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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04화 (405/448)

17권-04화

유태진은 꽤나 의기소침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했다.

연정운은 지난 십수 년 간 천외오천이란 명성으로 활약해온 강자였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강했던 건 아니겠지만, 이렇듯 압도적인 무력감과 좌절감을 겪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져왔다.

“우리··· 이길 수 있을까?”

유태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정론으로 대꾸해주었다.

“이길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야. 이기지 못하면 우린 멸망하는 수밖에 없어.”

“······.”

연정운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룬베일 같은 강력한 초월자를 상대로 승산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길은 단 하나.

이기지 못하면 멸망한다. 오직 그 뿐이었던 것이다.

연정운은 곧 허탈한 표정으로 실소를 짓고 말았다.

“···그래, 애당초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었지.”

그 모습을 본 유태진은 뭐라 말하려다가 말았다. 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잠시 뒤, 연정운은 유태진의 숙소를 떠나갔다.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으니, 그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상황은 다른 천외오천 녀석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번 전쟁에 동원된 승무원과 전투원들 모두 그와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태진은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휴우··· 싸우기 전부터 다들 사기가 말이 아니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들이 느끼는 절망감을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으니까.

지구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그들이 싸울 수 있는 상태로 되돌려야 했다.

‘베네트 국장이나 베이노아 수상도 승무원들의 분위기를 모를 리 없겠지.’

그렇다면 조만간 어떻게든 수습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절대 싸울 수 있는 상태들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곧 랑데부 포인트인가.”

얼마 전 지구의 인피니티 킹덤으로 한 가지 소식이 당도했었다. 그것은 바로 3척의 선견함대가 그들을 직접 마중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타고 있는 건 윤재민. 그가 이번 선견함대의 파견을 주장했다고 했다. 유태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마중 나올 게 아니라 지구에서 방비를 더 철저히 하며 준비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보게 되겠지.”

아무튼 그들과 접선하게 되는 랑데부 포인트는 차원단층 탓에 워프 항행을 중단하고 통상항행으로 지나가야 하는 지점.

그곳에서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긴 워프 항행을 마치고 워프 아웃을 실시한 연합과 공화국의 대함대가 슬슬 랑데부 포인트 지점에 접어들고 있었다.

메인 브릿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베네트 국장은 오퍼레이터의 보고를 받았다.

[이제 랑데부 포인트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인피니티 킹덤에서 파견한 소규모 선견함대 도착 예정 시간은 앞으로 약 10여분 뒤. 곧 워프 아웃해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렇군. 알았다. 모든 승무원들은 긴장 풀지 말고 대기하도록.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언제 어느 때라도 싸울 수 있도록 대비해라.”

[알겠습니다.]

베네트 국장의 명을 따라 오퍼레이터는 곧 2종 전투준비태세를 발령했다. 1종이 실제 전투상황에서 발령되는 것이라면, 2종은 전투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가능성이 높은 시기에 발령된다.

“제길, 이게 무슨 일이야.”

“여긴 랑데부 하는 지점이라며? 뭣 때문에 전투2종 발령이야?”

“갈 데까지는 편히 쉬나 했는데, 다 글렀네.”

승무원들은 갑작스런 사이렌 소리에 투덜거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일단 발령이 떨어진 이상 이를 어길 순 없었다.

그것은 베이노아 수상도 다르지 않았다. 공화국 함대 전체에 2종 전투준비태세를 발령했다. 단순히 선견함대와의 랑데부가 목적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차원단층을 지나기 위해 워프항행을 중단한 지금이야말로 함대가 가장 위험에 노출된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베이더 놈들의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두 세력의 함대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철저한 방비를 마친 순간, 드디어 워프 아웃 반응이 나타났다. 전면에 둥근 웜 홀이 생성되더니 세 척의 전함을 토해낸 것이다.

[여기는 인피니티 킹덤의 선견함대 타라노스. 랑데부 포인트에 도착했다.]

“흠, 드디어 도착했나.”

베네트 국장은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표시된 선견함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태진의 동생이라고 했지?’

물론 핏줄로 이어진 동생은 아니었지만, 친동생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게다가 능력도 상당했다. 소환된 지 불과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대단한 신성력을 다룬다고 들었다.

그 정도면 천외오천에 버금갈 만큼 무척 뛰어난 인재였다.

베네트 국장이 윤재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 선견함대와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유태진이었다.

현재 연합의 모함이자 관리국 소속 대형기함 아크라이더는 선견함대 타라노스를 내부로 수용했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아크라이더의 크기를 생각하면 중형 전함 세 척을 내부에 수용하는 건 별 것 아니었다.

피이익!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전함의 해치가 개방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윤재민을 비롯한 선견함대의 승무원들이었다.

“왔구나.”

“형.”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된 유태진과 윤재민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그동안 다른 이들에게는 별 일 없었는지를 묻는 정도였다.

하지만 유태진은 순수하게 이 만남을 반기기가 어려웠다.

“너 무슨 생각으로 마중을 나온 거냐? 더군다나 이런 시기에.”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 그 말에 윤재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내가 단순히 형 얼굴 좀 보려고 마중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냐?”

