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권-03화
그리고 그 다음날 이른 시각, 윤재민은 아르페인이 지원해준 중형 전함 세 척과 함께 지구를 떠나게 되었다. 일행들 중 몇몇은 윤재민과 함께 유태진을 만나러 가고 싶어 했지만, 정작 윤재민이 그들의 동행을 전부 거절하였다.
“여러분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지구가 위기에 처한 거. 그러니 지금 당장은 각자 맡은 바에 충실할 때입니다. 지구의 운명이 바로 여러분께 달렸습니다.”
그렇게 일행들을 달랜 윤재민은 비로소 전함에 올랐다. 준비가 끝난 세 척의 전함은 곧 워프 항법으로 랑데부 포인트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분께서 우려하시는 바가 기우였으면 좋겠는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아르페인에게는 단순히 불길한 느낌 정도로 둘러댔지만, 사실 그보다는 더 명확하고 구체적이었다.
이것이 틀리지 않는다면··· 연합과 공화국의 연합 함대는 분명 전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아니야. 절대 그렇게 놔둘 순 없어.”
윤재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내심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결심을 굳혔다 하더라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의 시선은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슬슬 불길한 기운이 다가오는군. 기어코 때가 된 것인가?”
그는 지구의 다른 위상 속에 존재하는 격리공간이자, 오래 전부터 지구의 성계신의 성지중 하나였던 아발론을 지켜온 랜슬롯이었다.
그의 영감으로 머나먼 우주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악의의 결정체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건 아주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미 1500년 전에도 한번 경험해봤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주 뼈저리게 느꼈지. 지울 수 없는 절망감을···.’
지구를 호시탐탐 노리며 기다려온 인베이더의 제 1신좌 그룬베일. 그의 존재감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려면 대충 한 달 정도는 걸리겠군.’
현재 그룬베일은 지구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진 우주에서 날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본다면 그룬베일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는 게 정상이지만, 랜슬롯의 인지는 이미 그랜드 급을 아득히 벗어난 수준.
언제든 초월자가 되어 승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게 제약을 가하면서까지 억지로 이 아발론에 묶여있었던 것이다.
“일단 계획대로 되긴 했는데··· 멀린 그 작자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군.”
15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마냥 허송세월만 보낸 건 아니었다.
그룬베일은 결코 지구를 포기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이에 맞서 미리 대비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각자 역할을 분담하기로 하였다. 지구에서의 일은 랜슬롯이 맡고 있었지만, 우주의 일은 멀린이 전부 도맡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멀린 그 작자의 성격이 워낙 문제가 많다보니 당최 믿음이 가질 않았다. 그가 가진 실력과 수완과는 별개로 말이다.
“어쨌든 이젠 나도 움직여야 할 때인가.”
랜슬롯은 오랜 침묵을 깨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 150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온 것들을 사용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 * *
유태진은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황제, 그 작자의 몸에 그룬베일이란 신좌가 강림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로군.’
하긴 생각해보면 의식만 치른다고 해서 필멸자가 상위의 신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만일 진짜 그런 식으로 신이 될 수 있다면, 우주에서 제법 행세하던 권력자들은 죄다 초월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최악의 상황이야.”
심지어 그렇게 강림한 그룬베일은 지금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지구로 향했다. 1500년 전에 이루지 못했던 유니버셜 테라 코어의 장악을 또 한 번 시도하려는 것이다.
상황은 극히 절망적이었다.
지금은 지구의 성계신도 미처 부활하지 못했고, 그룬베일에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엑스칼리버마저 가루조차 남지 않고 부서져 버렸다.
그러니 이젠 말 그대로 승산이 없었다. 지금 연합과 공화국의 함대가 대함대를 이끌고 지구로 향하고 있긴 하지만, 그룬베일의 존재는 이런 거대한 전력마저 아득히 넘어선다.
그게 바로 최상위 초월자의 위용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엑스칼리버를 황제에게 사용하는 게 아니었는데···.”
만일 조나단과 아문이 전투에 가세할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엑스칼리버 없이 악착같이 버티면서 시간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엑스칼리버를 사용한 뒤에 나타났고, 엑스칼리버는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엑스칼리버의 핵이 되는 혼의 결정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이것만으론 활용할 방법이 없었다.
‘멀린 그 작자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1500년 전의 인베이더의 침략을 경험했던 멀린이라면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현재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베네트 국장에게 물었지만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렇지만 유태진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국장의 표정과 말투에서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분명 뭔가를 준비하고 있군. 그렇지 않고서야 종적을 감출 이유가 없지.’
고작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1000년 이상의 시간을 인베이더의 침략에 대비해 왔을 터. 지금으로선 멀린이 준비해뒀을 거라 짐작되는 대비책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심력을 쏟는 건 무의미하겠지.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생각을 정리한 유태진은 단호히 결정을 내렸다.
어떠한 대책도 세울 수 없는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보다 더 강해지는 것 이었다.
