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13화
잠시 생각을 정리한 조나단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냥 절 농락하기 위해 꺼낸 말씀은 아닌 듯 하니 경청하겠습니다.”
하지만 루네리아는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초월자인 그녀에게는 수많은 제약이 붙어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고, 필멸자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읽어 들여도 그것을 섣불리 발설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그 내용이 물질계의 운명과 인과율을 크게 좌우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단지 그녀는 조나단이 해 줘야 할 것이 있다고만 했다.
그동안 다가올 멸망을 대비하기 위해 꽤 많은 준비를 해 왔지만 아직 미완성인 상황. 이것을 제대로 완성하려면 조나단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조나단은 곧 멀린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직접 나설 수 없는 여신을 대신하여 멀린이 조나단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멀린은 그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여신에 우려하는 멸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하지만 정작 다 듣고 난 조나단은 심드렁해졌다.
“확실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까지 잘 버텨온 인베이더를 상대로 필요 이상으로 우려하는 것 아닙니까?”
그랬다. 인베이더를 상대로 지금까지 천년 이상을 버텨온 연합이었다. 그들의 위협은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건재해 왔다.
새삼스럽게 인베이더의 위험성을 언급해봐야, 그들로 인해 멸망이 초래될 거란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여신께서 우려하실 정도라면 이번만큼은 뭔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여신이 굳이 큰 리스크를 짊어져 가면서 진행하는 일인 이상 거짓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워낙 엄청난 이야기다 보니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납득되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당장 눈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 문제는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멀린, 당신의 정체는 뭡니까?”
“무슨 소립니까? 정체라니요. 제가 지구 출신인 건 잘 아실 텐데요.”
어깨를 으쓱하며 과장된 태도로 시치미를 떼는 멀린의 모습에, 조나단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더 모르겠다는 겁니다. 지구 출신의 소환자라. 불과 10년도 안 되서 그랜드 급을 훌쩍 넘어선 당신이 정말로 지구에서 온 소환자가 정말 맞는지 말입니다. 비상식에도 정도가 있지, 고작 몇 년 사이에 그랜드 급에 올라선다는 건 암만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일이지요.”
“저와 같은 성장세를 보인 인물이 저뿐만 아니라 넷이나 더 있는데도?”
멀린이 포함된 천외오천은 하나같이 비상식적인 성장세로 단기간에 절대강자가 된 것으로 유명해진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이 유독 멀린을 의심하는 건 그가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어떤 영능이든 경지를 넘어 그랜드 급에 이르기 위해선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난관들을 넘어서야 하지만, 마법은 그 중에서도 유독 더하지요. 일반적인 영능학은 어떤 기연이 닿는 경우 폭발적인 성장이 가능하지만, 마법은 그만한 성장을 하기 위해선 방대한 지식들이 밑바탕 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당신이란 존재는 그런 상식을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마법이란 학문을 대기만성형 영능학이라 부른다. 그만큼 경지가 오르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방대한 지식의 섭렵과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으로 무려 그랜드 급에 이르기까지 고작 10년이란 세월은 지나치게 짧았다. 깨달음 같은 건 제외한다 쳐도 그랜드 급에 상응하는 필요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였다.
“게다가 무엇을 보더라도 족족 이해해버려서 불세출의 천재라 불렸던 나조차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그랜드 급을 밟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영능에 대해 전혀 몰랐던 지구인이 10년 만에 그랜드 급에 이르기 위한 최소 요건의 지식량을 충족한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지요.”
자기 자랑 같지만 엄연한 사실이기도 했다. 천재들만 모였다는 프론사이드 가문에서조차 전무후무한 천재성을 타고났다고 알려진 조나단조차 성인이 다 되어가도록 그랜드 급을 넘어서지 못한 상황이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성인 이상의 지성을 갖추고 지금까지 수많은 지식을 섭렵해온 그의 사례를 생각하면, 불과 10년 만에 그랜드 급에 도달한 멀린의 경우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거야 제가 당신보다 더한 천재일 수도 있는 일 아닌가요?”
“당신이 정말 그런 천재였다면 여신께서 굳이 날 일부러 부르시지도 않았겠죠.”
멀린이 장난스럽게 그리 되물었지만, 조나단은 냉정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받아쳤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할 말이 궁색해진 것은 멀린이었다.
“하아, 하긴 그렇지요. 여신께서 당신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이니 말입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멀린은 조나단의 추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전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구 출신인 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면?”
“다시 소개하지요. 제 이름은 멀린 엠리스. 그 옛날 제노디안 님을 섬겼던 마법사라고 해야겠군요.”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조나단의 얼굴이 일순 경직되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멀린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 * *
멀린의 정체를 알게 된 조나단은 여신이 준비했다는 것의 실체를 목도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직접 볼 수 있는 건 극히 일부였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의례주법이군요. 이런 규모는 처음 봅니다. 설마 은하단 급의 의례주법을 보게 될 줄이야···.”
