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98화 (399/448)

16권-23화

* * *

좌중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지성체들의 공적 인베이더. 그 중에서도 수좌라 할 수 있는 그룬베일의 강림이라니!

똑똑히 듣고도 그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들이 알기로 그룬베일은 우주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최상위 신격 중 하나. 그만한 존재가 직접 강림해서 물질계에 관여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물론 1500년 전에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유니버셜 테라 코어를 손에 넣기 위해 꽤 무리를 해가며 강림한 전적이 있다곤 하지만, 지금은 오래 전의 일일 뿐이었다.

당시 심대한 타격을 입은 그룬베일은 더 이상 물질계에 간섭할 여력조차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현재 인베이더들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것은 그 아래 서열의 신좌들이었다.

그런데 그룬베일의 강림이 사실이라면 단순히 물질계에 간섭한다는 차원을 아득히 넘어섰다. 전능에 가까운 신이 하계에 내려와 제 맘대로 휘젓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면 가히 우주를 멸망시킬 재앙이 도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여신 루네리아가 이런 자리를 마련해가면서까지 허튼 소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루네리아는 차근차근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룬베일이 어떤 방식으로 강림했으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암중에서 오랫동안 준비해 왔는지를.

“세상에···.”

“정말 무섭군. 인베이더들이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음모를 꾸며왔을 줄은.”

“결국 전쟁을 일으킨 제국과 알카데인 황제도 그들의 손에 놀아난 셈이란 건가.”

알카데인 황제는 그룬베일의 강림을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 본인은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위해 암중에서 계획을 추진해 왔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모든 게 결국 그룬베일의 음모였다.

그런데도 지난 수백 년 동안 어느 누구 하나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새삼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그 결과 황제는 몸을 빼앗기고 제국함대는 전멸이라··· 정말 참담한 일이군.”

베이노아 수상은 그 모든 게 자업자득이라 생각했다. 황제를 따른 죄로 죽어간 제국함대의 희생은 안타깝긴 했지만, 애당초 황제를 맹목적으로 따른 것 자체가 문제였다. 죽은 자들에게도 아주 책임이 없는 건 아닌 것이다.

‘그래도 희생이 너무나도 커. 당분간 제국이 크게 휘청거리겠지.’

이번에 동원된 함대만 하더라도 제국이 보유한 전력의 1/3 이상이었다. 그만한 전력이 하루아침에 죽어버렸으니, 이를 복구하는 데만 해더라도 십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제국의 처지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재앙처럼 도래한 그룬베일을 어떻게 감당할지가 문제였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그룬베일이 황제의 몸으로 강림해 온전한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저희에게 승산이 없지 않습니까?”

“최상위 신이라니······ 그런 존재가 물질계에서 마음대로 권능까지 휘두를 수 있다는 현실이 너무 불합리하군요.”

상위신인 루네리아만 해도 섭리에 제약만 없다면 가히 전능에 가까운 힘을 발휘했었다. 하물며 그보다 더 높은 최상위신이라면 얼마나 절대적인 권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우주에 사는 지성체의 힘 따윈 감히 닿지도 못하는 영역의 것일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지모를 가진 자라 하더라도 우주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최상위 신을 상대로 무슨 대책을 내놓을 것인가?

이건 개미가 코끼리를 이기겠다고 발버둥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 더 냉정하게 비교해본다면 그 비유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땅한 대책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때 루네리아가 입을 열었다.

[분명 그는 두려운 존재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우린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니 벌써부터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일러요.]

“그럼···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 루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룬베일은 황제의 몸을 차지해 강림했지만 완전한 건 아니니까요. 본신의 힘을 다 발휘할 수 없는 처지죠.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면 거기서 끝입니다.]

그제야 사람들도 의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상대가 제 1신좌 그룬베일이라 해도 가만히 앉아 멸망당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때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번엔 베네트 국장의 물음이었다.

“방금 완전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지금 그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상위신 수준은 됩니다. 저와 비슷하거나 약간 위라고 보면 맞을 것 같네요.]

돌아온 그녀의 대답에 다들 부담스런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룬베일의 본래 격에 비한다면 꽤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필멸자들에겐 여전히 아득한 존재였다.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루네리아 여신만 해도 어떠한가? 감히 대적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하물며 그와 동등하거나 약간 위일 수도 있는 그룬베일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때 베이노아 수상이 입을 뗐다.

“그런데도 희망이 있다는 건 뭔가 준비하신 게 있다는 뜻이군요.”

루네리아는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동안 저나 제 교단도 손 놓고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구체적인 내용을 들을 수 있을까요?”

