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22화 (423/448)

17권-22화

“그래봐야 내가 가진 기억은 바로 이전 생 뿐이다. 윤회전생의 모든 기억들을 갖는 건 불가능하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태진은 자신이 어째서 천화운 시절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난 것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자신이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생사경의 깨달음을 얻은 것 때문이거나 아니면 다른 요소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그럼 그룬베일의 화신, 그러니까 태무환이란 사람은 스승님의 원수이자 숙적이었던 셈이군요.”

“그래, 정말 질긴 악연이지. 하필이면 이번 생에서까지 내 적으로 나타날 줄이야.”

유태진은 쓰게 웃으며 운명의 아이러니함을 절감했다.

가장 보고 싶지 않던 원수이자 숙적. 하필이면 그가 그룬베일의 화신으로 다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번 싸움은 지구를 지켜내느냐 못하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엑스칼리버를 부활시키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지.”

“엑스칼리버?”

“그건 뭐죠?”

레이첸과 아리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들로서는 엑스칼리버가 무엇인지 들은 바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지구 출신인 엘레나와 마틴은 달랐다. 지구인이라면 아서왕의 전설쯤은 한번 쯤 들어본 이야기가 아니던가.

“아니, 엑스칼리버라면 아서왕의 성검 아닌가요?”

“엑스칼리버가 진짜로 실존했다는 겁니까?”

놀라 묻는 그 말에 유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아서왕의 전설은 사실이고, 엑스칼리버도 실제로 존재했었지. 그 내용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많이 다르지만 말이야.”

그때부터 유태진은 자신이 듣고 보게 된 아서왕의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고, 과거 어떤 싸움을 했는지를.

인베이더의 수좌인 그룬베일이 지구를 노리는 이유를 설명하였으며, 엑스칼리버가 어떤 과정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도 설명하였다.

“아서 왕의 전설에 그런 비사가 숨어 있을 줄이야.”

“그냥 전해 내려온 전설이 아니었던 거네요.”

마틴과 엘레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런 거대한 스케일의 사건이 지구에서도 벌어졌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인베이더가 지구를 노리는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 터라 더욱 비장해졌다.

여기에 유태진이 덧붙여 말했다.

“그래, 그 전설에도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거지. 그런데 그건 알고 있나? 너희들이 알고 있는 멀린이 바로 그 전설 속의 멀린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 말이다.”

“멀린이?”

“천외오천의 멀린이 그 멀린이라고요?”

그 둘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대체 몇 번이나 놀라는 건지··· 이번에는 멀린이라니.

설마 천외오천의 멀린이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멀린이었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진지하지 못하고, 언제나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던 그가 그 유명한 킹메이커 대마법사라니. 내심 기가 막혔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지?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놈은 이미 수천 년을 살아온 반인반마지. 지금까지 그룬베일과 인베이더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암약을 해왔다. 정체를 숨기고 지구 출신의 소환자인 것처럼 행동한 것도 그런 일환 중 하나였고.”

“정말 어메이징하네요.”

엘레나는 이젠 더 놀랄 기운조차 없다는 듯 그렇게 내뱉었다. 그가 전설상의 인물과 동일한 사람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매치가 맞지 않았지만, 유태진이 저렇게 공언하는 것을 보면 사실일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흉험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너희들의 솜씨를 한 차례 점검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유태진은 그들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함 내에는 오버러들이 대련할 수 있는 장소도 여럿 마련해두고 있었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보도록 하지. 다들 전력을 다할 준비는 됐나?”

“전력을 다하라고요? 여기서?”

“아저씨, 무슨 생각이야? 우리가 전력을 다하면 전함이 박살난다고.”

아리엔과 레이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인피니티 킹덤이 견고한 준대형 전함이라 해도 한계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대련실도 나름대로 오버러들의 영능에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긴 하지만, 그랜드 급 강자들의 힘까지 견디기에는 한참 모자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부터 이곳은 외부와 완벽히 격리될 테니까.”

유태진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기이한 위화감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를 둘러싼 공간을 타고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이질적인 감각에 잠시 움찔한 그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뱉었다.

