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20화
* * *
지구권은 말 그대로 초비상이 걸렸다. 얼마 전 당도한 공화국과 연합 함대가 전해온 소식 때문이었다.
지구가 인베이더의 침략 가시권에 든 이상 언제든 공격당할 수 있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 설마 그룬베일이 직접 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경우는 전혀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위신이라니···”
지구연방 수상 메켈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상위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인지 인피니티 킹덤을 통해 다양하게 전해 받았었다.
그들의 힘은 행성을 창조하고 부수며, 경우에 따라선 은하계마저 뒤흔든다. 아마 창조주가 만든 섭리의 제약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가히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며 우주를 좌지우지 했을 것이다.
아니 섭리의 제약을 받고 있는 지금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 단적인 증거가 바로 인베이더였다.
헌데 인베이더의 수좌라 할 수 있는 작자가 지구로 직접 침공해 오고 있다?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동안 인베이더의 침공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오긴 했지만, 상위신 같은 논외의 존재를 상정한 준비는 아니었다. 지구의 함대와 병력 따윈 그 앞에선 말 그대로 먼지만도 못할 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본신이 아닌 화신을 통한 강림인 탓에 상위신으로 격하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별 위안이 되지 않을 만큼 큰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베네트 국장은 이렇게 일축했다.
“상위신에 대해선 지구연방 측에서 신경 쓸 것 없소. 지금까지 해온 그대로 하면 될 거요.”
“그게 무슨 말이오?”
“그룬베일의 화신을 상대하는 건 우리 쪽이 맡을 테니까. 당신들은 지금까지 해온 대로 대응준비를 하면 된다는 말이오.”
이를 듣고 난 메켈린 수상이 기가 막힌 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그 괴물 같은 초월자가 지구로 날아오고 있는데도 우린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만 있으라는 거요?”
“애당초 지구연방에서 초월자를 감당할 능력이나 있소? 이건 당신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보고 내린 판단이오.”
“······.”
냉정하다 못해 냉담한 눈으로 바라보는 베네트 국장의 모습에 메켈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처럼 지구연방은 초월자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아니, 통상적인 인베이더 함대가 들이닥친다 해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인데, 그룬베일 같은 고위 신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베네트 국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의 지원으로 지구연방의 전력이 크게 신장되긴 했지만, 그래봐야 인베이더의 통상 함대를 간신히 방어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지. 그런 전력으론 초월자와의 싸움에 아무런 도움도 못 된다는 걸 아시오.”
“···무슨 소린지는 알겠소. 하지만 정작 우리의 일인데 그냥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어도 되는 거요?”
지구의 방위임무는 애당초 지구연방의 존재의의나 다름없었다. 인베이더들이 그룬베일의 화신을 앞세워 쳐들어오는데도 수수방관하라고 하니, 메켈린 수상으로서도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상대가 못 된다는 걸 아는데 괜한 희생을 치를 필요가 있소? 그러니 지구연방은 지구로 침입하려는 인베이더에 관해서만 신경 쓰는 게 나을 거요. 그룬베일의 화신은 우리가 상대하지. 태양계 안에 진입하기 전에 그 자를 상대할 예정이니, 우리가 패하지 않는 한 지구인들은 무사할 거요. 그러니 지구인들에게 그룬베일의 화신에 대한 이야기는 숨기는 게 좋겠지. 괜히 알려봐야 큰 혼란만 빚어질 테니까. 그래도 만일을 위해 초월자 대응 매뉴얼을 주겠소. 별반 위안도 안 되겠지만 그걸로 참고하면 될 거요.”
베네트 국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룬베일에 관련된 내용을 전부 비밀에 붙이라고 강조했다. 공화국과 연합의 오버러들도 그룬베일 때문에 사기가 떨어져 위축된 상황인데, 지구인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패닉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컸다.
잠시 뒤 메켈린 수상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만일 당신들이 패한다면 어찌 되는 거요?”
“···아마도 그땐 끝장이겠지. 그러지 않기를 기도하시오.”
베네트 국장도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 * *
공화국과 연합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양계를 방어하기 위한 시설을 건조하고 함대를 각 주역에 포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인피니티 킹덤이 지구연방을 지원하기 위해 세운, 상당한 규모의 생산 설비시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공화국과 연합은 태양계 방어체계를 완성하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미 상당 부분을 리스티가 완성한터라, 조금만 손을 보면 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공화국과 연합 수뇌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유태진은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보냈다. 조나단의 부고 소식을 전해들은 리스티가 아마페레오스 안에 처박혀 나오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인공지능 알렉시안을 통해 혼자 있고 싶다는 말만 전해 받았다.
그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윤재민이 죽음에 대한 문제도 그랬다. 보육원의 원장님과 아이들에게도 이 부고를 전해야 했는데,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결국 지구를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유태진이 찾아왔다는 말에 환히 반기던 그들도 곧 그가 전한 부고 소식에 다들 넋 나간 얼굴이 되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재민이 형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다고!”
“형, 지금 농담하는 거지? 그렇지?”
