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21화
“그래서 한 달 뒤라는 건가?”
“예, 그 이상은 앞당기는 게 불가능하거든요. 지금으로선···.”
멀린은 그답지 않게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유태진도 어쩔 수 없다는 그의 말을 전부 이해했다.
“그렇다면 태무환이 그 전까지 도착하지 않길 바라야 하나?”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꼭 그렇게 뜻대로만 돌아가라는 법이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만일 엑스칼리버가 부활하기 전에 태무환이 태양계에 당도하기라도 한다면 그건 치명적인 위기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 연합과 공화국의 전력으로는 태무환과 인베이더 함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겠지요. 엑스칼리버가 부활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 전까진 승산이 없다고 보면 될 겁니다.”
“결국 엑스칼리버의 부활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선제조건이라는 말이군.”
유태진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엑스칼리버가 제때 부활한다면 모르겠지만 태무환이 그보다 일찍 도착한기라도 한다면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그래도 지구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만큼 최악의 사태를 상정한 대비도 필요했다.
“어떻게든 서두르도록 해. 조금이라도 빨리 완성될 수 있도록 말이야.”
“최대한 노력해 보도록 하지요.”
멀린은 그렇게 답하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유태진이 이렇게 재촉하는 마음을 모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멀린을 뒤로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던 중 유태진은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바로 리스티가 드디어 침묵을 깨고 다시 외부로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리스티! 괜찮은 거냐?”
유태진이 그녀를 찾자마자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예, 며칠 혼자 지냈더니 한결 나아지더라고요. 이젠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리스티의 안색을 살피던 유태진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며칠 전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때는 쓰러지지 않을지 염려될 만큼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저씨, 그보다는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서두르다니 뭘?”
갑자기 던져진 그 말에 유태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막 방안을 벗어난 녀석이 뭘 서두르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바로 그룬베일에 관한 대비책이죠. 이대로는 승산이 높지 않다는 건 아저씨도 잘 알죠?”
“그래.”
“게다가 아저씨의 엑스칼리버는 부서졌어요. 상대가 그룬베일 본신이 아닌 화신이라 해도 그 검 없이는 승산이 없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유태진은 좀 전에 멀린이 이야기해줬던 사실을 리스티에게 털어놓았다. 앞으로 엑스칼리버를 부활시킬 예정이며, 거기에 어떤 난관이 존재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러자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리스티가 곧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제가 시간 벌기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떻게?”
“요 며칠 간 저 혼자 질질 짜고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리스티는 무려 일주일이란 시간을 아마페레오스 안에서 보냈다. 그 중 4일은 조나단이 아마페레오스에 남긴 수많은 정보와 연구 성과들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데에 투자되었고, 나머지 3일은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를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개량할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물론 그 원리와 구조를 드래곤들에게 전해 듣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에 관한 방대한 분석 데이터는 이미 아마페레오스 안에 기록되어 있었던 터라 연구하는 데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리스티이기에 가능한 말이다. 제아무리 정밀한 분석 데이터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 술식의 구조나 원리를 유추하고 해석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게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와 같이 드래곤들조차 까마득한 세월을 거쳐 다듬어온 고도의 술식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마페레오스의 통제 인공지능인 알렉시안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조나단을 보조해 연구를 해온 경험도 적지 않은데다, 초월신함의 인공지능인 만큼 기존의 인공지능을 월등히 뛰어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는 낱낱이 분석되었다. 그리고 그 원리와 구조를 활용해 새로운 방식으로 개량할 수 있었다.
“노··· 놀랍군. 놀라워. 고작 일주일 만에 이 정도까지 개량했다고?”
카르세인 스타네바나스의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스티는 이것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드래곤의 독자적인 권능만을 리소스로 삼는다는 부분을 개량해서 보편성을 확대시켰다.
이로서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는 지성체라면 다들 갖고 있는 영력과 의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떤 구성원이든 받아들일 수 있게 됨으로서 가히 무한한 확장성과 범용성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그 자를 막긴 어렵죠. 지구를 보호해가면서 시간을 벌려면 몇 가지가 더 필요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리스티는 자신이 구상한 바를 설명했다.
그것은 바로 통합출력공명시스템 아르마다-라비린토스 필드(차원영겁회랑)와 카르세인 스타나 바나스의 결합이었다.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는 놀라온 공능을 갖고 있지만, 이건 대상이 되는 상위 초월자를 공략하기 위한 것이다. 거점 방어에는 별달리 도움이 되지 않는 만큼, 지구를 수비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개량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대규모 설비가 요구되었다.
“확실히 획기적이긴 하지만 그러자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유태진이 그 점을 지적하자, 리스티는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저씨가 나가 있는 동안 태양계 전체에 라비린토스의 코어 모듈을 설치해 놨어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마련한 방어시스템인데, 저희 함대와도 충분히 연동할 수 있도록 해놨으니 그걸 조금만 뜯어고치면 충분할 걸요.”
