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21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룬베일이라니! 그는 1500년 전 이후로 지금까지 은둔한 채 한 번도 나선 적 없는, 인베이더의 수좌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그자의 영자패턴이 왜 황제에게서 검출된다니 설마 그 자의 영혼이 지금 황제폐하의 몸에 들어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바르투인은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애써 부정하였다.
황제는 무려 중급 신에 버금가는 힘을 손에 넣은 상황이었다. 그룬베일이 제아무리 최상급 신이라 하더라도 황제의 육체를 강탈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만일 그런 게 가능했다면 물질계에 간섭할만한 간섭력을 지난 하위 신들의 몸을 상위신들이 강탈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벌어졌을 것이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바르투인은 황제와 연결된 통신라인으로 크게 부르짖었다.
그런 간절한 외침이 닿기라도 한 걸까? 황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황제의 반응은 바르투인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홀로그램 스크린에 비친 황제의 입매 위로 비틀린 미소가 맺혀 있었다.
[참으로 애달픈 부르짖음이로구나.]
조소어린 영언이 섬뜩한 형태로 와 닿는다. 그것은 황제의 것과 달리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바르투인을 충격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럴 리가! 황제 폐하는!? 그분은 어떻게 된 거냐? 그리고 네놈은 대체 누구지?]
[후후후. 잘 알면서 묻는군.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가?]
[말해! 말하라고! 네놈은 누구며, 어째서 네놈이 황제폐하의 몸을 차지한 거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추궁하는 바르투인에게 그는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필멸자야. 잘 들어라. 네가 찾는 황제는 더 이상 없다. 나는 어둠과 그림자의 좌 그룬베일. 네놈들이 이름붙인 인베이더의 수좌니라.]
그가 내뱉은 영언은 멀리 퍼져나갔고, 제국 함대의 모든 이들이 그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그룬베일!?]
[인베이더의 제 1신좌잖아?]
[맙소사! 그 괴물이 황제폐하의 몸을 차지했다고?]
[우리 제국은 이제 끝났어.]
제국인들에게 있어 황제의 존재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자신들을 다스리는 지배자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대로 윌키아 여신의 대행자였으며, 신적 권능으로 제국을 수호하는 수호신이었던 것이다.
헌데 그랬던 황제가 몸을 강탈당했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너무나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충격 이후에는 절망과 공포가 뒤따랐다.
바르투인 총사령관은 어떻게든 정신을 수습해 대응에 나섰다. 그 본인도 다른 승무원들처럼 패닉에 빠질 것 같았지만, 수만 척에 이르는 함대를 책임지는 자로서 이성을 놓을 순 없었다.
[다들 정신 차려라! 저 자는 황제폐하가 아니다. 우리의 주적인 그룬베일이야! 살고자 한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즉시 대응하라!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셈이냐?]
그의 일갈이 전 함대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직도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다.
승무원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룬베일은 그들에게 대응할 여유를 줄 생각이 없었다.
[하잘 것 없는 발버둥을 치는구나.]
갖잖다는 듯 떠오르는 조소. 그와 함께 그룬베일의 광대한 영언이 섭리를 일그러뜨리며 퍼져나간다.
<<모두 죽어라.>>
그것은 권능에 닿은 절대명령권. 상위신마저 넘어선 그룬베일의 선언을 이겨낼 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화아악!
이 일대에 죽음이 펼쳐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멸하는 그 힘은 실력과 계급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죽음을 내렸다.
[커···어어어.]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으으으···.]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제국 함대의 승무원들은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이미 확정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총사령관 바르투인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핏발이 선 두 눈을 부릅뜬 채 경악과 불신을 토해냈다.
[이··· 이럴 수는··· 이럴 수는···.]
그렇지만 그 이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총사령관인 동시에 마이스터 급의 강자였지만, 죽음을 언도한 그룬베일의 선포 앞에선 일개 필멸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무인행성 QX-NA01 일대의 주역이 고요해졌다. 이제 이곳에 남은 것은 시신만 그득하게 태우고 있는 제국의 전함들뿐이었다.
그룬베일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한편 리겔은 바로 눈앞에서 전개된 압도적인 광경 앞에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수백만에 이르는 제국군인들이 한순간에 사망해 버렸으니까.
심지어 화려하거나 대단한 수를 쓴 것도 아니었다. 고작 내뱉은 말 한 마디만으로 하루살이마냥 맥없이 죽어나간 것이다.
리겔은 물질계에서 아무런 간섭이나 제약 없이 사용되는 신의 권능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았다.
‘··· 직접 보고도 믿겨지지가 않는군. 이런 게 바로 상위 신들이 가진 힘이란 건가?’
경이롭다 못해 두려울 정도다. 저 제국 함대에는 함의 운용에 필요한 일반 승무원뿐만 아니라 고위 영능력자들도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리겔 자신과 맞먹거나 그보다 더 강력한 자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들마저 살충제에 노출된 벌레처럼 죄다 죽어 나자빠져 버렸다.
