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15화 (416/448)

17권-15화

“멸망이라···.”

이미 수차례 들어오긴 했지만 선뜻 실감이 나지 않는 단어였다. 우주는 여전히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고, 멸망이 가깝다는 말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좌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신이 공언한 이상 사실일 테니까.

‘어떻게든 막아야지.’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며 사람들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조나단도 우주의 멸망만큼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평소 여러 성계들이 인베이더에게 멸절되고 그 과정 중에 막대한 인명이 스러져도 딱히 관심두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 우주는 자신과 리스티가 살아온 곳이었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곳이었다. 우주라는 터전 자체가 없어지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여신의 요청에 응해 미완성 술식을 완성시키고, 아마페레오스를 움직여 우주공간을 헤매던 아문을 태워 아르센티아 주역으로 이끌었으며, 막강한 힘을 발휘해 공화국 함대를 위기로 몰아넣던 알카데인 황제를 물러나게 하는 데 큰 일조를 하였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그룬베일의 화신이 황제의 몸을 통해 강림하였다. 물론 여신의 공언했던 것처럼 그룬베일의 강림은 이미 진작부터 예정된 일이었지만, 그 권능과 힘은 조나단으로 하여금 극렬한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해낼 수 있을까?’

이제 남은 건 그룬베일의 목적이자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유니버셜 테라를 어떻게든 지켜내는 일 뿐이다.

현재 그룬베일의 화신이 대규모의 인베이더 함대와 함께 지구로 향하고 있는 상황이니, 어떻게든 앞서 도착해서 먼저 준비를 마쳐야 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발목을 잡혀버렸다. 워프 항행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라 할 수 있는 차원단층주역에서 하필이면 꼬리를 잡혀버린 것이다.

그룬베일과 그의 함대가 오랜 의례주법에 의한 제약으로 워프항행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너무 방심한 결과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룬베일··· 아니, 자신을 태무환으로 자칭한 화신은 상상 이상의 무력을 선보이며 모든 이들을 압도하였다. 에인션트 드래곤들이 구축한 비장의 진세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를 압도하는 것도 모자라 반신초월자들을 장난감처럼 휩쓸어버릴 정도였다.

그나마 유태진이 놀라우리만치 예상 밖의 활약을 해 보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참담한 패배로 이어지고 말았다.

애당초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제대로 된 하급신조차 이 자리에 없는 상황에서 상위신을 상대로 싸우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느덧 죽음의 발자국이 가까워졌다. 가진 패를 모두 사용한 지금, 더 이상 맞설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여신교단이 오랜 시간동안 마련한 안배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건 목적지인 지구에 당도한 이후에나 쓸모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 현재로선 아무런 쓸모조차 없는 셈이다.

“고작 이걸로 끝이라고?”

공포와 절망감보다는 외려 기가 막혔다. 그토록 노력하고 발버둥친 결과가 고작 이런 거라니. 어이가 없어서 잠시 동안 뇌가 정지한 듯 멍할 지경이었다.

허나 그때였다. 모두가 절망에 잠겨 죽음을 기다리던 그 순간,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이 이 자리에 임했다.

화아아악!

그것은 압도적이라 할 만큼 강대한 신성의 발현.

윤재민이라는 지구 출신 대신관의 몸을 빌어 빛과 생명의 여신 루네리아가 직접 강림한 것이다.

그리고 곧 여신 루네리아와 태무환은 격렬한 기세로 격돌하기 시작했다. 양측 모두 우주를 주름잡는 상위신격들 답게 부딪칠 때마다 시간과 공간이 이지러지면서 무시무시한 여파를 흩뿌렸다.

그리고 연합과 공화국 함대는 이 때를 틈타 전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윤재민이 벌어준 이 순간이 아니면 물러날 기회조차 없었다.

“···미쳤군.”

조나단은 윤재민의 상황을 보는 순간 알아채고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그는 확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초월자를 자신의 몸에 강림시킨다는 건 어지간한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함은 물론, 강림시킬 초월자의 격이 높을수록 그 대가는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오른다.

하물며 신들 중에서도 그 수가 많지 않다는 상위신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지금 윤재민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영성까지 불사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죽음보다 더한 대가를 서슴없이 치르며 희생한 윤재민의 모습에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죽음보다 더한 상황으로 자기 자신을 내던진 걸까?

애당초 무언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던 조나단으로선 그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도 루네리아와 태무환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움직임으로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상황.

그런데 사태가 점점 심상치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눈치 못 챘을지 몰라도 조나단의 눈에는 루네리아의 열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루네리아 본인도 잘 알고 있는지, 최대한 시간을 끌며 버티는 방식으로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아주 작은 빈틈만 드러나도 곧 뚫릴 듯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정확히 맞아들었다. 찰나 간에 드러난 작은 틈바구니를 노린 태무환의 일격이 루네리아를 지나치더니, 곧장 최대속도로 후퇴 중인 연합 함대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쿠구구구!

이전에도 선보인 바 있는 진 무형검의 일격이었다. 좀 전엔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의 공능을 등에 업은 유태진이 간신히 막아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어려웠다. 유태진이 무리를 해가면서 다시 강력한 검공을 펼쳤지만, 진 무형검의 기세가 조금 약해진 것이 성과의 전부.

