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16화
그렇지만 아직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그룬베일의 화신인 태무환을 없애지 않는 한 위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확인시켜주듯 그의 입에서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걸로 끝날 거라 생각진 마라. 어차피 이건 서전일 뿐. 진짜 싸움은 지구에 도착한 이후가 되겠지.]
루네리아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이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이번 위기는 어찌어찌 극복했다고 해도 진짜 넘어야 할 고비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당신은 이제 리타이어 신세군.]
태무환의 말처럼 루네리아는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몸을 빌어 강림한다는 편법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뿐. 아니, 애당초 윤재민이 아니었다면 강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윤재민의 몸은 서서히 붕괴하고 있는 상태. 그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당신 말대로 나는 더 싸울 수 없겠죠. 하지만 지구로 떠난 이들이 어떻게든 당신을 막을 겁니다.]
루네리아는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지 않고 말하면서, 지구로 향한 이들이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을 천명했다. 그러자 태무환의 눈매가 흥미롭다는 듯 변했다.
[꽤나 확신어린 말투군.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나?]
[······.]
루네리아는 그 이상은 내뱉지 않았다. 더 말해봐야 자신들이 준비해온 안배에 대한 단서만 줄 뿐이었다.
그렇지만 뒤이은 태무환의 말은 그녀로 하여금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역시 입을 다무는군. 뭐 대강 짐작은 가. 1500년 전 우릴 좌절시켰던 엑스칼리버의 부활을 꾀하고 있겠지?]
[그럴 리가. 설마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를?]
[모를 거라 생각했나?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금방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이지. 아카식 레코드 쪽은 당신이 철저히 틀어막았더군.]
정곡을 찔린 듯 입을 다무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태무환은 피식 웃고 말았다.
현재 돌아가는 정황과,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승산을 점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그 뿐이기 때문이다.
엑스칼리버는 인베이더에 속한 이들의 유일한 상극. 그게 아니고선 그룬베일을 비롯한 신좌들을 감당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하나 쓸데없는 짓이다. 내 본신이야 어쨌든 나는 권능에 의존하지 않아. 설령 엑스칼리버가 다시 부활한다 해도 그 당시처럼 전력이 크게 격감되는 일도 없겠지.]
이에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루네리아는 그 말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방금 전 직접 손속을 겨뤄봤기에 알 수 있었다.
권능을 제외하더라도 그룬베일의 전력은 충분히 상위신 수준. 설령 엑스칼리버가 부활한다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에 덧붙여진 태무환의 말은 루네리아로 하여금 깜짝 놀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내 본신인 그룬베일의 목적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천화운과의 재전이다. 엑스칼리버의 부활유무 따윈 내 관심사 밖이지.]
[뭐라고요?]
너무도 뜻밖의 사실에 잠시 당황했지만, 루네리아는 곧 그 이유를 알아챘다.
[역시 당신은 본신인 그룬베일과는 전혀 다른 존재군요.]
정작 태무환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셈이지. 내 본신은 어디까지나 그룬베일이지만, 나는 독립된 자아를 가진 화신체. 내가 바라는 바는 본신과 전혀 다르니까.]
그 점에 대해선 나름 납득이 간다. 루네리아는 딱히 화신을 만들지 않았지만, 다른 신들이 화신을 운용하는 사례는 여럿 봐왔으니까.
다만 의문이 들었다. 그만한 주체성을 가진 화신이 어째서 그룬베일의 계획에 따라 순순히 움직이는지를.
그래서 물었다.
[그런 당신이 굳이 유니버셜 테라 코어를 노리는 이유는 뭔가요?]
[그야 내가 그룬베일의 화신이기 때문이지. 섭리의 제약 탓에 그룬베일도 내 행동방침에 대해 사사건건 일일이 간섭하는 건 어렵지만, 일단 본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목적 자체만큼은 변하지 않거든.]
[그렇군요.]
하긴 그룬베일도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화신을 강림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태무환의 저런 성향도 다 계산에 두고 유니버셜 테라 코어를 점령하라는 목적을 강제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룬베일 입장에서는 천화운의 환생인 유태진에게 강하게 집착하는 태무환이 맘에 들지 않겠지만, 상위신의 권능마저 봉인시키는 엑스칼리버의 위험성을 고려하면 그가 가장 최적의 인선이라 해야 할 것이다.
태무환은 권능에 의존하지 않고 무공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발휘하는 무인. 설령 엑스칼리버가 또다시 걸림돌이 된다 하더라도 전력의 하락폭이 가장 적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슬슬 끝날 때가 된 것 같군.]
[그렇군요.]
상대로부터 뜬금없이 던져진 말이었지만, 루네리아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무환의 말처럼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천화운, 아니 지금은 유태진이던가? 그 녀석을 반드시 내 손으로 쓰러뜨리고 지구를 점령할 거다. 그러니 당신은 성지 안에서 얌전히 구경이나 하고 있도록 해.]