다들 현실을 부정하거나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윤재민은 그들에게 있어 언제나 함께 할 것 같은 친혈육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성직자로서 보여준 능력은 너무도 대단해서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유태진은 괴롭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나도 이런 말 하긴 괴롭지만, 전부 사실이다. 재민이는 나를, 그리고 모두를 구하기 위해 죽었어.”
그리고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룬베일에 대한 내용은 지구인에게 밝힐 수 없는 기밀에 해당되었지만, 윤재민의 죽음을 설명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설명한 이후 따로 함구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설명을 끝마친 유태진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부족해서. 그 녀석이 죽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윤재민의 죽음에 망연자실해서였다.
잠시 뒤, 간신히 충격을 떨쳐낸 보육원장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참기 어려운 슬픔이 어려 있었다.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너도 재민이가 죽는 걸 그냥 가만히 지켜볼 녀석은 아니잖니.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건 재민이도 바라지 않을 게야.”
“원장님···.”
저도 모르게 목이 메어 그렇게 되뇌었다.
* * *
그 이후 유태진은 보육원 가족들과 함께 간략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하겠다는 공화국과 연합, 그리고 지구연방의 고위층 인사들이 꽤 많았지만, 유태진은 전부 거절하였다.
가족들끼리 조용히 치르고 싶어서였다. 물론 보육원 식구가 아니면서도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사람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엘레나와 아리엔, 레이첸 같이 유태진과 밀접한 몇몇 소수의 사람들과 그의 친 할아버지인 유문택 회장이었다.
조문을 마친 유문택 회장은 상주 노릇을 하는 유태진에게 다가와 위로하였다.
“많이 힘들겠구나.”
“···할아버지.”
“살다 보면 많을 일을 겪게 되지. 가까운 사람이 예기치 못한 일로 죽는 경우도 적지 않거든. 언제나 함께 할 것 같던 사람이 그렇게 죽고 나면 정말 슬프고 허망하더구나. 세상이 끝장나는 느낌이었지.”
유문택 회장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건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기도 했다. 유태진의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당시, 그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은 막대한 부도, 권력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마 손자인 유태진이 무사히 살아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삶의 의욕조차 잃고 죽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 한다. 견디기 힘들더라도 버텨. 너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이 있잖니. 그들을 위해서라도 힘 내거라.”
“예.”
할아버지의 말 대로였다. 그에게는 아직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윤재민의 죽음은 가슴 아프고 괴로웠지만, 여기에 매몰되어 주저앉기에는 어깨에 지워진 짐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조촐히 치러진 장례가 마무리 되었다. 유태진은 보육원 식구들과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우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멀린을 찾았다.
“멀린, 엑스칼리버는 언제 다시 부활시킬 수 있지?”
단도직입적인 그 말에, 멀린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앞으로 한 달 뒤입니다.”
“한 달 뒤라고? 어째서!”
한 달 뒤라면 그룬베일과 인베이더의 함대가 태양계로 접근할 시기였다. 자칫 잘못하면 엑스칼리버가 부활하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들이닥칠 수도 있었다.
“굳이 한 달이란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유태진이 묻자, 멀린은 평소와 달리 진지한 얼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태진 씨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엑스칼리버를 부활시키는 방법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습니다. 지구의 사상과 의념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예전과 같이 성계신 정도의 신적 존재의 도움이 없어서?”
“예, 그렇습니다. 루네리아 여신께서 적극 도와주시기로 하셨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그분은 성계신과 달리 섭리의 제약을 받는 터라 온전한 힘을 발휘하시지도 못하는 처지인데다가 얼마 전 그룬베일의 화신을 막느라 상당한 간섭력을 소모하셨지요. 그 때문에 우리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그래서 한 달이란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고 말이지요.”
“으음.”
아서의 기억을 엿본 유태진은 그 말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엑스칼리버가 만들어질 당시, 성계신은 실로 막대한 권능을 불어넣었다. 성계신이 자신의 행성에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거의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타 행성의 성계신인 루네리아가 지구에서 그만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건 지극히 무리였다.
게다가 얼마 전 태무환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기까지 했으니, 그녀에게 남은 여력이 부족하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주의 운행마저 이용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의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우주의 운행을?”
“예, 아시다시피 은하계도 끝없이 순환하고 있지요. 저 하늘의 수많은 별들도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멀린의 시선이 문득 저 먼 우주공간을 향했다. 거기에는 수많은 별자리들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 은하계의 성계들 중 많은 성계들이 서로 교차하는 일직선상에 놓일 겁니다. 그리고 지구도 그런 위치에 놓이는 성계 중 하나가 되지요. 전 그걸 이용할 겁니다.”
“···그랜드 크로스(Grand Cross).”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은 유태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본디 지구의 점성학에서 언급되는 그랜드 크로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의 네 개 행성이 서로 90도 간격으로 배열되는 형태를 말한다.
하지만 이건 그런 차원의 그랜드 크로스가 아니었다. 무려 은하계 규모의 그랜드 크로스인 것이다.
그 정도로 거대한 그랜드 크로스라면··· 멀린의 말처럼 우주의 운행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힘을 치환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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