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08화 (409/448)

17권-08화

끼긱! 끼기기긱!

그것은 일종의 혼돈 그 자체라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블랙홀이 막대한 질량으로 공간을 간접적인 형태로 뒤틀어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건 시간과 공간을 직접 왜곡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위력도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시공간을 초월해 작용하는 백색 장인조차 검극에서 발생한 차원의 혼돈 앞에 집어삼켜져 소멸하고 말았다.

그룬베일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중얼거렸다.

[확실히 어중간한 어중이떠중이들보다는 낫군.]

반면 유태진은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당신 정체가 뭐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고,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냐?]

질문을 받고도 그룬베일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마치 그런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알카데인 황제처럼 알 수 없는 경로로 얻은 천마의 무공을 사용하는가 싶었지.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어. 제아무리 같은 무공이라 해도 체득한 자의 성격이나 여러 특성에 따라 차별점이 드러나니까. 황제의 기억과 무공을 흡수했다고 보기엔 너무도 달라.”

[그래서?]

“당신이 구사하는 천마신공의 리듬과 호흡, 그리고 사소한 버릇까지 내가 알고 있는 이와 너무도 똑같더군. 아마 같은 유전자를 타고난 쌍둥이라도 이렇게까지 닮진 않았을 거다.”

[후후후.]

유태진이 거기까지 자신의 추리를 덧붙이자, 그룬베일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정작 추리를 내놓은 유태진은 경악으로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보인 반응은 자신이 추측한 바가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유태진이 곧 어렵사리 입을 뗐다.

“혈세천마.”

그가 전생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명호와 이름을 입 밖으로 낸 순간, 그룬베일의 얼굴이 희열로 일그러졌다.

[그래, 잘 맞췄군. 천룡검신 천화운. 잘도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역시···!”

결국 불길하던 추측이 맞아 떨어졌다. 설마 전생의 악연을 이곳에서 또 한 번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네가 말한 것처럼 난 혈세천마 태무환. 너의 오랜 숙적이지.]

“···정말 지긋지긋한 악연이군, 태무환. 당신이 어떻게 그룬베일이 된 거지?”

유태진의 표정은 참담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황제가 묵룡탈혼수를 사용할 때부터 뭔가 느낌이 좋지 않더니,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혈세천마는 전생 때도 가장 상대하기 곤란한 난적이었다. 헌데 그런 작자가 어떻게 최상급 신격이라는 그룬베일이란 존재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수 있게 되었는지는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나는 그룬베일의 본신이 아닌, 그가 만든 화신들 중 하나다. 지금은 그를 대행하는 입장이지.]

“그럼 이미 중원무림 시절에도?”

[아니, 그때는 아무런 기억도 능력도 없던 시절이었다. 단지 천마의 무(武) 하나만 쥐고 있었지. 정말이지··· 지금에 와선 그 시절이 그립군.]

태무환의 말은 진심이었다. 중원무림 시절에는 어떠한 신적 권능도 갖지 못했지만, 지금보다는 더 만족스러웠다. 아무런 고민 없이 중원을 제패하기 위해 순수하게 싸움을 거듭하던 그때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것이었다.

“그럼 한 가지만 묻지. 그룬베일은 어째서 직접 나서지 않고 화신인 널 대신 강림시킨 거냐?”

[이유야 간단하다. 섭리의 제약 때문이지.]

“제약?”

[그룬베일은 우주에서도 그 수가 많지 않은 최상급 신이다. 제아무리 편법을 썼어도 그를 옭아매는 제약은 만만치 않아.]

제아무리 편법으로 알카데인 황제가 치른 의식을 통해 강림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섭리의 제약을 완전히 빗겨나갈 순 없었다. 그래서 선택된 게 바로 그의 화신 중 하나인 혈세천마 태무환.

그룬베일은 자신이 직접 강림하는 대신 화신을 강림시키고 본신의 힘 중 상당수를 위임함으로서 섭리의 제약을 빗겨나갔던 것이다.

물론 다른 의도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그룬베일은 천화운 네가 다시 환생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룬베일도 여러 화신들 중에 날 콕 집어서 보내기로 한 거지.]

“···그렇군.”

유태진은 그 말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거운 안색으로 경계했다.

하필이면 그룬베일의 화신으로 나타난 이가 태무환이라니. 차라리 무공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자라면 상대하기가 더 수월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유태진은 우주로 나온 이후 많은 자들을 상대해왔고, 그들은 무공이라는 낯선 영능에 허점을 보였다. 그가 체득한 무공이 수준 높기도 했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룬베일의 화신으로 강림한 태무환은 달랐다. 더 이상 지금까지 누려온 무공의 이점은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태무환의 무력은 차원이 달랐다. 조금 전에 손속을 섞어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재회의 여흥은 이쯤에서 끝내지. 나도 더 이상 네 녀석을 그냥 놔둘 순 없으니 말이야.]

“······.”

유태진은 지금 그 말이 결코 허튼소리가 아님을 잘 알았다. 만일 태무환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했었다면 불과 몇 수 섞어보기도 전에 패했을 거란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우주가 경동하기 시작했다. 태무환은 지금까지 드러낸 적 없던 힘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에인션트 드래곤들조차 경악에 찬 표정으로 전율했다.

