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18화 (419/448)

17권-18화

그래서 뭔가 더 확실한 안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멀린은 그에 대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건 아직 밝힐 수 없죠. 하지만 엑스칼리버가 다시 부활할 때가 되면 저절로 아시게 될 겁니다.”

‘엑스칼리버 부활 외에 또 다른 뭔가를 준비했다는 건가?’

정보누설을 우려해서 비밀에 붙이는 건 알겠지만, 대체 무얼 준비했기에 이토록 숨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겠군.”

현재 유태진의 경지는 하급신의 단계에 한 발 걸친 수준. 이것을 온전한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했다.

‘과연 가능할까?’

어느 정도 깨달음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무(武)에 대한 깨달음은 충분히 하급신에 준했지만, 진정으로 하급신의 경지에 올라서려면 권능을 각성해야 했다.

권능이란 초월자이자 신으로서의 능력을 자각하는 것.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들을 바탕으로 완성하는 신성의 증명이기도 했다.

흔히 물의 신이라거나 불의 신이라 불리는 그런 이명들이 바로 그들이 가진 권능을 의미하고 있었다.

일찍 깨닫는 자들은 반신이나 준신 때 이미 권능을 자각하기도 했지만, 간혹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권능의 격이 높을수록 각성이 늦다고 했지?’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각성을 억지로 앞당길 수 있는 것도 아닌 이상 별반 달라질 것은 없었다.

현재 워프 항행 중인 공화국과 연합 함대는 앞으로 이틀 뒤 지구의 태양계에 도착하게 된다. 유태진은 그때까지 어떻게든 내면을 관조하면서 완성하지 못한 경지를 다지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든 닿아야 해. 녀석들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는 각오를 다지면서 자신의 숙소에 틀어박혔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금까지 배우고 습득했으며, 쌓아온 경험 등을 다시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다.

* * *

그룬베일의 화신인 태무환에게 입은 피해 덕분에 연합과 공화국 함대는 침체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수뇌부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대로 낙담한 채 있을 순 없었다.

태무환과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서전일 뿐이다. 여기서 기가 꺾여 절망한다면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지구에서는 아무것도 못해보고 무너지게 될 터였다.

특히 이곳에 온 아르탈 행성 연합 함대의 최고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베네트 국장은 틀어진 계획과 현재의 침체된 분위기 때문에 고심에 잠겨야 했다.

“정말이지 이건 예상에도 없던 손실이군. 완전히 허를 찔렸어. 설마 차원단층 지역에서 급습을 당할 줄은···.”

예정대로였다면 그들이 그룬베일과 싸우게 될 장소는 지구의 태양계 인근이 되었을 것이다. 워프 항법으로 그들을 앞질러 간 후 태양계 근처에서 만반이 준비를 갖춘 다음에 최종 격전을 치를 생각이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예기치 못하게 맞붙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건 우리의 실책이었습니다. 워프 항행이 불가능한 그 자의 입장에서는 차원단층 주역에서의 급습은 충분히 노려볼 수 있는 계책이었으니 말입니다.”

“지나간 일을 더 언급해봐야 뭐하겠소. 앞으로가 더 문제지.”

동감한다는 듯 화답하는 베이노아 수상 말에 베네트 국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내뱉었다.

“그렇군요. 지금까지 우리가 준비한 모든 전력은 그룬베일의 화신 앞에서는 무용지물. 그나마 먹힌 건 드래곤들의 결계법진인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 정도지만, 그것도 제대로 통했다고 보긴 어렵고···. 휴, 정말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랬다. 그들이 가진 모든 전력은 상위신 앞에선 무엇 하나 통하지 않았다. 나름 비장의 수라 여겨졌던 전력인 드래곤들조차 무력하기만 했다.

애당초 전함을 비롯한 통상 전력이 상위신에게 먹힐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단지 이것은 그룬베일이 거느리고 있는 함대나 다른 병력을 상대하기 위한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룬베일의 화신 하나를 상대하지 못하는 순간, 그들이 보유한 모든 막강한 전력이 의미를 잃었다. 이번 싸움만 봐도 그랬다. 인베이더의 함대는 나서지도 않았는데, 그룬베일의 화신 혼자 나선 것만으로도 이쪽은 반쯤 초토화 되지 않았던가.

이래서는 최소한의 싸움조차 성립되지 않는다. 상위신과 대등하게 맞붙는 수준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싸움다운 싸움을 할 수 있는 수단이나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걸 사용 했어야 했나?’

베네트 국장의 뇌리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비장의 수단 하나가 떠올랐지만, 그는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건 어디까지나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야 할 것이었다. 차원단층 주역에서처럼 제대로 된 싸움조차 성립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모하기에는 적절치가 못했다.

물론 사용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내놨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단 한번뿐인 결정적인 패를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놈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때 사용해야 할 것이야. 함부로 소모할 순 없지. 단 한번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베네트 국장은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에 생각이 미쳤다. 기대했던 것에는 못 미쳤다 할지라도 그나마 그룬베일의 화신에게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인 것은 그것뿐이었다.