현재 유태진의 경지는 생사경. 즉 반신의 경지였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깨달았던 경지까지 완벽히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너무나도 부족했다. 고작 중위 신에 불과했던 황제를 상대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권능이 봉쇄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 작자를 상대로 버티는 게 고작이었지. 결국 엑스칼리버까지 소모해야 했고.’
그렇기에 적어도 반신의 경지를 뛰어넘어 온전한 초월자는 되어야 했다.
물론 그가 하급 초월자가 된다 하더라도 딱히 승산이 높아진다고 볼 순 없었다. 최상위 신이라는 그룬베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론 별 위안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엑스칼리버를 쥔 아서는 그랜드 급 수준으로 신좌들을 격퇴시켰다. 물론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그 정도 경지로도 희망이 있다는 걸 증명했지.’
그렇다면 자신이 하급 이상의 온전한 초월자만 될 수 있다면 확률은 그때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당장 내 손에 엑스칼리버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그건 어떻게든 되겠군.’
유태진은 멀린이 지금까지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자라면 그룬베일 같은 신좌를 상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터. 정면으로 싸워봐야 승산이 없으니, 싸울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예상컨대 준비하고 있는 수단이란 바로 쇠할 대로 쇠했던 엑스칼리버를 다시 재탄생시키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그 예측에 맞춰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서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엑스칼리버를 사용해 그룬베일을 확실히 물리치려면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닿아야 했다.
그리고 불행 중 다행인지··· 아주 성과가 없지도 않았다.
“만류귀종이라더니··· 역시 모든 건 하나로 통한다는 건가?”
그가 생사경이란 경지를 이룬 핵심은 바로 무공에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천화운 시절에도 무림맹의 공동 전인으로서 수많은 도술과 주술을 섭렵했으며, 진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유태진으로 환생한 이후, 그는 많은 지식들을 손에 넣었다. 무림인이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양하고 폭넓은 영능학과 각종 과학적 지식까지 깨우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게 다 자기 스스로 학습했다기보다는, 아서의 기억을 통해 습득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영력을 다루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근본은 영자를 의지 하에 두는 게 목적이군.’
내공, 마력, 혹은 정령력이나 신성력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이것들은 결국 순수한 영자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종류가 수없이 갈리는 것이다.
그리고 유태진은 아서의 기억을 기반으로 수많은 영능들을 다뤄봄으로서 그것들이 추구하는 흐름의 핵심을 관통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군. 이 모든 건 결국 하나로 귀결하기 위함이다. 자기 자신의 완성. 오르는 길은 달라도 종국적인 목적은 영자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다루는 근간인 내면의 완성이다.’
하지만 아직도 뭔가가 부족했다. 깨달음에 근접하긴 했지만, 더 이상 이어나가기에는 나머지 영능학에 대한 기반이 약했던 것이다.
검술은 반신 급이라는 생사경에 도달한 데에 반해, 나머지 영능들은 기껏해야 화경과 비견된다는 마이스터 수준이었다. 이러니 균형이 맞지 않았다.
‘적어도 그랜드 급은 되어야 뭔가가 이뤄질 것 같은 느낌인데··· 역시 쉽지 않아.’
유태진은 닿을 듯하면서도 닿지 않는 깨달음에 아쉬움을 삼켰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될 테지만, 문제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이었다.
그룬베일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를 예측한 시간은 대략 한 달 남짓. 단 한 종류의 영능만 파고든다면 모를까, 여러 영능들을 한꺼번에 그랜드 급까지 끌어올린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좀 꺼림칙하던 아서의 기억과 지식이 오늘따라 많이 아쉬워졌다.
“분명 아서가 제노디안으로 활동하면서 한층 더 높은 경지까지 도달했을 텐데, 내가 본 기억에는 거기까진 없었어.”
하지만 아서의 새로운 기억을 떠올리는 건 인위적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가 그룬베일을 격퇴하는 순간까지의 기억을 얻은 것도 우연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안 되는 걸 계속 매달릴 수도 없으니 말이야.”
유태진은 깔끔히 미련을 떨쳐내고는 수련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심상세계로 깊이 가라앉은 그의 의식은 무학의 이치를 기반으로 수많은 영능들의 원리를 이리저리 분해하고 조합하면서 보다 최상의 형태를 빚어나가고 있었다.
헌데 그때, 누군가가 유태진의 숙소를 방문했다. 그는 다름 아닌 연정운이었다.
유태진은 시간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연정운의 방문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열어주었다.
지구 출신 중에서는 그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친인이었다.
“젠장,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긴 했지만 이런 식은 절대 아니었는데···.”
연정운은 유태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먼저 푸념부터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정운은 아르센티아 주역에서 싸우면서 수준 이상의 초월자가 얼마나 강력한지 경험했다. 심지어 황제는 엑스칼리버에 의해 권능이 봉쇄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초월자의 능력은 경악스러울 만큼 대단했다. 그 당시 연정운은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다. 만일 유태진이 아니었다면 그는 황제의 일수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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