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17화 (418/448)

17권-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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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과 윤재민의 희생으로 무사히 차원단층주역을 이탈한 연합과 공화국 함대는 참담하다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상상할 수 없는 참패였다.

그룬베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신격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본신도 아니고 화신에 불과한 존재에게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을 줄이야.

특히 이들의 가장 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라는 비장의 한 수를 믿고 나섰던 그들은 반절에 가까운 동족들의 죽음에 기세가 꺾인 상황이었다.

물론 에인션트 드래곤들은 반신의 격을 얻은 존재들인 만큼 언젠가 다시 부활할 테지만, 그건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수십 수백 년 이후일 것이며 더 이상 물질계에 간섭도 못하는 처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태진에게는 그런 전력적 손실보다는 윤재민과 조나단의 희생이 더 크게 다가왔다.

“···결국 막지 못했어. 그 녀석들이 희생을 자처해 나섰는데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유태진.”

옆에 있던 연정운이 씁쓸한 표정으로 유태진을 바라보았다. 그도 옆에서 그 상황을 목격했었기에 유태진이 느끼고 있는 자책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그룬베일의 화신이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로 끝난 것도 운이 좋은 편이었어.”

연정운은 위로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가 괴로워하는 건 나름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상대가 좋지 않았다. 상위신 급의 괴물을 상대로 고작 이 정도 손실이면 사실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번 전투로 희생된 자들은 그 둘이 아니라도 꽤 많았어.”

이번 전투로 희생된 자들은 그 외에도 꽤 많았다. 드래곤들과 조나단, 윤재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그렇지, 싸우는 도중 발생한 여파에 휩쓸려 침몰한 전함들도 상당했던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언제까지 그 둘의 죽음에만 매몰되어 있을 순 없었다.

하지만··· 유태진에게 있어 그들의 죽음은 결코 같지 않았다.

“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거. 하지만 이건 그냥 죽음이 아니야. 녀석은 자신이 쌓아온 업을 불태웠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너도 알잖아.”

“······.”

“재민이는 언제든 초월자가 될 수 있는 업을 완성한 녀석이었어. 그런 녀석이 초월자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하고 만 거야. 이젠 돌이킬 수도 없어! 다시 환생한다 해도 이미 한번 불태운 업은 절대 회복되질 않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쌓아 올려야 하지. 이 무능한 형 때문에!”

그랬다. 그냥 평범한 죽음이었다면 유태진도 이렇게까지 자책하고 괴로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의 죽음은 경우가 전혀 달랐다.

윤회전생을 통해 쌓아온 업을 전부 불태움으로서 완전히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오랜 노력으로 쌓아 이룬 재능은 물론, 조나단이 가졌던 독보적인 천재성까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었으니까.

이건 일반적인 죽음보다 더한 경우였다.

하지만 업과 영성을 불태운 정도가 아니었다면 그룬베일을 저지할만한 저력을 발휘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화국과 연합 함대는 그 자리에서 전멸했을 테지.

그렇기에 유태진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희생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앞으로 그 녀석이 다시 그만한 업을 쌓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수십 아니 수백만 년? 나는 짐작조차 안가! 녀석은 그런 측량할 수 없는 가치의 업을 고작 우리를 살려 보내기 위해 소모하고 만 거야. 정말로 허무하기도 하지.”

그들의 희생으로 지구가 완전히 구원되었다면 그래도 그 희생은 좀 더 가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유태진도 그들의 희생을 조금은 납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룬베일의 화신인 태무환은 여전히 건재했고, 지금도 시시각각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 희생을 치르고도 단지 자신들의 죽음이 조금 더 유예되었을 뿐, 그 무엇도 해결된 것이 없이 멸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용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조나단의 죽음을 그 녀석에게 뭐라 전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조나단은 리스티가 의지하고 있는 유일한 친혈육이었다. 가문과 연을 끊다시피 한 그녀에게 있어 오빠인 조나단은 유일무이한 가족인 것이다.

헌데 그런 녀석이 모두를 구하기 위해 영성을 불태우고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대체 뭐라고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유태진은 아마페레오스로 건너가 메인 브릿지를 살폈지만, 조나단의 시신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태무환의 진 무형검을 막기 위해 영성을 불태웠던 그의 육체는 이미 가루가 되어 소멸한지 오래였던 것이다.

현재 아마페레오스는 자체적인 인공지능 시스템에 의해 자동항행 중이었다. 인공지능 시스템 알렉시안은 조나단이 다음 주인으로 리스티를 지정했다고 했으며, 그녀 외에 다른 주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즉 조나단이 가진 모든 유산을 상속한다는 뜻이었다.

유태진은 허무한 얼굴로 다시 되돌아왔다. 모두를 위해 희생하고도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은 두 사람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더 괴로운 건 함대의 어느 누구도 그들 둘의 죽음을 추모할 심적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희생을 애도하긴 했지만, 대부분 형식적인 정도에서 그쳤다. 장차 그룬베일의 화신을 감당할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에 꽉 찬 상황에서 다른 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함대의 수뇌들은 얼마 전 전투 데이터를 기반으로 대책 마련에 급급했고, 승무원들은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이미 삶을 체념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유태진은 멀린을 찾아갔다. 지난번에 태무환의 공격을 막기 위해 나타난 이후로 그는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리고 추궁하듯 물었다.

