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11화
하지만 무공으로 맞서 대응하는 데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태무환이 다른 영능을 체득한 자라면 모르겠지만, 그는 오히려 루네리아보다 더 깊은 수준까지 무공을 깨우친 대종사였다.
오히려 그녀의 허점이 읽히면 읽혔지, 그녀가 태무환의 허를 간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수백여 합을 무리 없이 버틴 것은 루네리아가 공세보다는 수세에 치중했기 때문이었다.
‘제법이군. 상위신 씩이나 되면서 무예를 이만한 수준까지 체득했다니.’
태무환은 살짝 감탄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체득한 창술은 빠르고 강하긴 해도 무공으로 친다면 신공절학 수준에는 못 미쳤다.
중원 무학 중 최고봉이라 불리는 천마신공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천마신공은 극히 패도적인 절학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강함만 추구하는 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극패(極覇)와 극강(極强)을 중심으로 수많은 묘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단순히 강함만 추구해서는 신공절학이라 불릴 수 없을 터.
그리고 지금부터 그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건!?’
상대로부터 시작된 갑작스런 변화에 루네리아의 안색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룬베일의 화신은 직선적이고 강한 투로의 수법들을 사용해 왔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방어적으로 일관하며 그를 묶어둘 수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공세 패턴이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무공이란 단순히 지르고 내뻗고 때리거나 허초 등의 변화로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경지가 높아지면 기운 자체만으로도 허실을 낳고, 그것이 한층 더 높아지면 의념에 단계로 넘어간다. 흔히 마음이 가는 곳에 기운이 일고, 뜻이 있는 곳에 검이 닿는다는 이치가 바로 그러한 경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뛰어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바로 우주를 구성하는 이치인 인과와 섭리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단순히 쾌, 변, 강, 유 등으로 상대방의 시야와 감각을 속이는 수준을 넘어, 인과섭리에 닿는 형태로 변화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태무환의 손짓 하나하나에 시간과 공간이 어지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장법이 불현듯 공간을 뛰어넘는가 하면 권격이 시간과 시간 사이를 오가며 무한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건 일반적인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간과 공간, 과정과 결과를 뜻하는 인과율까지 변초로 삼는 이것은 단순히 허실을 간파하는 대응만으로는 막아낼 수가 없었다.
물론 까마득한 세월동안 온갖 수라장을 다 경험해보았던 루네리아도 결코 호락호락한 신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 처절하고 힘든 난관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를 수세에 몰리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단번에 고꾸라뜨리기에는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허나 태무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목적했던 바를 달성하기에는.
시간과 공간을 뒤헝클며 퍼부어지는 공격을 방어하던 그녀는 결국 빈틈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빈틈은 이 싸움의 승패를 좌우하기에는 너무도 작았지만, 정작 그녀가 공화국과 연합 함대가 워프 항행 가능 지점까지 후퇴할 시간을 번다는 목적을 상실하게 하기엔 충분했던 것이다.
[아··· 안 돼!]
루네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부르짖었다.
그녀가 상대의 공격을 막느라 정신없던 사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태무환이 저 후방을 향해 일격을 날린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분전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드는 치명적인 한수였다.
칠흑빛보다 더 짙은 어둠의 창! 태무환이 펼칠 수 있는 강력한 공격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진 무형검이었다.
루네리아는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고 싶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를 향해 더욱 집요할 정도로 퍼부어진 태무환의 맹공이 미처 손쓸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딜 신경 쓰고 있나? 네 상대는 나다! 그런 나약한 필멸자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텐데.]
사납게 몰아쳐오는 공세를 받아내면서 루네리아는 초조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그룬베일의 화신을 뿌리치고 아군의 함대를 구하러 가고 싶었지만, 집요하게 발목을 붙잡는 그를 떨쳐낼 방법이 없었다.
쿠구구구!
한편 정신없이 차원단층 주역으로부터 후퇴하던 연합 함대는 갑자기 후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혼비백산한 표정이 되었다.
함대가 점유하고 있는 우주공간을 고스란히 관통해오는 어둠의 창은 도저히 막거나 피할 도리가 없었다.
“이런 젠장!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끝장이군.]
[저걸 대체 무슨 수로 막아내란 거냐?]
분노와 절망에 찬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어둠의 창은 드래곤들이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를 구축한 상태에서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만일 유태진이 이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상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드래곤들의 전력도 절반으로 줄어든 데다, 유태진도 싸울만한 상태가 못 되었다. 물론 함대 전체의 힘을 동원한다면 그 화력은 실로 막대하겠지만, 태무환의 진 무형검은 단순히 출력의 규모만으로 맞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이치와 인과율이 필요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강자들 중 그럴만한 역량을 가진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멀린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평소의 능글맞던 표정마저 지운 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요.”
“어쩔 셈이지?”
유태진이 묻자 멀린이 대답했다.
“어떻게든 막아야지요. 우선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동안 대응책을 강구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이봐, 잠깐!?”
유태진이 만류할 새도 없이 멀린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자신의 석장을 높이 치켜드는 순간,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거대한 환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목도한 자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대체 뭐냐?”