[당장 발설은 곤란합니다. 여러분들께도 알려주고 싶지만 입 밖에 내는 즉시 그도 알게 될 테니까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사람들이 낮게 탄성을 흘렸다.

신들의 내뱉는 말들은 그냥 평범하게 지나가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남긴 말 한 마디 한마디는 결국 아카식 레코드에 새겨져 남아있기 마련이었다.

만일 그녀가 여기서 밝히게 된다면, 그것은 아카식 레코드에 남아 그룬베일까지 열람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도 그런 비밀이 알려지지 않도록 자신과 관련된 것들의 열람조건에 제한을 둘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보안을 100% 보장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알려 드리지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묻기도 어려웠다. 사람들은 일단 납득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그 부분은 여신님만 믿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처가 무엇일지 모르겠군요.”

“함대를 총 동원해서 맞서야 할까요?”

당장이라도 인베이더와 싸워야 할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에게, 루네리아는 또 다른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현재 그룬베일의 목표는 우리가 아닙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연합이나 공화국에 대한 건 안중에도 없는 상태지요.]

“안중에도 없다면··· 그가 강림한 목적이 우리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베네트 국장이 다급히 물었다.

[그래요. 현재 그룬베일이 노리는 것은 저 먼 곳에 있는 지구. 이 우주의 중심이라 불리는 유니버셜 테라 코어라고도 하지요.]

“그런!”

유니버셜 테라 코어. 우주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중심지.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본 말이었다. 단지 정보여부가 불명확하여 다들 실존여부를 확신하지 못했는데, 오늘 여신의 입을 통해 그 존재가 확실히 밝혀진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룬베일이 저희를 제쳐두고서라도 당장 그곳으로 향할 만도 하겠군요.”

[예, 그래서 그곳을 그룬베일에게 넘겨줘선 절대 안 됩니다. 그랬다간 우린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 우주의 멸망이 확정되어버릴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이 자리의 수뇌부들의 얼굴 위로 결연한 감정이 떠올랐다. 이렇게 된 이상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룬베일의 목적은 지성체와 우주의 멸망이었다. 싸움을 회피하고 도망친다 해도, 결국 우주가 멸망하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제아무리 두렵고 무섭다 해도 결국 목숨을 던져서라도 맞서 싸워야 했다. 가만히 앉아서 멸망을 받아들일 게 아닌 이상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것이다.

다들 결심을 굳힌 그때, 누군가가 슬며시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구했다. 루네리아가 허락하자 그가 한 가지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늦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이미 지구로 향했다면 뒤쫓아 가기엔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대로라면 그룬베일이 먼저 지구에 당도하게 되겠죠.”

일리 있는 말이었다. 현재 가진 이동수단은 여러 가지 존재하지만, 가장 빠른 것은 워프항행이었다. 워프 항행은 전함의 성능고하 불문하고 대체적으로 이동하는 데에 걸리는 소요시간은 비슷하므로 먼저 출발한 자가 먼저 도착하는 건 당연했다.

결국 먼저 출발한 그룬베일이 지구에 먼저 당도하는 건 이미 정해진 결과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지구를 빼앗긴 뒤에 자신들이 뒤늦게 도달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루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현재 그룬베일과 인베이더 함대는 워프 항행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거지요.]

그녀는 현재 그룬베일과 인베이더가 1500년 전에 가해졌던 모종의 의례법진에 의한 금제를 받고 있으며, 지구로 접근하기 위해선 워프와 같은 수단을 사용할 수 없음을 설명했다.

“으음, 워프를 사용할 수 없다면 그들이 지구에 당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앞질러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가능하지요.”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그제야 가능성을 점쳐보기 시작했다. 그룬베일에게 대적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지만, 승산이 있다면 그와 대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단언하는 그 말에 다들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이름도 거의 들어보지 못한 낯선 변두리 행성에서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 날 터. 그들은 가진 바 모든 수단과 힘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럼 지금부터 가용 가능한 전력을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곧장 지구로 향하지요.”

“저희도 동참하겠습니다.”

“제 가문도 전력을 내놓지요.”

그들은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과 자원, 자금을 내놓기로 했다. 어차피 우주가 멸망하게 되면 전부 없어질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낌없이 내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헌데 그때, 베네트 국장이 손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할 일이라면?”

베이노아 수상이 의아한 기색으로 묻자, 베네트 국장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일단은 다들 집안 청소부터 해야겠지요. 오래 전부터 집안을 좀먹어온 벌레들부터 일소하고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베네트 국장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꺼낸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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