육신이 붕괴하고 있는 그녀에게 태무환은 그런 말을 남기고는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이 주역을 벗어나 지구로 먼저 향한 공화국과 연합 함대의 뒤를 쫓아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워프항행이 봉쇄된 탓에 지구에 닿기까지 꽤 시간적 격차가 발생하겠지만, 어차피 지구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무슨 대비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결착을 낼 수 있을 터.
그때야말로 오랜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멀어지는 태무환과 인베이더의 함대를 향해 루네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사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가 차지한 육신의 주인인 윤재민의 행동이었다.
그의 시선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태무환을 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사라진 웜 홀 너머로 떠나버린 유태진과 함대가 있던 지점을 향해 있었다.
그때 루네리아의 영언이 죽어가는 윤재민에게 흘러들었다.
[···윤재민, 당신은 이걸로 만족하나요.]
‘예, 만족합니다. 이걸로 충분하군요.’
윤재민은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그렇게 대답했다. 오히려 그 목소리에는 안도감과 후련함마저 담겨 있었다.
루네리아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윤회전생의 도정을 반복하면서 쌓아온 업은 이걸로 전부 불타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죠. 그래도 후회 안 할 자신 있나요?]
‘물론입니다. 저 하나로 저 많은 이들이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요.’
[······.]
윤재민이 그녀를 강림시키기 위해 불태운 업은 보통의 업도 아니고 무려 완성에 다다른 업이었다.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초월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모든 지성체들의 윤회전생의 도정이 바로 이 초월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는 여정의 막바지에 도달한 시점에서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아낌없이 버려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윤회를 반복하는 끝없는 삶 속에서 윤재민이란 인생은 그야말로 찰나나 다름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잠시잠깐의 인연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면 놀랍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혼들의 목적은 윤회전생을 반복하며 초월자라는 완성된 격을 향해 정진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얼마나 까마득한 시간과 고난이 필요한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여신이시여. 당신이 아니었다면 오늘 저의 형과 동료들을 구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미안해요. 당신을 희생하게 만들어서.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는데······.]
루네리아는 이대로 모든 것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윤회전생을 거치게 될 윤재민에게 너무나도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더 괴로운 건 자신을 신으로 섬겨준 자임에도 불구하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윤재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선택이었습니다. 제 스스로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었죠. 여신께서 자책하실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신님 덕분에 전 먼 외딴 행성에 떨어져서도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었고, 지금도 망설임 없이 이 길을 걸을 수 있었지요. 당신의 자비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물론 윤재민이라고 해서 삶에 대한 미련이 아예 없을 순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친혈육이나 다름없는 유태진을, 그리고 나아가 지구에 살고 있는 보육원 동생들과 원장님, 그동안 함께 해온 동료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맞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형.’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웜 홀 너머로 떠나간 유태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쌓았던 지난 나날들을 기억했다.
무뚝뚝하고 속마음을 잘 내보이지 않는 형이었지만, 누구보다 자신과 동생들을 배려하고 베풀어 준 형이었다. 그렇기에 피를 나눈 형제처럼 믿을 수 있었고, 의지해왔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돕고 싶었다. 물론 윤회전생에서 쌓은 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가 어떤 건지는 자신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내버리더라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물론 내 희생만으로 지구가 구원된 건 아니야. 하지만 형이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는 유태진이 가진 경험과 능력을 믿었다. 지금 당장은 그룬베일의 화신에게 닿지 못했더라도, 이후에는 어떻게든 닿을 수 있는 영역까지 올라설 것이다.
게다가 여신께서도 이번 사태를 대비해 따로 안배한 것들이 있었다. 구체적인 것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와 함께 하면서 그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것까지 더해진다면 그룬베일의 화신이 제아무리 강력할지라도 승산이 아주 없지도 않으리라 짐작되었다.
그는 자아가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의식을 강하게 붙들었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영성과 업을 전부 소비한 대가로 이젠 이번 생을 마치고 다시 처음부터 머나먼 윤회전생의 도정에 올라야 할 때가···.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여신님 부디 저희 형을, 그리고 지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루네리아는 일순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많은 삶 중에서도 고작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인 단 한 번의 삶 속에서 맺은 인연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버린 그의 고결함은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그들의 안녕을 염려하다니.
그렇기에 그녀도 나름대로 각오를 담아 화답하였다.
[예, 당신이 바라는 그 희망. 당신의 여신으로서 반드시 이뤄주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윤회전생의 여정을 내가 보살피고 축복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그것으로 윤재민의 생명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그의 존재를 구성하던 육신은 어느새 먼지가 되어 우주 곳곳으로 흩어지고, 그의 육신에 강림했던 여신도 다시 본래 자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아르탈 행성의 성지에 기거하고 있는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곳을 향해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어요.]
루네리아는 자조하듯 말했다. 윤재민과 조나단의 희생은 그녀에게도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그녀라 하더라도 그룬베일 같은 거물이 개입된 일은 앞날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쌓은 통찰력 덕분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결국 사태는 가장 바라지 않던 대로 흘러가 버렸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더욱 안타까웠고, 미안했다.
[그렇기에 물러설 수 없게 되었군요.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길 겁니다.]
그녀는 결연한 목소리로 각오를 다지며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눈빛을 드러냈다. 이제 모든 것을 결정지을 마지막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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