특히 유태진이 그 결계법진의 리소스를 장악하면서 보인 능력은 가히 놀라웠다. 반신 수준이었던 그의 역량이 크게 상승하면서 그룬베일의 강력한 한수를 감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결과는 참패로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상위신 사이에 존재하는 까마득한 격차를 생각한다면 유의미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베네트 국장이 의견을 물었다.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의 규모를 키우는 건 어떻소?”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베이노아 수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의미를 듣자마자 이해해서였다.

“어차피 우리가 싸울 격전지는 지구 인근의 태양계요. 그렇다면 거기에 우리가 싸우기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건 당연하잖소. 애당초 그럴 계획이었고.”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로 기존의 계획을 대체하자는 거군요.”

“그렇소이다. 지금으로선 그 수밖에 없어 보이오.”

베이노아 수상은 잠시 생각해 봤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현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는 그냥 의례결계법진이 아닙니다. 드래곤들이 공통적으로 보유한 드래곤 하트에, 용언의 권능을 동조시켜서 구축하는 결계법진이지요. 드래곤들의 수가 더 늘어나지 않는 이상 규모를 키우는 건 어려울 겁니다.”

“음.”

지금 상황에서 드래곤들의 수를 증원한다는 건 어려웠다. 연합과 공화국에 소속된 에인션트 드래곤들의 수도 한정되어 있지만, 그들 모두가 협조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곳에 온 드래곤들은 그나마 자신들의 뜻에 찬동하는 자들이기에 희생을 감수하면서 여기까지 와 준 것일 뿐. 다른 드래곤들을 더 참여시킨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베네트 국장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의 드래곤들이 진의 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알겠소. 하지만 이를 대신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게 정말입니까?”

놀라서 되묻는 베이노아 수상에게, 베네트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나단이 살아 있었다면 곧바로 방법을 강구해줬을 테지만, 이미 없는 사람에게 기대할 순 없는 일이지. 하지만 지금 현재 지구에는 그의 여동생인 리스티 프론사이드가 머물고 있소. 그와 동등한 수준의 천재라던 그 아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믿소.”

“음, 확실히···.”

베이노아 수상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은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조나단과 맞먹는 명성에, 지금까지 수많은 기술과 개념들을 창안해낸 희대의 천재.

그것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조나단은 초월신함이라는 믿기지 않는 결과물까지 내놨다. 그 정도라면 리스티의 능력도 기대해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좀 더 서둘러야겠군요. 어떻게든 더 빨리 지구에 도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아무리 리스티가 대단한 천재라 하더라도 그만한 결계법진을 새로운 형태로 개조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도 서둘러 지구에 도착할 필요가 있었다.

“함선에 다소 무리가 오긴 하겠지만 감수해야겠지.”

그때부터 함대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웜 홀 내를 이동하는 워프 항법 상태에서 정해진 안전기준보다 더 가속하는 행위는 전함의 수명을 크게 단축시킬 수도 있는 행위였지만, 지금은 그런 사정을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공화국과 연합 함대는 무려 일주일이란 시간을 추가로 더 벌게 되었다. 본래라면 그룬베일과 인베이더의 함대가 지구에 당도하기까지 예측시일이 앞으로 한달이었다면, 지금은 한 달 하고도 일주일로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함 내로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함대 총사령부에서 안내해 드립니다. 현재 본 함대는 곧 목적 예정지였던 지구권 태양계의 경계주역에 당도하게 됩니다.]

자신의 숙소에서 스스로를 관조 중이던 유태진은 조용히 두 눈을 떴다.

“도착했나.”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무거웠다. 지난 이틀 동안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며 지난 깨달음과 인생을 돌아보았지만, 권능의 자각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아서였다.

그나마 성과가 있었다면 자신이 그동안 쌓은 무(武)에 대한 고찰이 경지를 완숙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였다. 안 그래도 급작스럽게 준신을 넘어 하급신의 경지에 발을 걸친 상태였는데, 그걸 좀 더 공고히 다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유태진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성과가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것도 문제였지만, 곧 만나게 될 리스티의 얼굴을 어찌 봐야할지도 막막했다.

대체 뭐라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조나단의 죽음을 그녀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 *

지구의 태양계에 당도한 공화국 함대와 연합 함대는 미리 연락을 받고 나와 있던 인피니티 킹덤과 곧바로 랑데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태진은 자신의 함대원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리스티를 비롯해서 지금까지 그와 함께 해온 일행들은 무사히 돌아온 유태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저씨, 오래간만이네요.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먼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 오는 리스티의 모습에 유태진은 일순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입을 열었다.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게 나도 안타깝긴 하지만, 일단 듣고 있어라.”

“무슨 이야기인데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리스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유태진이 무겁고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유태진은 천천히 조나단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네 오빠인 조나단은 죽었다. 지구에 오는 도중 그룬베일의 습격 때문이었지.

생각지도 못한 부고 소식에 리스티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졌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표정이었다.

“···지금 농담이죠?”

그녀는 경직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억지웃음이었다.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구분 못할 리가 없었다. 지금 유태진이 하는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상대의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는 천재인 그녀였다.

그래서인지 되묻고 있는 그녀의 안색도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조나단은 그룬베일의 습격에 대응해 막아서다가 영성을 불태웠지. 그 결과 녀석은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

리스티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리엔을 비롯한 일행들도 그런 충격적인 사실에 죄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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