조나단도 꽤 많은 연구와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해 봤지만 이렇게 미친 규모의 의례법진은 처음 접해 보았다.
보통 거대 프로젝트라고 해 봐야 성계 급이 대부분이었다. 연합이나 공화국 같은 거대 세력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라 해도 은하 급이 고작인 상황이니···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알 수 있었다.
“무려 천년에 걸쳐 진행해온 초장기 프로젝트지요. 이 정도 규모는 당연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만한 게 여태껏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상태로 몰래 진행되어 올수 있었다는 게 더 충격이군요.”
그랬다 준비 시간이나 규모보다는, 이런 게 여태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공화국이나 제국, 그리고 인베이더들도 눈 먼 봉사가 아닐 텐데도, 용케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완성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에 사용된 술식들은 꽤 구식이군요. 규모에 비한다면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의례법진의 구성을 하나하나 확인한 조나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하단 규모의 의례주법의 술식 치고는 허술해 보여서였다.
그러자 멀린이 쓰게 웃으며 변명했다.
“이 프로젝트는 천년이나 진행되어 온 겁니다. 그간 영능학이 크게 발전되어 온 점을 생각하면 여기에 사용된 술식 일부가 다소 낡아도 어쩔 수가 없지요.”
“하긴···.”
조나단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려 천 년 전의 술식과 지금의 술식을 비교할 순 없는 일이다.
정작 문제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설계가 미완성이라는 점이었다.
술식 설계를 보면 연구는 지금까지 계속 해온 것 같은데, 아직 미진한 부분들이 곳곳에 보였다.
“날 부른 것도 이 때문이겠죠?”
“예, 맞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을 이 계획에 포함시키려 한 거죠.”
“음, 그렇다면···.”
그때부터 조나단은 여신교단이 준비해온 의례법진의 술식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일단 술식의 구조와 원리를 파악해야 연구가 덜 된 미진한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가 은하단 급의 의례법진을 전부 분석하기까지 고작 이틀이 걸렸다. 그 뒤부터는 미진한 부분들을 채워 넣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연구에 수많은 전문 인력을 수백 년 이상 투자해 왔던 멀린으로서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여신께서 어째서 당신을 추천한 건지 이제 좀 알 것 같군요.”
멀린조차 조나단의 천재성에 혀를 내둘렀다.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알고, 뭔가를 보면 그 안에 담긴 숨은 이치를 송두리째 파헤쳤다.
도저히 필멸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직관과 분석력이었다. 아니 어지간한 초월자들도 조나단의 천재성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나단조차 의례법진을 완전히 완성하지 못했다. 그 안에 존재하는 몇 가지 미지수 때문이었다.
“역시··· 여기까진 아직 닿을 수 없는 건가?”
“뭐가 문제인 거지요?”
그렇게 묻는 멀린의 말에, 조나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제가 아무리 천재라 해도 초월의 영역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서요. 거기에 대응하는 술식을 짜내는 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보다 영능학이 몇 차원 더 발전한다면 모를까, 지금 현재로서는 어려울 것 같군요.”
“그렇군요.”
슬슬 그랜드 급에 반 발짝 걸친 조나단이었지만, 초월자의 영역은 아직도 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이 어떠한 경지인지 추측조차 불가능한 지금은 그에 관련한 술식을 짜낸다는 건 어려웠다.
뭔가 참고할만한 거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현재 이 우주에서 그런 지식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가히 최첨단을 달리는 아르탈 행성 연합이 보유한 지식을 모두 섭렵한 조나단조차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물론 루네리아 여신이라면 능히 알고 있을 테지만, 섭리의 제약을 받고 있는 그녀가 알려 줄 수 있는 거였다면 굳이 조나단을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흐음···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라.”
이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멀린이 곧 입을 열었다.
“현재 수준으로 불가능하다면 그게 가능한 곳에서 배워 오면 되겠군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뜬금없는 그 말에 조나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가능한 곳에서 배워 온다니, 대체 어디서?
제국이나 공화국의 영능학 수준도 딱히 연합보다 나을 게 없고, 인베이더들이 가진 정보나 지식은 이쪽에서 어떻게 구해볼 수 있는 게 아닌데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멀린의 질문은 조나단을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조나단 씨. 유학을 가볼 생각 있습니까?”
“유···유학?”
그렇게 조나단의 타차원 유학행이 결정되었다. 설마 자신이 다른 차원으로 영능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가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물론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은 워프 등의 수단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를 위해선 여신 루네리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물론 섭리의 제약 탓에 물질계에 대한 간섭력이 빠듯하긴 했지만, 한 사람을 차원이동 시켜주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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