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05화
게다가 지금 느껴지는 것은 그룬베일 하나만이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기척들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마도 그건 그룬베일이 이끌고 온 인베이더의 함대 전력일 터.
공화국과 연합 함대의 규모에 비한다면 절반 수준이긴 하지만, 그룬베일이 가세한 그 힘은 오히려 이를 뛰어넘는다.
1종 전투대비태세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승무원들은 물론 유태진과 윤재민도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예기치 못한 기습 공격을 당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큰 피해는 없었다. 중형 전함 몇 척이 데미지를 입고 중파했고, 준대형 전함도 경미한 손상만 입었다. 그러니 아크라이더 같은 대형 전함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받았던 공격이 약했던 건 아니다. 혹시나 싶은 생각에 베네트 국장과 베이노아 수상이 2종 전투대비태세를 발령하면서 전함들은 배리어 출력을 상향시켰고, 그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적들의 기습공격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저 멀리서 인베이더의 대함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황제의 몸으로 강림한 그룬베일이 존재하고 있었다.
연합과 공화국은 섣부른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바짝 긴장 상태에 놓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가히 전설적인 악몽이나 다름없는 최상위 신이었다.
첫 기습 공격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공격조차 하지 않고 다가오는 지금, 섣불리 공격해서 상대를 자극하는 건 너무도 위험한 짓이다.
일단 그룬베일과 대적하기 위한 강자들이 외부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최소한 마이스터 급 이상의 강자들이었으며 그랜드 급은 물론 반신초월자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그룬베일은 그들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여유로웠다. 우주공간 위에 오연하게 선 그는 공화국과 연합 함대를 굽어보듯 내려다보며 영언을 내뱉었다.
[꽤나 분주하게 움직이더군. 네놈들이 지구로 향했다 함은 내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말이겠지.]
“그래. 잘 안다. 당신의 목적은 유니버셜 테라 코어의 점령이겠지?”
먼저 나서서 그 말을 받은 건 베네트 국장이었다.
그는 현재 아르탈 행성 연합 함대를 지휘해야 하는 사령관이었지만, 그룬베일이라는 초유의 강적을 상대하기 위해 사령관 권한을 아크라이더의 함장에게 위임하고는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하긴 그 위치면 알 법도 하겠군. 아니면 루네리아, 그녀에게 전해 들었던가.]
“······.”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겠지. 그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네놈들은 어차피 내 발걸음을 멈추지 못한다.]
차가운 시선이 모두에게 와 닿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딱히 살기를 품거나 하진 않았지만, 상위 초월자의 존재감은 단지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모인 강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냉소적인 얼굴로 단언한 그룬베일의 존재감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강대한 신격에서 비롯된 언령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터져 나온다.
[자, 그만 죽어 사라져라.]
그것은 이미 한 차례 제국의 함대를 전멸시켰던 권능에 닿은 절대명령권. 필멸자인 이상 이 언령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 이건 시간과 공간의 제약마저 초월하는 것이라 평범한 이들은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를 맞받아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어림없는 소리!]
[꺼져라!]
[누구더러 죽으라고!?]
이 또한 권능이 담긴 언령. 바로 공화국과 연합 소속의 반신초월자, 에인션트 드래곤들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좀체 몸을 움직이지 않는 초월종인 그들이 이렇게 단체로 나서게 된 것은, 그만큼 이번 사태를 우주적인 위기로 판단했다는 의미다.
지성체의 멸망을 바라는 그룬베일이 유니버셜 테라 코어를 장악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호오, 그런 식으로 내 언령에 저항한다고?]
그룬베일은 거슬린다기보다는 제법이라는 듯 호기심을 표했다. 언령으로 언령을 상쇄하는 건 딱히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자신보다 훨씬 격이 하위에 있는 반신초월자들이 다수 모여서 이런 효과를 내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단순히 언령을 단체로 사용한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다수의 언령을 하나의 술식과 같은 형태로 짜낸 건가.’
이건 하위의 마법사들 다수가 모여 본신 역량보다 더 상위의 술식을 구현하는 합체마법의 방식과 흡사했다. 물론 이런 걸 가능케 해준 원리나 이치는 그보다 훨씬 깊고 심오할 테지만, 그 기저에 깔린 기본 발상은 그와 매우 흡사했다.
“우리라고 해서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서 아무런 대책도 안 세웠을 것 같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베네트 국장의 강력한 고유스킬 [징벌자의 저울]. 그것이 그룬베일의 권능을 제약하고 있었다.
물론 상대가 상위신인 만큼 온전히 먹히진 않고 있었지만, 그렇게 약화된 권능은 에인션트 드래곤들이 힘을 합친 용언으로 간신히 받아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반신초월자에 불과한 에인션트 드래곤들이 뭉쳤다 하더라도 상위신 이상의 초월자인 그룬베일의 언령을 방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은 공격이 그룬베일에게 퍼부어졌다.
그것은 하루에 단 세 번만 쓸 수 있다는 드래곤들의 최대 무기인 카이드 웨이저(천멸용황파天滅龍晃波). 일반 브레스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 위력은 가히 9클래스의 영역마저 넘어선다.
쿠오오오오!
무려 백에 달하는 카이드 웨이저의 힘은 중급신의 영역이라는 10클래스마저 크게 웃돌았다. 제아무리 그룬베일이라 하더라도 이만한 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쿠르르르릉!