[손이라고?]
그것은 거대한 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손 그림자가 나타나 태무환의 진 무형검을 움켜쥔 것이다.
그러자 날아들던 진 무형검의 속도가 일순간 정체되기 시작했다.
“크으··· 제가 붙잡아둘 수 있는 건 잠시 뿐입니다. 그러니 이 틈에!”
역시 부담이 큰 모양인지 멀린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심지어 선혈마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지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잠시 뿐이라니.
끼기기긱!
이를 증명하듯 멀린의 환상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의 환상은 역량을 한참 넘어선 힘을 갖고 있지만, 상위신이 전개한 공세를 받아낼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유태진은 이를 악물며 자세를 잡았다.
“어쩔 수 없지.”
함대가 슬슬 차원단층 주역의 끝자락에 다다르고 있었지만, 워프 항행이 시작되려면 이 주역을 완전히 벗어나야 했다. 그 전까지는 저 진 무형검으로부터 도망갈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우우우웅!
그가 뜻을 일으키자 기운이 동조하고, 곧 거대한 형태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우주를 환히 밝히는 빛의 거검.
조화무형오행검을 구현하면서 얻은 한 자락 깨달음 덕분에 이젠 카르세인 스테나바나스의 도움 없이도 온전한 무형검(無形劍)을 자력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형검을 구현한 것만으로도 신체가 붕괴할 듯한 고통이 닥쳐왔지만, 유태진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억누르며 자신이 전개할 수 있는 최대의 절기를 구사했다.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
제 8식. 천룡무상(天龍無上)
극의. 천룡무진광(天龍撫振光)
무형검에서 시작된 광채가 창세의 빛처럼 환하게 번져나간다. 하지만 찬란해 보이는 것과 달리 그것은 대상을 배제하는 빛이다. 유태진이 원하는 대상에 한해선 존재마저 소멸시키는 극의였다.
하지만 조나단의 아마페레오스가 창조했던 태양마저도 일거에 관통해 소멸시킨 위력을 가진 칠흑빛 창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감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으!”
아니나 다를까. 유태진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만큼 벅차단 뜻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천룡무진광의 빛과 맞닿은 칠흑빛 창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절망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그 광경에 환호했지만, 현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던 자들은 오히려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소용없어.”
“어째서!? 분명 효과가 있는데?”
“분명 효과야 있지. 하지만 칠흑빛 창이 가진 힘의 크기가 너무나도 크다는 게 문제야. 이런 식으로 상쇄시켜봐야 우리에게 닿기 전에 소멸되긴 글렀어.”
그랬다. 태무환의 진 무형검은 격에서는 물론 규모에서도 차이가 컸다. 루네리아의 발을 묶느라 이쪽을 거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데도 관성적으로 전진하고 있는 진 무형검의 위세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멀린이 일으킨 환상의 손이 이를 붙잡고, 유태진의 천룡무진광이 작열했는데도 그 힘은 크게 쇠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 비한다면 거의 삼분지 일의 힘이 격감하긴 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공화국과 연합 함대를 전멸시키기엔 충분하고도 넘쳤다.
‘고작 이렇게 끝나야 한다고? 재민이가 자신을 희생시켜가면서 우릴 후퇴시켜주는데도?’
유태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 심지어 이게 윤재민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나온 결과라는 게 더더욱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헌데 그때였다. 아마페레오스가 후방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함들은 차원단층 주역을 벗어나기 위해 전속력으로 후퇴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아마페레오스만 역주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갑작스런 이유모를 돌발행동에 아군이 일순 혼란에 빠졌다.
[어어!?]
[아··· 아마페레오스 돌연 적진을 향해 전진합니다.]
[어째서냐? 제멋대로 통제를 벗어나다니.]
아마페레오스가 아군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현재 함대 전력의 절반은 아마페레오스가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강력한 전력이 갑자기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당황해할 만도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조나단! 응답해라!”
아마페레오스와의 회선을 연 베네트 국장이 크게 외쳤다. 그러자 곧 조나단의 목소리가 통신망으로 흘러들었다.
[아무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저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저 뿐인 것 같군요.]
“무슨 소리를!? 너 지금 설마···!”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리스티를··· 그리고 이 우주를···.]
그 말을 남긴 조나단의 아마페레오스는 칠흑빛 창이 날아드는 지점을 향해 전진해나갔다. 이를 본 유태진은 그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영언을 터뜨렸다.
[조나단! 멈춰! 멈추라고!]
윤재민에 이어 이번에는 조나단마저 희생을 자처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조나단과 함께 한 시간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리스티의 오빠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를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그렇지만 저지하기엔 이미 늦었다. 아니, 데미지가 큰 상태로 천룡무진광까지 전개한 그의 상태로는 그의 희생을 막을 힘조차 없었다.
[···유태진 씨. 부디 제 동생 리스티를 부탁합니다.]
유태진에게만 전해진 작은 영언과 함께, 아마페레오스의 거대한 선체가 돌연 환한 빛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찬란하면서도 눈부신 그것은 강력한 영성을 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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