“멀린, 당신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지?”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어깨를 으쓱하며 시치미를 떼는 그 모습에 유태진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이미 다 알고 있어! 당신이 그냥 지구 출신의 소환자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아서 왕의 신하이자 대마법사였던 멀린이란 것도!”

“음··· 하긴 엑스칼리버까지 갖고 계셨으니 몰랐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어째서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뭘 꾸미는 거냐?”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원탁의 기사들과 달리 멀린은 무려 천오백년 이상의 세월 동안을 죽지 않고 살아온 작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랜슬롯도 그가 아발론을 방문해 주기적인 소식을 전해줬다는 사실을 언급했었다. 그런 멀린이 그 긴 세월을 아무 의미도 없이 보낼 리가 없었다.

결국 마냥 입을 다물 순 없었던지 멀린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천오백년 전 그룬베일의 침공을 격퇴했던 이후, 그가 재침공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유니버셜 테라 코어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랜슬롯에게 어느 정도 들으셨을 테지만, 저희는 아르탈 행성 연합을 세우고 그날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 준비라는 게 뭐지?”

“예전이라면 그룬베일이 알게 될 것을 우려해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이라면 상관없겠군요.”

유태진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챘다. 이젠 반쯤 하급신의 경지에 올라서면서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상위신 이상의 존재인 그룬베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도 멀린은 그런 전지에 가까운 능력을 우려한 것이리라.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군. 아카식 레코드에 정보가 새겨질 것을 우려한 건가. 그런데 지금은 왜 상관없다는 거지?”

“그룬베일의 화신이 이미 알아챘으니까요.”

“뭐?”

생각지도 못한 그 말에 유태진이 놀라 바라봤지만, 멀린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도 저희 계획의 전말을 다 아는 건 아니고 그저 예측한 정도일 뿐이니 계획 자체가 의미 없어지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일단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 남아 있는 여유는 계획이 들통 난 사람이 보일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들통 난 것 이상의 뭔가가 더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 들통 났다는 그 계획이란 게 뭐지?”

“엑스칼리버의 부활입니다.”

“음.”

유태진도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엑스칼리버는 인베이더의 신좌들을 제약하기 위해 오랜 세월 의례법진의 중심축 역할을 하면서 점차 쇠해갔다.

그러니 멀린도 다시 무기로 사용할 수 없게 된 엑스칼리버를 어떻게든 복원시켜야 한다는 데에 결론이 닿은 게 틀림없었다. 예전이든 지금이든 창세성검의 파편으로 완성된 엑스칼리버만이 신좌들을 상대할 수 있는 극상성의 무기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지구의 성계신께서도 소멸하신 상황인데 어떻게?”

엑스칼리버의 핵심은 창세성검의 파편이긴 하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지구인들의 사상과 염을 불러 모와 이를 검의 형태로 다시 빚어내려면 최소한 상위신 급의 권능이 필요했다.

하지만 성계신이 다시 부활하려면 아직도 아득히 먼 시간이 흘러야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에 대해선 루네리아 여신께서 대신 나서주기로 하셨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겠지요.”

“음, 그렇다면 확실히···.”

루네리아는 상위신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해당하는 우주의 대신격이다. 그녀라면 성계신을 대신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미진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이유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냥 엑스칼리버의 부활이 전부라면 예전의 반복이 될 수밖에 없어. 지금의 태무환은 그룬베일의 본신보다 못하다지만, 놈은 무인이지. 권능과 달리 무공은 엑스칼리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힘이야. 그에 대해선 어떤 대책이 있는 거지?”

1500년 전 당시에 비한다면 이쪽의 전력이 전반적으로 크게 상승한 상태지만, 사실 세세하게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루네리아가 그들에게 협조적이긴 하나, 그녀는 지구의 성계신이 아니었다. 홈 그라운드가 아닌 이상 섭리의 제약 탓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니, 1500년 전의 성계신과 같은 조력을 바랄 순 없었다.

물론 지금의 유태진은 1500년 전의 아서보다 더 강했지만 그래봐야 아직 온전한 초월자도 아니다. 하급신에 간신히 한 발짝 걸친 게 전부였다.

그 정도로는 엑스칼리버를 손에 쥔다 하더라도 역량 차이를 커버하기 어렵다.

‘하필이면 태무환이라니. 무공을 사용하는 상대가 아니었다면, 아니 적어도 태무환만 아니더라도 조금은 승산이 있었을 텐데···.’

태무환과 유태진의 전생인 천화운은 중원 시절에 수차례 맞부딪쳐 싸운 경험이 있었다. 덕분에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아는 처지다 보니, 이렇게까지 역량 차이가 나다 보면 허점을 그대로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생소한 상황이었다면, 어떻게든 초전에 전력을 다해 몰아붙여서 허를 찌르기라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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