우주가 떠나가는 충격과 함께 여파가 휘몰아쳤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태양이 터져나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격렬한 폭발의 반응이 사라진 뒤에 드러난 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을 드러낸 그룬베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명을 증명하듯 칠흑빛 어둠을 두룬 채 조소했다.
[우습구나. 내 언령을 막은 네놈들의 수법이 가상키는 하나, 고작 반신초월자 따위가 모여서 날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더냐? 용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날 해하려 했다면 적어도 용제 정도는 데려왔어야지.]
하지만 그 발언은 드래곤들을 자극하여 격노케 만들었다.
용제는 그룬베일보다도 한 차원 격이 높은 전 차원의 용들을 지배하는 최상위 신이었고, 용신은 그보다 몇 차원 높은 전 차원을 아우르는 절대신이다.
고작 단 하나의 차원우주에 국한되어 있을 뿐인 그룬베일 따위가 감히 논할 존재들이 아닌 것이다.
[어디서 건방진 소리를!]
[감히 너 따위가 그분들을 입에 담는 거냐!?]
[죽어라!]
뒤이은 2차 공격이 퍼부어졌다. 헌데 이번에는 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안 그래도 강력한 카이드 웨이저에 9클래스 마법까지 더해진 것이다.
단순히 영력의 규모만 본다면 상위신도 충분히 위협할만한 수준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드래곤들도 상당히 무리해서 짜낸 공세였다.
쿠르르르릉!
우주의 시공간이 이지러지며 강대한 여파가 흩뿌려졌다. 막대한 힘이 집중되다보니 단순한 파괴력만으로도 차원의 뒤틀림이 발생한 것이다.
근처 주역에 있던 지구의 달보다 더 커 보이는 행성 다수가 이에 휘말려 박살나 흩어졌다. 이 정도면 지구의 태양계 하나쯤은 충분히 날려버리고도 남음이 있는 파괴력이었다.
이를 목도한 연정운이 경악어린 감탄을 토해냈다.
“이거 진짜 굉장하네. 이거··· 정말로 그룬베일을 쓰러뜨리는 거 아니야?”
제아무리 백에 달하는 드래곤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고는 하지만 정말 믿기 힘든 수준의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인션트 드래곤들이 반신초월자라고는 하나, 그들의 실제 역량은 거의 하급신에 버금가는 수준. 격 자체는 반신 급이지만 다른 종족보다는 다루는 영력의 규모나 체급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드래곤들은 자신들의 권능과 힘을 완벽히 하나로 엮어주는 비장의 한수 [카르세인 스테나바라스(용성대원진.龍聖大源陣)]를 구축한 상황인 만큼, 총체적인 역량은 거의 상위신에 준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주시하고 있던 유태진의 표정은 지극히 어두웠다.
“아니, 전혀 소용없어. 놈에게 이런 공격은 절대 통하지 않아.”
“뭐? 이 정도로도 안 먹힌다고? 어째서···.”
연정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되물었다. 유태진보다 경지가 낮은 만큼 에인션트 드래곤들과 그룬베일 사이에 오가는 공방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루는 힘의 규모까진 어떻게든 따라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상위신들과 비교하면 너무 많이 떨어진다. 그 증거로 그룬베일이 현재 입은 유효 데미지는 전혀 없지. 겉보기만 요란할 뿐이야.”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드래곤들의 공격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지만, 그룬베일에게 통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권능 발현을 최대한 억제함으로서 순식간에 쓸려나갈 상황을 방지하는 정도는 되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룬베일의 현재 역량이 본신의 그것에 못 미치는 상위신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지. 강림하는 과정 자체에 문제가 있던 건가?’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최상위신이든 상위신이든, 그들이 상대하기 버거운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역시 괴물 같군.]
[강림이 불완전해서 상위신 수준이라더니··· 그래도 우리의 역량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건가?]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질린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그리 높진 않아도 나름대로 승산을 점친 싸움이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아예 안 먹힐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물며 그에 한참 못 미치는 천외오천이 느끼는 경악감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진짜 미쳤네. 저걸 어떻게 상대한담? 내 감식안으로도 찌를 만한 구석이 전혀 보이질 않아.”
사토 류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감식안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정보와 약점을 읽고 그것을 베어낼 수 있는 결을 보여주는 것.
하지만 이 정도로 격에서 차이가 나면 손쓸 도리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대규모 함대전이었다면 차라리 내가 활약할 여지라도 있겠지만, 이건 뭐 상대 자체가 안 되겠군.”
[상대는 죽음 자체를 허용 받지 못한 존재다. 죽음의 낙인은 무용하겠군.]
로베르트 슈마허나 용천군도 마찬가지로 두 손 다 들었다. 진정한 신성과 신위, 신격을 완성한 상위 초월자 앞에선 그랜드 급 따윈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놈을 저지해야 해. 여기서 끝낼 순 없어.”
걷잡을 수 없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태진은 결연한 얼굴로 각오를 다졌다. 이미 그의 경지는 생사경인 반신을 넘어 하급신에 버금간다는 준신에 이르러 있었다.
그가 전력을 이끌어내기 시작하자, 어지간한 하급신 이상의 역량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기운이 들끓어 오르면서 존재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나갔다. 천룡무상신공을 중심으로 운용되는 다양한 신공절학들이 톱니바퀴마냥 서로 맞물리면서 유태진의 기본 역량을 크게 증폭시켜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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