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10화
아문에게 이끌려 후퇴하고 있던 유태진도 그 사실을 눈치 챘다. 저만한 신격을 자신의 몸에 강림시키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심지어 속아서 그룬베일을 자신의 몸에 강림시킨 알카데인 황제조차 의식을 치르면서 가히 천문학적인 생명을 꺼뜨리지 않았던가.
“재민아, 안 돼!”
유태진이 크게 부르짖었지만, 그의 손은 저 먼 곳까지 닿지 못했다. 태무환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입은 데미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문이 붙잡아 저지하자 이를 뿌리치지도 못했다.
“죽고 싶은가? 지금 이대로 가면 말 그대로 개죽음일 뿐이네. 자네 아우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게!”
“하지만···!”
유태진은 이를 악물며 저 편을 응시했다.
윤재민을 중심으로 번져나가는 무시무시한 영기! 평소의 그를 연상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그가 손을 뻗을 때마다 눈부신 광채가 번져나가면서 태무환의 어둠을 짓눌렀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언은 그 하나하나 권능이 되어 상대의 공세를 상쇄했다.
그로인해 주변 일대는 말 그대로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마경이 되었다. 가공할 권능과 영력의 폭풍이 서로 격돌하기 시작하자, 이젠 반신초월자들조차 다가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몸 상태조차 멀쩡하지 못한 유태진이 되돌아가봐야 뭘 할 수 있겠는가.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던 녀석의 희생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 심정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문 경의 말이 옳다! 후퇴해야 할 때야.”
베네트 국장도 유태진을 만류하면서 후퇴를 서둘렀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등을 보이며 달아나야 한다는 사실이 자못 분했던지, 악문 이 사이로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유태진은 비로소 깨닫고 말았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예전 전생 시절처럼 이번에도 친인의 목숨을 포기한 채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도 절감했다.
그것을 그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잃어야 한다고? 바로 그때처럼?’
전생 시절의 기억이었지만, 아직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생생했다. 태무환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패했던 그는 결국 스승의 희생을 담보로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제자를 살리기 위해 진원은 물론 선천지기마저 불사르면서 혈세천마를 막아서던 스승의 뒷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전투를 이어나가던 윤재민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건 우연의 일치 같았지만, 유태진은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 도망쳐, 형.]
그의 뇌리로 작게 와 닿는 동생의 영언에, 유태진의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도 분하고 원통했다. 분명 그때보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여전히 약하고 무력했다. 스승이었던 태원진인께서 스스로를 희생하셨던 그 당시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대체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하는 거냐? 어디까지 강해져야 아무도 잃지 않을 수 있는 거지?’
가까웠던 이들을 잃는 건 이미 수없이 경험해 보았다. 정마대전 당시 죽어간 친인들은 셀 수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몇 번을 잃더라도 그 아픔과 상실감은 당최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해지고자 했다. 아무도 잃지 않고 끝낼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중원무림의 최고수가 되어 천마와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중원무림의 전설이었던 생사경을 넘어 이젠 진정한 신의 경지라는 하급신에 반 발짝 걸치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무력했던 것이다.
“서둘러!”
“즉시 차원단층 지역을 벗어난다. 벗어나는 즉시 워프를 시도해 지구로 직행하는 거다.”
다들 후퇴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태무환의 공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드래곤들과 반신초월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승산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물러나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한편 태무환은 루네리아의 적극적인 저지 앞에 가로막혔다. 그는 그녀를 제치고 나아가 유태진을 비롯한 강자들을 전멸시키고 싶었지만, 그녀를 좀체 뚫을 수가 없었다.
태무환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말 끈질기군. 끝까지 내 앞길을 막아서겠다는 거냐?]
윤재민의 몸에 강림한 루네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들은 이 우주에 남은 희망입니다. 당신이 꺼뜨리게 놔둘 순 없어요.]
결연한 표정으로 거대한 영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루네리아. 빛과 생명의 여신의 이명답게 그녀의 주변으로는 어마어마한 빛이 우주의 어둠을 사르고 있었다.
하지만 태무환은 차갑게 코웃음 치며 받아쳤다.
[전부 쓸데없는 짓이다, 루네리아. 저들을 살려 보낸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지구에 당도하는 순간 전부 죽은 목숨인데.]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저들은 그리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루네리아는 방어를 더욱 견고히 다졌다. 지금 그녀의 목적은 태무환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었다. 그가 공화국과 아르탈 연합 함대를 추격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길게 붙잡아 두는 게 우선이었던 것이다.
[음··· 그래, 천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으니 당신도 손 놓고 가만있지만은 않았겠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어떠한 계략이나 대비도 압도적인 힘 앞에선 전부 무의미하다는 걸 잘 알 텐데.]
그 말을 기점으로 태무환의 어둠이 크게 들끓기 시작했다. 격렬하면서도 거대한 칠흑빛 영기가 전에 없던 규모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루네리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현재 어렵서리 윤재민의 육신에 강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신의 힘을 다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전력을 다 발휘하기 위해선 막대한 간섭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그렇게 본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더라도 윤재민의 몸이 이를 버텨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우려가 그대로 전해진 건지, 윤재민의 의식이 자신의 뜻을 전해왔다.