“이건 그냥 결계가 아니야.”

“설마 공간절리?”

그랬다. 지금 이 순간 대련실은 인피니티 킹덤과 완전히 다른 이계가 되어 있었다. 대련실이라는 공간 자체를 박리함으로서 본래 존재했던 공간과 별개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아무리 큰 충격이 가해진다 해도 이것이 전함에 미칠 것은 없다.

“와, 미치겠네. 공간절리를 이렇게 간단하게 펼친다고? 아저씨 무공이 주력 아니었어?”

레이첸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지만, 유태진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이래뵈도 난 준신의 격마저 넘어섰다. 이 정도 재주쯤은 이젠 간단하지.”

“···그랬었지. 하급신이라니 진짜 믿기지가 않네.”

아직 완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유태진은 이미 하급신의 경지에 한 발짝 들어선 상황. 일정 범위의 공간을 절리해서 충격이 다른 공간에 미치지 않도록 하는 술수 따윈 아주 간단한 재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시작을 알리는 나직한 말과 함께 모두의 얼굴 위로 긴장이 달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하급신이나 다름없는 초월자였다. 서투른 마음으로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그는 무공을 사사한 스승이기까지 했다. 그들에 대해 속속 알고 있는 만큼, 전력을 다하지 않고선 잠시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쿠구구구!

무시무시한 기세가 들끓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아리엔을 비롯한 제자들이 모든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랜드 급에 올라선 두 사람에 마이스터 급에 도달하거나 그에 준하는 수준의 실력자가 그들의 힘은 가히 놀라웠다.

아마 이 대련실의 공간이 절리되지 않았더라면 이 기세만으로도 대련실은 반파되어 있었으리라.

그리고 시작되었다. 유태진을 둘러싼 제자들과의 싸움이.

쾅! 콰아앙!

굉음이 대련실 공간을 뒤흔들었다.

싸움은 그 시작부터 격렬하기 짝이 없었다. 전력을 다 끌어올린 레이첸의 발걸음은 놀랍게도 내딛는 진각만으로 공간진동을 일으켜 유태진을 노렸지만, 그는 가볍게 일보를 내딛음으로서 공간진동을 상쇄시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리엔의 손을 떠난 한 자루 검이 어검술의 묘리에 따라 빛보다 빠른 속도로 뻗어나갔지만, 그마저도 금세 간파당해 유태진의 왼손이 펼친 장세에 걸려들어 튕겨나갔다.

“치잇! 이래도 안 통한다고?”

레이첸은 입술을 깨물었다. 혹독한 수련과 실전을 거치며 나름 강해졌다고 자부했지만, 이마저도 유태진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통할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상대는 진정한 초월자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필멸자의 공세 따위가 그에게 먹힐 리가 있는가.

하지만 그렇다 쳐도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제자들을 상대했다. 애당초 그가 봐주지 않았다면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큭!”

분광십팔검의 묘리에 따라 수십 가닥의 빛살이 되어 날아가던 이기어검의 튕겨나가고, 그 사이로 유태진의 검세가 밀려들었다.

아리엔은 어떻게든 검을 회수해 이를 막아내긴 했지만, 검을 타고 흘러드는 후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진기를 끌어올려 막아내긴 했지만, 내부가 흔들려 진기의 흐름이 정체될 지경이었다.

그런 아리엔의 엘레나가 메웠다. 그녀는 자신의 영능으로 즉시 활과 화살을 구현하더니 정확히 아홉 발의 화살을 쏘아내었다.

관양궁의 구화전뢰(九火箭雷)였다.

예전이라면 그저 아홉 발의 연사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마이스터 급에 올라선 엘레나의 화살은 거대한 용음을 동반한 강기의 포화로 승화되었다.

그렇지만 유태진 앞에선 그 모든 절기가 무의미했다. 그가 가볍게 휘저은 오른손을 따라 이해할 수 없는 흐름이 생성되더니, 구화전뢰 그 자체를 흩어낸 것이다.