이대로라면 에인션트 드래곤들도, 살아남은 반신초월자들을 비롯한 강자들도 막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

모두가 깊은 절망에서 허우적대던 그때, 조나단과 아마페레오스가 돌연 후퇴를 멈추고 진 무형검을 향해 움직였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그 스스로도 지금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애당초 조나단은 자기희생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서자인데다가 남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지성을 타고난 그는 오히려 이기적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딱히 남에게 피해를 끼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배려 해주거나 누군가를 위해 손해를 보지도 않았다.

헌데 그런 그가 저도 모르게 연합 함대의 후미를 향해 날아드는 태무환의 진 무형검 공격을 막기 위해 희생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우우우웅!

그는 자신의 영성을 불태워가며 아마페레오스의 출력을 극대화하였다. 평소에도 초월자에 준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아마페레오스였지만, 이와 같이 제어자의 영성을 불태울 경우 그런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가능했다.

바로 지금처럼!

끄그그긋!

시간과 공간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차원 그 자체가 왜곡되면서 비틀리고 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게 엇나가기 시작한 차원의 왜곡은 거대한 결계 형태로 퍼져나가더니 곧 진 무형검의 진로를 가로막아버렸다.

쿠구구구!

무시무시한 진 무형검의 일격이 차원결계 위로 내리꽂혔지만, 차원왜곡의 경면에 멈춰선 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클래스 마법으로 친다면 10클래스나 그 이상의 반열에 존재하는 최고위 마법. 설령 진 무형검이라 해도 이를 뚫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정신언령마법(精神言令魔法)

로이플 급. 엘 세인테이션(차원공간결계)

조나단이 [이스타니아]에서 배워온 정신언령마법은 상성 상 여타 마법보다 더 상위에 있으며, 그것이 로이플 급에 이르면 그와 비슷한 등급인 10클래스 마법마저 훨씬 웃돌게 된다.

진 무형검이 엘 세인테이션을 조금도 뚫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진 역량이 턱없이 부족한 나머지 발현조차 할 수 없었지만, 영성을 불태워 아마페레오스의 성능이 한계를 넘어선 지금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그걸 막아낸다고?]

허를 찌른 진 무형검의 공격이 성공인 줄 알았던 태무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이런 결과는 그에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 무형검을 무사히 막아내고 있다고 해서 조나단이 무사한 건 아니었다. 그는 지금도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었다.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이로군.”

조나단은 쓰게 웃으며 점점 흩어져가는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영성을 불태운 나머지 육체마저 소멸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이 희생을 자처해 가며 나서게 되었는지를.

그렇지만 해답은 금세 튀어나왔다. 리스티가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가게 될 우주가 이대로 멸망하게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였다.

애당초 타인 따윈 어찌 되든 그의 알바 아니다. 그의 관심사는 여동생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동등한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며, 서로의생각과 발상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혈육.

“···그랬군. 그래서였나?”

그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천재라 자처하던 자신이 스스로의 감정과 속마음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혀서였다.

자신이 유태진에게 동생의 안위를 부탁했을 때 이미 알아챘어야 했는데, 세상을 논리만으로 바라보다보니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게 문제였던 것이다.

“동생을 위해 희생한다니. 나도 보기보다 꽤 감상적인 녀석이었나···.”

그런 말을 푸념처럼 내뱉은 조나단은 점점 흐릿해져가는 시야로 전면을 응시했다.

이제 더 이상의 훼방은 없었다. 그룬베일의 화신이 펼친 진 무형검의 일격을 마지막으로, 이젠 연합 함대 전체가 워프 항행을 전개할 수 있는 영역에 접어든 것이다.

우우우웅!

함대의 전면에 변동중력원의 생성과 함께 곧 워프 항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화국과 연합 함대는 속속 웜 홀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리고 자동항행모드로 들어간 아마페레오스도 그와 마찬가지로 웜 홀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조나단은 더 이상 보지 못했다. 불태운 영성을 모두 소진한 그의 육신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설계하고 건조한 전함 아마페레오스의 함장석 안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 * *

[결국 놓쳤나.]

태무환은 짓씹듯 내뱉었다. 완벽히 전멸시킬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회심의 한수로 전개한 일격이 완벽히 가로막힐 줄은 정말 몰랐다.

안 그래도 초월격에 달하는 격을 지닌 전함의 존재가 거슬렸었는데, 그게 마지막까지 훼방을 놓을 줄 알았다면 최우선적으로 제거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자기희생적인 놈들이 꽤나 많군, 그래.]

그렇게 내뱉으면서 태무환은 여전히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루네리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금 그녀가 강림해 있는 육신의 주인도 바로 그런 사례 중 하나였다.

그 말이 꽤나 아프게 다가왔던지, 루네리아의 안색이 더없이 무거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나단과 윤재민이 영성을 불태우고 있는 결과가 차후에 어떻게 돌아올지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영멸에 가깝지. 지금까지 영겁에 가까운 세월동안 반복해온 윤회전생이 전부 물거품이 되었어. 그런 희생을 치러가면서까지 날 막고 싶었나?]

추궁하듯 던진 그 말에, 루네리아가 안색을 굳힌 채 반박했다.

[제가 강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선택한 숭고한 희생이지요. 그걸 누군가의 강요로 이뤄진 희생인 것처럼 폄하한다면 더는 참지 않을 겁니다.]

[참지 않겠다면 어쩌려고? 슬슬 그 몸도 한계가 온 것 같은데.]

[······.]

루네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윤재민의 몸을 빌어 강림했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더는 강림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윤재민이 바라는 대로, 저들을 무사히 후퇴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조나단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지구로 향한 함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전멸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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