<여신이시여. 저는 상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 하나의 희생으로 모두가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윤재민 당신은···.’
루네리아는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그의 태도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태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예견은 했지만, 그녀가 손써서 막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그가 바라는 바를 이뤄줄 뿐이다.
지금도 윤재민의 목숨은 불붙은 양초의 심지처럼 빠르게 타들어가고 있는 상황.
하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그렇기에 루네리아는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오른손 위로 빛이 맺히더니 어떤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빛을 조각해 만들어진 듯한 그것은 그녀만의 신기, 성황신창 [크로이엔]이었다.
그러자 태무환의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와 본격적으로 싸워 보겠다는 건가? 그만큼 대가가 클 텐데 말이야. 꽤나 안타까운 영혼이군. 시간만 주어진다면 능히 초월자가 될 수 있을만한 카르마가 이런 식으로 허비되다니 말이야.]
[···그렇기에 그의 결심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물러설 수 없는 거랍니다.]
루네리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세를 취한다. 그녀가 쥔 성황신창 크로이엔의 창끝은 정확히 태무환의 신핵을 겨누고 있었다.
그때부터 심상찮은 기세가 번져나간다. 일반적인 영능과는 느낌부터가 전혀 달랐다.
피부를 에는 듯 날카롭게 다가오는 정제된 무형의 기세. 이건 분명 무공에 근간을 둔 자들이 쏘아낸다는 무형지기 그 자체였다.
이를 느낀 태무환이 뜻밖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호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군. 잘난 루네리아 여신께서도 나름대로 무공에 조예가 있으신 모양이지?]
빛과 생명의 여신 루네리아가 무공을 사용한다는 건 전대미문의 이야기였다. 오래 전 그룬베일과 루네리아가 서로 격돌한 적은 있지만, 당시에도 무공을 사용하진 않았었다.
그녀의 신기는 어디까지나 권능을 다스리기 위한 상징적인 무기였을 뿐, 그것이 실제 무예를 위해 사용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루네리아가 화답했다.
[제노디안과 꽤 긴 세월을 함께 했었죠. 그런 제가 창술 하나 배우지 못했을 것 같나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어디 솜씨를 볼까?]
그녀의 대답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태무환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먼저 선제공격에 들어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다가서는 그의 권격은 극쾌와 극강의 무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루네리아도 그에 못지않았다. 비록 출수는 늦었지만, 후발제인의 이치를 담아낸 그녀의 지르기는 태무환의 권격에 정확히 닿고 있었다.
그러자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여파가 밀어닥쳤다. 시공이 일그러지면서 물리법칙이 뒤엉키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첫 수를 그렇게 정면에서 받아낸 두 신격은 그 직후부터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고 있었다.
시간과 거리의 개념을 뛰어넘듯 뻗어나가는 빛과 같은 창격과, 이를 우주공간째로 짓뭉개는 듯한 어둠의 장세.
그 둘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하자 창세의 개벽을 연상케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우주공간 자체가 팽창하면서 소규모 빅뱅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창조주의 권능이 아닌 이상 이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지만, 그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제법이군. 방구석 폐인처럼 성지에 가만히 처박혀 있기만 한줄 알았는데, 어느새 닦아둔 건지 모를 창술이 이 정도일 줄은.]
[······.]
하지만 루네리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력 전문분야는 어디까지나 생명과 빛을 관장하는 것인 만큼 무공 그 자체만으로는 태무환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공방에 모든 심력을 다 쏟느라 입을 열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이 정도지! 오로지 무공뿐이었던 나에 비한다면, 아직도 어설퍼!]
비로소 탐색전을 끝낸 태무환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흉험하고 사나웠으며 변화무쌍했다. 루네리아의 무예 수준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애당초 시작점부터가 달랐다. 루네리아가 제노디안, 즉 아서에게 배운 무예란 결국 중원의 무학과는 전혀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정립된 것.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이론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완성에 가깝게 정립된 중원무학에 비한다면 투박하면서도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공만으로 자신의 경지를 쌓아올린 태무환과, 근접전에 대한 보조적인 목적으로 무예를 익힌 루네리아 사이에는 쌓아올린 기반부터가 차이가 났다.
그녀가 태무환의 맹렬한 공세에 조금씩 몰리고 있다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럼에도 루네리아가 자신의 장점 대신 무예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무공이 갖는 공방의 치밀함과 간합 때문이었다.
물론 마법이든 그 밖의 여러 영능이든 결국 상대방과의 간격과 자신의 손이 미칠 수 있는 지배영역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법이라지만, 무공은 유독 그 비중이 더 컸다.
특히 동작 하나하나는 물론 작은 호흡 하나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 치열한 수 싸움으로 바늘귀보다 더 작은 빈틈을 파고드는 것이라면 무공 이상 가는 게 없었다.
애당초 무공은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상대방의 허점이나 빈틈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파고드는 것은 이 이상 가는 게 없었다.
유태진이 우주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여러 강자들을 상대로 상성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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