유능제강의 이치. 유태진은 구화전뢰에 실린 힘의 방향성 자체를 뒤틈으로서 공세를 무산시켜버렸던 거였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무(武)의 격차가 실감되었다.

지금까지 유태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절학을 사용한 적이 없다. 단지 자신의 손짓 발짓에 쾌, 중 강, 유, 환 등 무학의 무리만을 담아 펼쳤을 뿐, 제대로 된 초식은 구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자들을 확실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특히 마틴과 클레브는 싸움에 제대로 끼지 조차 못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노력해 초절정과 마이스터 초입이란 높은 경지에 올라섰지만, 아리엔 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근접전을 특기로 삼고 있던 터라 오히려 끼어들었다면 싸움에 방해만 되었을 것이다.

“젠장, 강해졌다고 자신했는데, 이렇게 무력할 수가.”

“···감히 우리가 낄 싸움이 아니라는 거겠지.”

격렬하기까지 한 대련은 무려 1시간 이상을 지속하고서야 마무리 되었다. 물론 유태진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싸움을 끝낼 수 있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련이었다. 제자들의 실력을 파악하고, 그들의 경지를 다듬기 위해서는 단번에 끝내선 안 되었다.

“후우, 정말이지··· 스승님은 못 당하겠네요.”

아리엔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이첸도 기진맥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엘레나는 후방에서 원거리 공격을 주력으로 사용한 터라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지만, 지치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대련일 뿐이지만, 사실상 실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워낙 격의 차이가 큰 만큼 유태진 나름대로 손속에 사정을 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가볍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들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단지 치명적인 부상만 없을 뿐이다.

“실력은 잘 봤다. 그동안 정말 많이 노력한 모양이더군.”

“그래도 많이 부족해요. 더··· 더 강해져야지요.”

아직도 유태진은 의욕을 보이는 아리엔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재라고 불렸던 전생 시절의 나도 너희 나이 땐 그만한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다. 너무 성급해하면 오히려 정체되기 마련이니, 차분하게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게 좋을 거다.”

“예.”

아리엔을 다독인 유태진을 향해 이번에는 레이첸이 물음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아저씨. 이번에 승산은 있어?”

“승산?”

“그룬베일의 화신이라며. 며칠 전에 꽤나 엉망으로 당해 도망쳐 온 모양인데 말이야. 엑스칼리버라는 것만 부활하면 정말 이길 순 있는 거지?”

불퉁한 목소리였지만, 유태진은 그 목소리에 담긴 불안감을 읽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이첸은 유태진에게 가르침을 받고, 가문의 혈통과 계약된 마왕 카르테인에게 더욱 큰 조력을 받으면서 그랜드 급을 넘어섰다.

이젠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아버지와 동등한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앞날은 위태로웠다.

심지어 그런 레이첸을 가볍게 농락할 정도로 가지고 논 유태진조차 그룬베일의 화신을 잠시도 감당할 수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그가 불안해하는 것도 이상한 알은 아니었다.

“완성만 된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믿는다. 엑스칼리버는 놈에게 극상성인 무기. 그리고 내 역량은 그 옛적의 아서를 훨씬 넘어서고 있지. 게다가 아군의 전력도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고.”

“음.”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승산이 보였다. 상위신 이상이라는 그룬베일의 존재 때문에 위축되었었는데, 그래도 대적할 방법이 있다면 희망이 있었다.

어느 정도 사정을 파악했다는 듯 아리엔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뗐다.

“그럼 우리가 승리하기 위한 가장 우선되는 선결문제는 엑스칼리버가 부활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낸다는 게 전제 조건이겠군요.”

“그래, 그래서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한 거다. 그룬베일의 화신인 태무환은 인베이더의 함대와 함께 날아오고 있다. 그 전력도 만만찮지. 개중에는 그랜드 급이나 마이스터 급의 인베이들도 있을 것이고.”

유태진이 제자들의 실력을 점검한다는 핑계로 대련을 한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전투가 벌어지면 자신은 어디까지나 태무환 하나에 집중해야 할 터.

결국 인베이더의 대군을 상대하는 건 결국 제자들과 함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들의 실력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려줄 생각이었다.

#42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