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22화
‘그리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걸 보니, 일정 시점이 되어야 밝힐 수 있는 사안이라는 말이겠지.’
신들이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볼 수 있는 정보는 다양하지만, 이렇듯 시기에 따라 공개할 수 있는 부류의 정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미래에 관한 것. 물론 대단치 않은 내용의 미래 정보라면 루네리아 여신도 이렇게 뜸 들여가며 때를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즉 물질계에 지나친 간섭이 될 수 있는 미래 정보라는 의미일 터.
그리고 여신이 말한 그 때라는 건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된 사안의 미래가 현재가 되는 순간일 게 분명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루네리아 여신이 자신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걸 보면 그때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양 측 수뇌부의 회의는 한창 진행되었다. 제국이 공화국을 침공한 사태를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작 자리를 마련한 루네리아 여신이 당분간 입을 다물고 있으니, 때가 될 때까지 그들끼리 나름대로 대응책을 짜 내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회의 도중 속속 올라오는 전황보고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는군. 알카데인 황제가 초월자가 됐다고? 심지어 중위신 이상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 윌키아 여신의 가호조차 받지 못하게 된 그가 초월자가 됐다니. 대체 황제가 무슨 수를 쓴 거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악독한 금기의 의식을 치른 게 분명하오. 윌키아 여신의 권능만 빼면 일반인이나 다름없던 그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초월자가 된단 말이오? 그것도 중급 이상이나 되는?”
그들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개 필멸자를 하루아침에 초월자로 만든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지만, 단숨에 몇 단계를 뛰어넘어 중급신이 된다는 건 더 비상식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드러난 현실을 마냥 부정할 수만도 없는 일. 그에 맞춰 대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뜻밖의 소식이 당도했다. 황제의 터무니없는 권능 앞에 공화국 함대가 전멸 위기까지 놓였지만, 유태진의 놀라운 분전과 예상치 못하게 가세한 아문과 조나단 덕분에 어떻게든 후퇴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아르센티아 주역을 내준 참패라 해야겠지만, 중급 신이 된 알카데인 황제로부터 무사히 후퇴했다는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문이라니! 제국의 군부대신이 어째서?”
“전쟁을 반대했다가 황제에게 숙청당할 뻔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아문은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조나단이라니. 이건 정말 예상 못한 일인데.”
아문의 합류도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웠지만, 조나단이 끌고 온 전함 아마페레오스의 존재는 충격 그 이상이었다. 일개 전함이 초월자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상리를 벗어난 일이었으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프론사이드 가문의 가주인 가이란 프론사이드에게로 집중되었다. 졸지에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된 그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나단이 가문을 나간 지 꽤 오래됐습니다. 저도 저런 전함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누군가가 다시 한 번 확인 차 물었다.
“그럼 저 전함은 프론사이드 가문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겁니까?”
“예, 저나 저희가문은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 아마도 조나단이 독자적으로 건조한 전함일 겁니다.”
가이란 프론사이드가 그렇게 공언하자, 다들 기가 막혀하거나 어이없어하면서도 납득했다는 얼굴이 되었다.
“허 참···.”
“하긴 그 집안 사정이 그랬었지.”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그가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했겠지만, 가이란 프론사이드의 말이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프론사이드 가문의 조나단과 리스티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었다. 역대 급 천재들임에도 불구하고 가문 내의 불화로 그곳을 나와 독립했다는 사연은 꽤 유명했다.
물론 두 남매가 별다른 실적을 내지 못했다면 그냥 묻혔을 해프닝이겠지만, 그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수많은 신기술을 개발해냈다. 그 중에는 가히 세기의 혁신이라 할 만한 기술도 여럿이었으니 기업은 물론이고 우주의 유력한 세력들이 모두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조나단이 홀연히 사라져 몇 년 동안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그가 난데없이 아르센티아 주역에 나타나 위기에 처한 공화국 함대를 구원한 것이다.
가이란 프론사이드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직계가 아닌 서얼이라는 문제 때문에 가문을 떠난 두 자식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믿기지 않는 행보를 걸어온 두 자식은 가문의 역량마저 뛰어넘어 이젠 초월자의 권능을 구현하는 전함까지 건조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모든 이들이 조나단을 경외와 탐욕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힘들어지겠군.’
이번 일은 단순히 혁신적인 기술 개발 정도로 치부 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초월자의 경지가 재능과 운, 그리고 환경이 따라줘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면··· 조나단이 건조한 초월적인 전함, 초월신함은 인간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초월자나 다름없었으니까.
지성체들이 사는 수십 개의 행성을 통틀어도 하급은 고사하고 반신 급 초월자 하나 나오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초월신함의 건조기술 가치가 얼마나 막대한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우주의 세력 판도를 뒤집을지도 모를 기술인 것이다.
