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402화 (403/448)

17권-02화

“휴우··· 역시 쉽지 않은 상대로군.”

로이란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광소대연을 오래 지속한 덕분에 무리가 간 모양인지, 몸 이곳저곳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카슈는 그만큼 난적이었으니까. 그랜드 급 중에서도 상위권에 해당하는 천외오천과 비교해 좀 떨어질 뿐,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예전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하지만 유태진의 도움으로 비전의 핵심을 복원한 지금은 예전의 오리지널마저 훌쩍 넘어섰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랜드 급 강자인 카슈를 상대로 동귀어진한다면 모를까, 이렇듯 별 부상 없이 승리한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새삼 감회에 젖어 있던 로이란은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출발하고 있을 시간인가?”

생각해보니 지금쯤 연합과 공화국의 원정함대가 지구를 향해 출발할 시각이었다. 하지만 로이란은 그 원정함대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번 전쟁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본진을 아예 비워둘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이란을 비롯하여 여러 실력자들은 본진을 수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력과 함께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구에 있을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이젠 실력도 부쩍 늘어 자신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지만, 그래도 염려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디 무사하거라, 아리엔.”

그렇게 딸아이의 안녕을 기원하며 로이란은 그 자리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 * *

한편 지구의 전력화 계획을 진행하고 있던 인피니티 킹덤은 급변하는 우주 정세에 바짝 긴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국이 공화국을 침공하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그룬베일의 강림이라니.

심지어 그 목표는 바로 다름 아닌, 이곳 지구였다. 인베이더의 대 함대가 그룬베일과 함께 지구를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르페인은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예전에 사령관님 앞에서 연합이 버틸 수 있는 시한을 50년에서 100년일 거라고 말했었는데, 그마저도 턱없이 길게 잡았던 모양이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룬베일이 강림한 이상 50년은 고사하고 불과 몇 년 안에 모두가 멸망하게 생겼다. 그만큼 물질계에서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위신 이상의 신은 무소불위의 권능을 갖고 있었다.

“이건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잖아요. 어쩔 수 없죠.”

리스티의 그 말에 아르페인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 옳았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고 나니 자신이 괜한 소리를 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놈들이 왜 지구를 노리는 건데? 굳이 이런 변두리 행성을 그룬베일이 직접 나서면서까지 노리는 이유를 모르겠어.”

이번엔 아리엔이 던진 말이었다. 그러자 다른 일행들도 그 의문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딱히 탐낼만한 우주적인 희소자원이 지구에 매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지구가 선점해야 할 만큼 중요한 요처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휴, 이젠 어쩔 수 없나.’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리스티는 지구가 바로 유니버셜 테라 코어임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는 자신과 유태진만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룬베일까지 직접 지구를 노리고 나선 상황이니 더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다만 엑스칼리버나 그에 관련된 것들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유태진이 직접 밝히지 않는 이상, 자신이 먼저 밝힐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리스티가 유니버셜 테라 코어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자 그제야 다들 납득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음, 1500년 전에도 이곳을 노렸다 이거군.”

“그래서 놈들이 집요하게 지구를 노리는 건가?”

하지만 안색은 어두웠다. 지구가 그만큼 중요한 행성이라면 인베이더들도 반드시 손에 넣으려 할 테니까.

지구를 지켜야 할 입장에서는 가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레이첸이 푸념하듯 내뱉었다.

“이젠 우리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거 후퇴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지간해서는 이런 말 하지 않는 레이첸조차 약한 소리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포기하고 후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옆에 있던 엘레나가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잖아요. 지구가 그룬베일에게 점령당하면 우주의 균형이 그들에게 기운다는 것을요. 이런 상황에서 후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 잘 알지. 하지만 이건 계란으로 바위와 부딪치는 격이야. 승산이 전혀 없다고.”

레이첸은 연합의 5대 가문인 바이우드의 혈족인 만큼, 남들보다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상위신이 어떤 존재이며, 그룬베일 같은 제 1신좌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는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일로는 포기하지 않는 그가, 이렇게 어울리지 않게 약한 소리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엘레나는 이를 선선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레이첸은 외부인이기 때문에 그렇겠죠. 하지만 우린 이곳이 고향이라고요. 가족이고 친인이고 전부 지구에 있는데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레이첸도 더 이상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하긴 자신이 그 입장이라 해도 쉽게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구 출신인 마틴도 엘레나를 거들 듯 입을 열었다.

“엘리나의 말이 맞아. 우린 우리의 고향을 쉽게 포기할 수 없어. 게다가 방금 그랬잖아. 지구에 우주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한번 우주의 균형이 흔들리면 그 끝은 결국 지성체의 멸망이야. 어디로 도망가든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든 싸워야지.”

그 말 대로였다. 지구를 인베이더에게 넘겨주고 나면 빠르든 늦든 결국 멸망하게 되는 건 필정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든 이곳에서 지구를 사수하기위해 싸우는 게 더 나았다.

게다가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일렀다. 아르페인이 말했다.