“언제 그런 걸?”
리스티와 유태진이 함께 개발한 라비린토스는 그 공능을 이미 라인트라 대전에서 검증된 바 있었다.
만일 태양계 전체를 보호할 수 있도록 전개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루크아딘 덕분이에요. 지구의 전함을 생산하면서도 어느 정도 생산 라인에 여유가 있었거든요. 그걸로 찍어낸 뒤 태양계 곳곳에 설치했죠.”
전장만 무려 54.9km에 이르는 다목적 공업함 [루크아딘]. 그 생산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사실 지구의 전체 생산력보다 루크아딘의 생산력이 더 높을 정도였다.
물론 지구의 기술력도 급격히 높아지면서 많이 따라붙긴 했지만, 아직도 루크아딘의 생산량을 쫓아올 정도는 못되었다.
“좋아, 그럼 결정됐군. 오늘부터 라비린토스 개량에 들어간다. 맡겨도 되겠지?”
“예.”
더 이상 흔들림 없는 리스티의 모습에 유태진은 믿고 맡기기로 했다. 조나단이 죽고 없는 이상 그녀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 다음은 제자 녀석들이군.’
유태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리스티와 일별한 유태진은 아리엔과 엘레나 등 자신의 제자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태무환과 싸우다 죽은 윤재민과 조나단의 뒷수습과 수련 때문에 그동안 그들을 신경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군.’
유태진은 한눈에 제자들의 성취를 파악했다. 비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룬 상태였다.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경지가 높았던 아리엔과 레이첸은 이미 그랜드 급을 넘어섰다. 천외오천과 동등한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물론 그랜드 급에서도 격차가 있는 만큼 그들과 완전히 동등하다 하긴 어렵겠지만, 그랜드 급이라는 전력은 무시할 바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엘레나와 클레브는 무려 마이스터 급에 올라섰다. 그 중에서도 엘레나는 중급 이상이었다. 그가 지구를 떠나 있던 몇 개월 동안 제자들은 말 그대로 피나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불가능한 성취였다.
‘다들 멀린의 가상현실 속에서 살다시피 했던 모양이야.’
그런 이들에게 자극이라도 받은 듯, 다른 이들의 성취도 만만치 않았다. 유태진의 제자는 아니지만 무공의 일부를 사사 받은 마틴도 어느새 초절정에 접어들었다. 이제 어딜 가도 강자로 대접받을만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처음 아르탈 행성으로 소환되었을 적에 유태진에게 시비를 걸던 한량 시절과 비교하면 가히 천지개벽할만한 변화였다.
그런 제자들과 일행들을 하나하나 응시한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희도 알겠지만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 이 태양계 근처에서 그룬베일의 화신이 이끄는 인베이더 함대와 총력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각오를 해 두도록 해. 지금까지와의 전투와는 차원이 다를 테니까.”
“예.”
다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익히 아는 사실이었고, 나름 각오도 되어 있었다. 특히 지구 출신인 엘레나나 마틴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때, 아리엔이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져왔다.
“그런데 스승님. 그룬베일의 화신하고 아시는 사이셨어요?”
그런 물음이 어째서 나왔는지 유태진은 금세 알아챘다. 지구에서 벌어질 격전을 위해 넘겨준 그룬베일의 전투 데이터 때문이었다. 그 내용 중에 태무환이 유태진에게 아는 척 했던 장면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래, 아는 사이였지.”
그의 무거운 표정에 제자들도 섣불리 묻지 못했다. 하지만 유태진은 이미 자신의 비밀을 밝힐 각오가 되어 있었다.
“딱히 그룬베일에 대해 알고 있던 건 아니다. 단지 녀석이 인간의 형태로 인간세상에 화신해 있었던 당시 인연이 있었을 뿐이니까. 놈이 그룬베일의 화신이라는 사실은 지난 번 전투 때 알게 된 사실이고.”
“대체 어디서 그 자와···.”
의문을 꺼내는 엘레나의 모습에, 유태진은 죄다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전생이다.”
“저··· 전생이요?”
“그래. 전생. 나는 전생의 기억을 갖고 태어난 몸이다. 유태진이기에 앞서, 전생 시절에는 천룡검신 천화운이라 불렸지.”
생각지도 못한 그 말에 모두가 깜작 놀랐지만, 유태진은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자신이 전생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그리고 그 죽음 이후 다시 현대의 지구에서 태어났으며, 이진운이란 이름으로 자라왔음도 말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네요. 윤회전생의 기억을 갖고 계셨다니.”
아리엔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유태진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의문들이 해소됨을 느꼈다. 지구에서 막 소환되었을 뿐인 그가 어째서 그렇게 강할 수 있었는지, 어째서 영능이 사라진 지구 출신인 그가 무공이란 영능학을 알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전생에 체득했던 무공은 사라졌지만, 그에 대한 깨달음은 여전히 이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