“있지. 나도 공과 사 정도는 구분하고 있어.”

그의 확고한 대답에 유태진도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이유를 물었다.

“그럼 그 이유라는 게 뭐냐?”

“선견함대가 왜 선견함대인지를 생각하면 답이 될 거야.”

“그게 답이라고?”

지금 윤재민은 선견함대의 본래 의미를 뜻하고 있었다.

선견함대란 단순히 마중을 나오는 게 전부가 아니다. 찾아오는 아군과 합류함으로서 보다 빠른 항로로 유도하거나 혹시 모를 적의 타격에 대비하기 위한 일종의 작전행동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윤재민이 이곳까지 찾아온 건 그만한 위험이 있을 거라 예측했기 때문이란 건가?

묻는 듯한 시선을 던지는 유태진의 모습에, 윤재민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형이야말로 지금 방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대함대라고 해서 도착 전까진 아무 위험이 없으리라 생각한 거야?”

“······.”

정곡을 찔린 유태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구 인근의 주역이 최종 격전지가 될 거라 생각했을 뿐, 그곳까지 가는 도중에 벌어질 상황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윤재민은 이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나왔다.

“적들이 공격을 한다면 지금이야 말로 가장 취약한 시기지. 차원단층 때문에 일정 구간 동안은 워프 항행조차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니 말이야.”

“···그래, 네 말이 맞아. 지금이 가장 위험하구나.”

유태진은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윤재민의 말처럼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점이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하자. 지금 상황이 위험천만한 건 사실이지만 너와 선견함대가 더해진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건 아니다. 기껏 해봐야 중형 전함 세 척에, 전투원 수십 명. 거기에 너라는 전력이 더해진다고 해봐야 통상적인 전투 함대 하나만도 못해. 고작 그런 전력으로 인베이더의 대병력을 상대로 뭘 어쩔 생각인데?”

유태진의 말 대로였다. 그룬베일이 더해진 인베이더의 강력함을 생각하면 선견함대의 전력 따윈 도움은커녕 별다른 위안조차 되지 못한다. 오히려 보호해야 할 입장이었다.

“맞아. 객관적으로 보면 별 도움 안 될 전력이지. 공화국과 연합의 대함대가 갖는 규모를 생각한다면 전력으로선 하등 가치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윤재민도 유태진이 지적한 사실만큼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윤재민이 이내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형. 상대는 단순히 병력의 질이나 함대의 규모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애당초 전력이나 규모만으로 당해낼 상대였다면 이런 대함대를 이끌고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 테지.”

유태진도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함대의 규모나 전력만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 상대였다면 이토록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윤재민의 말은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럼 너와 선견함대는 뭔가 특별한 수단이라도 있다는 거냐?”

“글쎄··· 조금 더 두고 보면 알 거야.”

윤재민은 그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루뭉술한 말로 끝맺고는 더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의뭉스러운 놈.’

유태진은 그런 동생을 노려봤지만, 그에게서 대답을 얻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억지로 추궁한다고 해서 입을 열 리가 없었다.

유태진은 윤재민을 데리고 메인 브릿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단 선견함대가 도착했으니, 베네트 국장에게 얼굴을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목적지인 메인 브릿지까지 미처 다 도달하지 못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갑자기 상상을 초월하는 굉음과 진동이 함체를 뒤흔들었다. 아크라이더는 전장만 무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형 전함이었다. 그런 규모의 전함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릴 정도면 그 충격이 어떠한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승무원들은 하나같이 혼란에 빠졌다.

“뭐··· 뭐지!?”

“적의 공격인가?”

“뭐라고? 그럼 대체 어디서?”

대체 어디서 날아온 공격인지도 짐작되지 않았다. 이미 공화국과 연합의 함대는 센서를 최대한 활성화시킨 상태였지만, 적으로 짐작되는 상대의 공격을 사전에 미처 감지조차 못한 것이다.

다만 윤재민의 표정만큼은 달랐다. 그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네.”

그 작은 중얼거림을 유태진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동생을 붙잡고 추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은 적의 존재와 위치부터 파악해야 했다. 이대로 가다간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의식을 집중하여 기감을 최대한 확장하자,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태진은 어째서 조짐조차 없이 기습을 당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차! 이 일대 주역을 커버할 정도의 대규모 인지장애였나? 그것도 권능 수준의···.’

물론 인지 장애는 그다지 대단한 수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랜드 급은 물론 다수의 반신초월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

그들의 인지를 모두 속이고, 대형전함의 센서마저 착각하게 만들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인지장애가 필요했다.

그 정도면 거의 권능 수준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인지장애는 아무리 격이 높다 해도, 일단 인식되고 나면 취약해 질 수밖에 없었다. 적들이 공격을 인지하고 인식을 전환한 순간 인지장애 자체가 깨어져 나간 것도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정말 인베이더인가?”

그제야 유태진의 기감으로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신성. 그것은 황제의 것과 흡사하면서도 드높은 격이었다.

유태진은 그 정체를 알아챘다.

“그룬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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