들은 떠오르지 않지요?”

“······.”

“당신이 전생들의 기억을 자각하지 못하는 건 엑스칼리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엑스칼리버의 부활이 선결과제인 거지요.”

“그럴 듯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믿기지가 않아. 엑스칼리버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내 기억? 그렇다면 내가 천화운 시절의 기억을 갖고 환생한 건 엑스칼리버 탓인가? 아니면 그 검을 얻게 된 기점으로 그보다 이전 생들은 기억을 되찾지 못하게 되었다는 건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워졌다. 그가 엑스칼리버와 처음 연을 맺은 건 천화운 시절부터였다. 그 당시엔 천룡파마신검이라는 형태를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검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던 건 아니었다.

대체 멀린은 뭘 알고 있으며, 뭘 말하고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차지하자, 자연스럽게 말투도 날카로워졌다.

“멀린 당신은 여전히 내게 숨기는 게 많은 것 같군. 그래서 믿을 수가 없어. 신용이 안 가.”

“뭐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직접 듣게 되니 가슴이 아프군요.”

멀린은 과장된 표정으로 말하지만, 조금도 가슴 아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난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는 게 어떨까? 이제 시간이 없어. 조만간 놈들이 당도하겠지. 그리고 그랜드 크로스도 이제 곧 시작될 거고.”

더 늦기 전에 털어놓으라는 듯 추궁하는 그 시선에 멀린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던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영언이 갑작스레 그들에게 와 닿는 것이 아닌가!

[멀린의 말은 전부 사실이지요. 그러니 너무 의심할 필요 없어요.]

“여신 루네리아?”

유태진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여신의 모습이 뚜렷히 자리하고 있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윤재민의 몸을 빌려서야 겨우 강림했던 그녀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루네리아가 말했다.

[강림 자체가 불가능했던 건 아니에요. 단지 간섭력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제했을 뿐이죠.]

“그 말은··· 재민이가 아니더라도 강림은 가능했다는 겁니까?”

솔직히 말해 유태진은 그녀에게 약간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윤재민의 몸에 강림함으로서 결과적으로 희생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강림한 덕분에 살아남은 입장에서 그 점을 탓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원망의 감정이 남아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렇지요.]

“그럼 왜 제 동생이 희생된 겁니까? 당신 스스로 강림이 가능했다면 대체 왜?”

조금씩 거칠어지는 음성. 그런 유태진의 모습을 바라보는 루네리아의 안색은 더없이 어두웠다. 그 일에 대해선 그녀도 상당히 자책감을 갖고 있어서였다.

[당시엔 저도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제가 가진 간섭력은 무한한 게 아니죠. 극히 한정적이에요. 그리고 그 간섭력은 곧 이루어질 엑스칼리버의 부활을 위해 쓰여야 했고요.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봐야 의미 없겠지만··· 그의 희생에 대해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유태진은 분노보다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경지에 이른 그도 서서히 체감하고 있지만, 초월자는 결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필멸자보다 더 나아간 영격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볼 때는 전지전능한 것 같아도, 그들은 무수한 제약으로 구속된 존재들. 제아무리 필멸자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아낀다 하더라도 직접 손을 쓸 수 있는 영역은 한정되기 마련이었다.

‘결국 그 녀석이 희생을 자처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건가.’

아직 채 원망이 가신 건 아니지만, 그녀를 노골적으로 미워하긴 어려웠다. 이젠 유태진도 어느 정도는 그녀의 입장과 사정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그녀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유태진은 그런 자신의 감정이 이해되질 않았다.

그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휴··· 알겠습니다. 스스로 희생을 자처한 제 동생도 여신께서 자책하는 걸 바라진 않겠지요. 본래 그런 녀석이었으니까요.”

[예, 작은 원망조차 없더군요. 그래서 저도 더 안타까웠고요. 그래서 어떻게든 그에게 보상을 해줄 생각이에요.]

“보상?”

[그가 앞으로 윤회전생을 거치며 어떤 형태로 태어나든 저의 가호가 항상 따라다닐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요. 그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입니다.]

각오마저 서린 그 대답에 유태진도 꽤 크게 놀랐다. 멀린도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냥 평범한 초월자도 아니고 무려 상위신 중에 상위신이라는 여신 루네리아가 직접 내리는 가호였다. 그 정도면 앞으로 윤재민이 어떤 윤회전생을 거치든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 한 번의 삶도 아니고 그가 겪을 모든 윤회전생에 대해 가호를 내리는 것은 루네리에게도 큰 부담일 테지만, 그녀의 결심은 단단히 굳어진 상태였다. 그만큼 그의 희생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유태진은 그녀를 향해 솔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동생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그 녀석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여신의 은혜에 크게 감격했을 겁니다.”

[아니에요.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어요. 감사받을 일은 아니죠. 오히려 제가 미안하네요.]

감사인사를 받은 루네리아가 볼을 붉히며 쑥스러운 듯 화답했다. 그런 여신답지 않은 모습에 유태진은 약간이나마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전부 감당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렇고 시간이 됐군요. 서둘러야겠어요. 이제 때가 왔군요.]

“예.”

여신의 그 말에 유태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계의 거대한 운행과 흐름이 서서히 변하고 있음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랜드 크로스. 이제 기다리던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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