[본신의 힘을 다 발휘 못하는데도 이 정도라고?]

[···상위신의 역량을 다시 평가했어야 했나?]

이대로라면 대 상위 신격에 대한 비장의 한수 [카르세인 스테나바라스]로도 기본적인 역량적 격차를 줄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태진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분전했다. 그는 이미 혈세천마 태무환의 모든 수법을 경험했으며, 그가 어떤 수법으로 어떻게 나올지도 전부 꿰뚫어보고 있었다.

게다가 태무환의 실질적인 깨달음에 대한 격차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가 그룬베일의 화신으로서 높은 신격과 신위, 신성을 갖고 있긴 했지만, 순수한 무(武)의 깨달음은 유태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크으!”

그렇지만 유태진은 고작 20여 합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무공의 숙련도나 깨달음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다루는 힘의 규모면에서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굳이 비유한다면 이건 일개 개미 한마리가 인간과 겨루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유능제강이나 이화접목 등의 무리를 적극 활용해 최대한 힘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버텨보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에 이르렀다.

피를 쏟으며 멀찌감치 밀려나는 유태진의 모습을 본 태무환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네 전력인 거냐?]

“···그래, 이게 내 최선이지.”

힘겹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태무환은 혀를 찼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권능조차 온전히 깨치지 못해 하급신조차 되지 못한 준신이 이 정도까지 분전한 것도 기적이니까.]

그랬다. 유태진은 기껏 해봐야 준신 수준이었다. 하급신에 한 발짝 걸치긴 했어도, 스스로 획득한 신격에 어울리는 권능을 체득하진 못했다.

반신을 넘어 하급신 이상으로 올라선 모든 신들이 불의 신이든, 무슨 신이든 각자 관장하는 영역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권능을 제대로 깨쳐야 온전한 초월자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유태진이 이렇게까지 버틴 것도 사실 기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엑스칼리버 정도는 온전히 갖고 있길 바랐는데, 역시 너와의 재전은 바랄 수 없는 일이 되었군.]

태무환은 그 점이 더 아쉬웠다. 그가 아서 팬드래건의 신기인 엑스칼리버를 갖고 있었더라면 적어도 제대로 된 싸움을 벌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엑스칼리버가 다시 재탄생되길 기대한다는 건 극히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 상위 신 급이었던 성계신이 권능을 쏟아내고, 지구의 막대한 사상력까지 더해 완성된 물건이었다.

이젠 성계신마저 없는 지금은 창세성검의 파편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천화운, 아쉽지만 이쯤에서 너와의 인연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

그는 재전에 대한 기대를 접고는 살기를 끌어냈다. 유태진을 이 자리에서 확실히 제거할 작정인 것이다.

“젠장!”

유태진은 이를 악물며 힘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원영신이 되면서 물리적으로 입는 부상 따윈 바로 회복할 수 있지만, 누적되는 데미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현재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은 평소의 절반 이하. 이대로는 일격도 받아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때였다.

[죽게 나둬선 안 돼!]

[어떻게든 그를 살려야 한다!]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드래곤들과 반신초월자들이 나섰다. 지금까지는 싸움에 끼어들 틈이 없어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가만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룬베일을 상대로 저 정도까지 싸울 수 있는 건 유태진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큼은 살려서 후퇴할 수 있게 기회를 만들기로 결단한 것이다.

화아아악!

눈부신 빛들이 유태진을 지나쳐 태무환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드래곤들이 구사할 수 있는 마지막 카이드 웨이저가 일제히 발사된 것이다.

하루에 단 세 번 뿐인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지만, 그 정도로 태무환을 막긴 어려웠다.

[흥, 하루살이 같은 것들!]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 우주의 어둠이 거대한 묵룡들로 화하더니, 카이드 웨이저의 빛줄기들을 갈갈이 찢어발기고 삼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묵룡탈혼수의 비의 암혼대룡세. 어둠 자체를 끝없이 묵룡으로 만들어내는 상식 밖의 절학이었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모든 카이드 웨이저를 분쇄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 주변 공간에 착탄한 일부 카이드 웨이저가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여파를 흩뿌렸다. 그 위력은 실로 놀라워서, 무려 수십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른 것 같았다.

[먹혔나?]

드래곤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에인션트 드래곤의 카이드 웨이저는 한 발 한 발은 제대로 중핵을 관통할 경우 달 정도 되는 크기의 소행성마저 박살낼 만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공격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수십 개가 적중되었다. 제아무리 그룬베일이라 해도 기습적인 공격을 당한 이상 피해가 없을 순 없을 터.

[웃기는군. 고작 그 따위 공격이 먹히리라고 생각했나?]

[뭐?]

갑작스럽게 들려온 영언에 드래곤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 다가온 건지, 태무환의 신형이 그들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심지어 자신들의 초월적인 인지능력조차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태무환이 내뻗는 한수가 그들이 대응할 틈조차 없이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을 둘러싼 무수한 묵룡들이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팽배하게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들 앞에서 상상할 수 없는 재앙으로 승화되었다.

묵룡탈혼수(墨龍奪魂手) 제 2식. 회련현묵강(廻連玄黙罡)

비의. 폭류산화(爆流散化) 용린폭살강(龍鱗爆殺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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