물론 저만한 전함을 대거 양산한다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몇 척만 건조할 수 있다 해도 막대한 전력이 될 터.
이를 탐내지 않을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프론사이드 가문과 더 이상 연관이 없다는 말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저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당장은 제국의 준동 때문에 경거망동 하진 못할 테지만, 후에 여유가 생기고 나면 탐욕을 드러낼 것이다.
‘아들 녀석도 다 생각이 있으니 그런 함을 드러낸 걸 테지.’
돌아가는 상황이 우려스럽긴 했지만, 가이란은 조나단을 믿기로 했다. 철두철미한 성격인 녀석이 초월신함을 드러내기로 결정했다면 그럴만한 이유나 계산이 섰다는 뜻이었다.
일단 회의의 주제는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조나단의 초월신함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거기에 매달려 있기엔 현재 사태가 심각했다.
“아무튼 사태가 심각하군. 황제가 이렇게 강해지다니 말이야.”
“심지어 반신 급에서 중급 초월자가 되었다고 하더군. 대체 무슨 금기의 의식을 치른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도 비상식적이야.”
“이런 게 가능하긴 한가?”
이 자리에 모인 공화국과 연합의 수뇌부들은 하나같이 마이스터 급 이상의 고위 영능력자들이었다. 그렇기에 황제가 하루아침에 초월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인베이더들이 지성체들을 멸망시켜 얻는 업으로 보다 상위의 단계로 나아간다고 하지만, 그건 그걸 다룰만한 신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단지 특정의식을 치른다고 해서 필멸자를 초월자 수준까지 격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면 이 우주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초월자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치른 의식의 정체를 확인할 길이 없는 지금, 더 이상 여기에 시간을 쏟는 건 무의미했다.
그래서 베네트 국장이 말했다.
“그 자가 치른 의식의 사실여부야 어쨌든, 황제의 강함만큼은 명백한 현실이지. 이제부터 그런 괴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좋겠군.”
“으음.···”
그러자 다들 침묵에 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급 신은 제국의 수호신인 윌키아 여신과 거의 비슷한 반열이었다. 물론 중위 신 중에서도 높고 낮음의 격차가 꽤 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 쯤 되면 물질계에 속한 힘으로는 거의 대적할 길이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물론 연합이나 공화국 양측이 보유한 반신 급 초월자나 전력을 모두 동원하면 승산이 아주 없진 않겠지만, 문제는 인베이더였다. 황제와 제국이 준동하게 된 원인에 인베이더의 부추김이 있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는 마당에 전력이 급감한 두 세력을 덮치기라도 한다면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다들 고심에 빠져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울림이 시공을 뒤흔들었다.
----!
이 울림은 물리적으로 현세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파문! 심지어 그 규모도 실로 터무니없어서 전 우주공간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이 자리에 고루 영향을 미쳤다.
“크윽!”
“허으···”
여러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개중에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의장에 모인 수뇌부들은 다들 높은 경지에 이른 영능력자들이다. 경지가 남다른 탓에 다른 이들보다 영적 감응력도 그만큼 더 민감해서 지금의 영적 파문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믿기지 않는 파장이군. 이런 거대한 영적 울림을 대체 누가?”
베이노아 수상과 베네트 국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몸을 추슬렀다.
심상치 않은 현상이었다. 이런 영적 울림은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 말은 어떤 강력하면서도 높은 격을 지닌 존재가 발한 울림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정말 믿기지 않는 규모군. 이 정도면 초월자 중에서도 상위 수준은 되어야 할 터인데···.’
베네트 국장과 베이노아 수상은 지금의 영적 울림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진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적어도 항성계 규모는 아득히 넘어섰다는 것이다. 아니 이곳에 마련된 온갖 탐지기기와 센서, 그리고 인공지능 시스템의 분석에 따르면 적어도 은하계 규모는 넘어 섰을 거란 예측이 나왔다.
그것도 예측 범위를 최소한으로 잡아서 그 정도였지, 어쩌면 그 이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지금까지 회의장 한편에 자리를 잡은 채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있던 여신 루네리아가 서서히 반응했다. 감겼던 두 눈을 조용히 뜬 그녀는 동요하는 두 세력의 수뇌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군요.]
“때라 하시면···.”
[이젠 여러분들께도 말할 수 있는 시점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비로소 침묵을 깬 그녀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한 때라는 것은 바로 영적 울림이 퍼져나가는 이 시간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었다.
베네트 국장이 급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그리고 때가 되었다면, 여신께서는 이 현상의 정체를 아신단 겁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모를 수가 없지요.]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빛이 더욱 깊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더없이 무거운 표정으로 사실을 고했다.
[이건 분명 고위 신격의 강림. 바로 인베이더의 수좌 그룬베일이 물질계에 강림하면서 발생한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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