결국 상위 초월자 앞에선 필멸자 따윈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일개 벌레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믿기지 않는 이적을 펼쳐 보인 그룬베일은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이고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좀 더 업을 충당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매달리고 있을 수만도 없지.]
알카데인 황제의 몸을 차지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표치까지 달성한 것은 아니었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제국 함대를 통해 공화국 함대를 전멸시켜서 얻게 된 막대한 업을 바탕으로 좀 더 완벽하게 강림했을 테니까.
지금 황제의 몸에 강림한 그룬베일의 힘은 본래 힘에 못 미쳤다. 그의 본신은 최상위 급이었지만, 지금은 상위신 중에서도 좀 괜찮은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본신의 힘을 완벽하게 되찾기 위해 업을 충당하러 찾아다니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 다들 눈치 챘겠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지성체들의 공통된 주적인 인베이더의 수장 그룬베일은 수많은 적을 두고 있다. 그는 언제나 주시의 대상인 만큼, 황제의 몸을 차지하고 물질계에 강림한 사실도 파악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계획대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의 시선이 리겔에게로 옮겨졌다. 그러자 리겔이 흠칫 떨며 고개를 숙였다.
[자, 리겔 네 녀석이 맡은 바를 행하라. 그러면 곧 네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리겔은 즉시 움직였다. 아공간에서 꺼낸 무수한 디멘션 쿼츠(차원의 파편)들이 우주공간에 뿌려진 순간, 그것들이 그의 이능에 공명하면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형성되는 거대한 변동중력원. 그것은 시공간에 구멍을 뚫고, 기존의 워프로는 이동이 불가능한 차원단층마저 초월하는 대규모 웜 홀을 형성시켰다.
[오는군. 우리의 군세가!]
데이모드의 중얼거림과 함께 웜홀을 통해 무수한 함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인베이더의 주력 함대였다.
그들은 오늘의 계획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내두고서 자신들의 세력권 내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리겔이 웜 홀을 열자마자 이렇듯 대거 몰려나올 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규모는 제국 함대에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게다가 함대와 함께 온 자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았다.
마지막 전함까지 웜 홀을 빠져나왔음을 확인한 그룬베일이 말했다.
[다들 사전에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다시 말하도록 하지. 이제부터 우린 지구를 침공하도록 하겠다. 꽤 먼 곳이지. 심지어 워프도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서둘러야 한다. 함대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력으로 항진(航進)한다.]
[예!]
즉시 항해 준비를 하는 함대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룬베일.
마음 같아선 목표인 지구까지 곧바로 워프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1500년 전의 금제가 아직도 그룬베일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엑스칼리버는 황제 녀석을 상대하다 부서져 사라졌고, 1500년 전의 금제도 이젠 거의 유명무실해졌지. 그런데도 그때의 잔재가 꽤나 강력한 억지력을 발휘하는군.’
그렇지만 이런 족쇄조차 강림한 지금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정명한 인과율을 가진 알카데인 황제의 육신에, 세계수가 만들어낸 반영자코어 데스트가 막대한 업은 그에게 거의 무한한 권능 행사를 가능하게 해 주었으니까.
이제 자신이야 말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물질계에 실질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진정한 신이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이 계획을 무려 수백 년 이상 준비하고 추진해왔던 것이다.
어느덧 그룬베일의 시선이 우주 저 편으로 향했다. 그곳은 지구가 있는 방향이었다.
[조만간 그리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겠군.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도록 하겠다, 천화운.]
그렇게 뜻 모를 말을 내뱉은 그룬베일은 인베이더의 함대와 함께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함대는 곧 광속에 버금가는 속도로 뻗어나가며 우주공간을 가로질렀다.
* * *
제국이 공화국을 침공한 직후부터 연합과 공화국의 핵심 수뇌들은 두 세력 간의 중립지대인 [모운헤인]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이곳에 모인 것은 이번 제국의 침공사태를 두고 어떻게 함께 힘을 합쳐 대응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면 두 세력의 수뇌부가 굳이 직접 움직여가면서 모일 이유가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여신 루네리아가 그들을 이 자리로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신 루네리아는 아르탈 행성 연합의 수호신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그 이상으로 대단했다. 그녀를 섬기는 신도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들은 삼대 세력 전체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가 우주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기여해온 것들을 생각하면 3대 세력의 수뇌들이라 해도 결코 그녀의 말을 무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그들을 불러낸 여신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물어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베이노아 수상은 그녀의 의중을 읽어냈다.
‘루네리아 여신이 기껏 우릴 불러내놓고 아무 이유도 없이 입을 다무는 게 아닐 거야. 그렇다면 아직은 말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건데··· 역시 이야기할 내용이 섭리에 제약을 받는 부분인가 보군.’
신들은 필멸자보다 차원이 다른 힘을 다루고 보다 많은 정보들을 열람할 수 있지만, 그만큼 여러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신이 말 못하는 입장도 나름 납득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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