“그래 섣불리 절망하고 포기할 상황도 아니야. 지금 연합과 공화국이 지구를 향해 대 함대를 파견했다고 했다. 베네트 국장과 베이노아 수상도 함께 오고 있다더군. 우리 유태진 사령관께서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바로 지구를 중심으로 총력전이 벌어지게 되겠군요.”

“그런 셈이 되겠지.”

아르페인의 끄덕임에 잠시 입술을 깨문 리스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조금이라도 그룬베일에게 대항하려면 뭐가 필요할 것인가.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던지, 아리엔이 먼저 물음을 던졌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우선 지구인들의 전력화를 서둘러야겠지. 기존의 훈련도 좀 더 강화시키고.”

현재 지구는 아르탈 행성 연합 산하의 행성으로서 자립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지원과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지구의 산업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하게 되었고, 군사력도 단숨에 수백 년 단위를 뛰어넘었다.

물론 연합의 기준에서 보면 하나같이 구세대 재래식 전함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대규모 전투에서라면 어느 정도 나쁘지 않은 전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능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몇 차례 실전을 거치면서 그들은 제법 숙련된 오버러로 재탄생되었다. 물론 단기간에 육성한 전력인 만큼 관리국 본국의 정예들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양산형 인베이더를 상대로는 그럭저럭 쓸 만한 전력이었다.

아마 단순히 인베이더가 침공한다고 했다면, 이 정도만으로도 지구를 사수할 수 있었을 테지만··· 상대는 인베이더의 핵심 전력을 실은 대함대와 그들의 주인인 제 1신좌 그룬베일이었다.

현재 지구의 전력 따윈 아마 그 앞에선 불과 1초도 안 되어 소멸될 것이다.

물론 지구의 전력을 좀 더 강화시킨다고 해서 그 결과가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뭐라도 해봐야 했다.

게다가 연합과 공화국의 대함대가 출발했다고 하니, 그들이 제 때에 도착만 한다면 지구의 병력도 보조적인 역할로 충분히 활약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다들 대책을 내놓던 그때, 지금까지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던 이가 손을 들었다. 바로 그는 유태진과 같은 보육원을 나온 동생인 윤재민이었다.

그동안 윤재민은 지구에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했던 것이다.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제안? 그럼 말씀해 보세요.”

아르페인이 그에게 발언권을 주자, 윤재민이 즉각 용건을 꺼내놓았다.

“전함 몇 척만 내 주시면 마중을 나가고 싶습니다.”

“마중이라면 이곳으로 오고 있는 연합과 공화국의 대함대를 말입니까?”

“예.”

“대체 무슨 이유로 말입니까? 이쪽으로 오고 있는 함대를 굳이 마중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마중을 나가봐야 우리가 보낼 수 있는 전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원 함대의 규모에 비한다면 티끌만큼도 안 될 텐데, 무슨 의미가 있지요?”

아르페인으로선 윤재민이 무슨 의도로 이런 의견을 내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원 함대의 병력이 많지 않을 경우, 적들에게 요격당할 것을 우려해 랑데부 포인트를 지정해 마중 나가는 일도 종종 있지만 이건 그런 사례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냥 평범한 함대도 아니고 무려 연합과 공화국이 무리를 이룬,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함대였다. 굳이 인피니티 킹덤의 부족한 전력을 쪼개가면서까지 마중 나갈 필요가 있을까?

아르페인이 그렇게 이견을 내놓자, 윤재민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떼었다.

“느낌이 좋지 않더군요.”

“···혹시 여신께서 내리신 계시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그 말에 아르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재민은 마이스터 급의 성직자. 하지만 단순히 마이스터 급이라고 치기에는 그 이상으로 격이 높았다. 그는 여신과 밀접한 연결을 갖고 있으며, 지구에서도 자신을 매개로 하여 여신의 권능을 직접 현현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 윤재민의 직감이라면 무시할 수 없었다.

“그분이 직접 내리신 계시는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불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아군에게 큰 피해가 발생할지도···.”

“으음···.”

아르페인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삼켰다. 이런 말까지 들은 이상 이대로 모른척 넘기기도 뭣했다.

신들이 내려주는 대부분의 계시는 직접적인 형태지만, 세계나 우주의 명운을 가늠하는 중요한 내용들은 섭리에 의한 제약 탓에 그렇지 못했다. 때문에 중요한 계시들은 이렇듯 불길한 조짐이나, 직감 혹은 꿈과 같은 두루뭉술한 형태로 전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런 사례들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원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동원할 전력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많이는 필요 없고, 제가 지원함대와 랑데부 할 수 있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그 말은 함대 전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윤재민 씨가 그곳에 도달하는 게 목적이라는 말이군요.”

“예.”

아르페인은 그의 요청을 수락하면서도 의문을 품었다.

대체 윤재민 혼자 가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일까? 그가 뛰어난 성직자라고는 하지만, 그가 가진 힘은 작은 함대에도 못 미쳤다. 연합과 공화국의 대함대가 위기에 처할 정도라면 윤재민 개인의 힘 따윈 가히 티끌만도 못할 터.

그렇지만 일단 그가 받은 계시가 그렇다고 하니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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