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95화 (396/448)

16권-20화

* * *

감동적 여운을 만끽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눈을 감은 채로 황홀경에 빠진 듯 웃어대던 황제가 돌연 우뚝 멈춰 섰다.

[뭐지?]

[폐하의 반응이 이상하다. 뭔가 심상치 않아.]

무인행성 일대의 우주공간이 요동치는 현상에 동요하던 제국 함대는 황제에게서 벌어진 이상 현상에 영문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조금도 미동을 하지 않는 게 마치 석고상이라도 된 듯 하지 않은가?

[으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

현재 사령관을 맡고 있는 바르투인은 찜찜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몇 번이고 황제나 그 측근인 게리드에게 통신을 날렸지만 전혀 닿지 않았다. 무인행성의 제단에서 발생되는 강력한 영자파에 의해 통신파가 차단된 듯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었다.

[직접 전령을 보내기라도 해야 하나?]

헌데 그때였다. 황제를 보좌하기 위해 무인행성 QX-NA01까지 뒤따라간 두 사람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바로 리겔이었다. 그가 석상처럼 굳어진 황제를 향해 다가가자, 게리드가 뼈만 남은 두개골의 눈두덩에서 스산한 귀화를 피워 올리며 반응했다.

[네놈, 감히 어디로 다가가는 거냐? 폐하는 아직 의식을 치르시는 중이다. 의식 중에 접근하는 건 금지되어 있음을 네놈이 모르진 않을 텐데.]

섬뜩한 살기를 발하며 리겔의 앞을 막아선 게리드.

그는 애당초부터 리겔을 신뢰하지 않았다. 인베이더와 접점을 갖기 위해 한동안 리겔을 용납했을 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리겔은 태연자약했다.

“물론 잘 알지요. 하지만 이미 의식은 모두 끝났습니다. 굳이 게리드 경이 제 접근을 막을 이유가 없을 텐데요.”

[무슨 소리를? 아직 폐하께서는 의식을 찾지 못하셨다. 그렇다면 의식이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인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더욱 경계하며 기세를 드러내는 게리드. 그러자 리겔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오랫동안 유지해온 역할극에 너무 깊이 빠져 드셨군요. 이제 본래대로 돌아오셔도 됩니다, 게리드 경. 아니, 이제는 데이모드 경이라고 해아 할까요?”

[데이모드? 갑자기 그게 무슨!?]

게리드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난데없이 자신을 두고 데이모드라고 부르다니.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인가.

하지만 리겔의 대답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죽음의 인도자 데이모드. 신좌 죽음의 왕 모르스가 님의 사도 아니십니까. 이제 그만 깨어나시지요.”

[크으으···!]

그 순간, 뼈밖에 남지 않은 게리드의 전신이 낮은 신음성과 함께 부르르 떨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뿐.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킨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격변하는 기세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게리드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영적 파동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들끓던 기세를 가라앉힌 게리드가 감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정말 오래간만이군. 그 낯짝을 다시 마주하게 된 게 무려 십여 년 만인가?]

“정확히 12년 하고도 2개월 쯤 되었죠.”

어깨를 으쓱하며 답을 하는 리겔의 태도에, 게리드의 안광이 깊게 가라앉는다. 그는 이전의 게리드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게리드란 존재는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인베이더의 신좌 모르스가의 사도 죽음의 인도자 데이모드.

그는 무려 수백 년 동안 제국에 잠입해 게리드란 이름으로 활동해 왔으며, 자신에게 게리드라는 가상의 인격마저 덧씌워가며 황제의 측근으로 활동해 왔던 것이다.

[네놈이 날 깨웠다는 건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물론입니다. 이미 의식은 마쳤습니다. 이제 그분께서 깨어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죠.”

[그렇군. 드디어 대업의 완성단계에 다다른 건가.]

리겔의 대답을 들은 게리드의 시선이 제단 위에 서 있는 황제를 향해 옮겨졌다.

마침 돌처럼 굳어진 채 서 있던 알카데인 황제가 드디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은 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을 본 리겔과 게리드가 빠르게 다가가 황제 앞에 부복하며 고개 숙였다.

“진심으로 감축 드립니다.”

[모든 신좌의 주인이신 당신께서 대업을 달성하신 것을 감축 드리옵니다.]

그 둘의 축사에 황제의 두 눈이 그들을 향했다. 그의 얼굴 위로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심유해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참으로 오랜 기다림이었지. 그대들 덕분에 이제야 겨우 여기에 도달했구나.]

알카데인 황제, 아니 인베이더의 제 1신좌 그룬베일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그러자 끝을 알 수 없는 무궁무진한 힘이 느껴진다.

물론 본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해도 거의 대부분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그룬베일이 낮게 감탄하였다.

[역시 대대로 윌키아의 힘을 부여받았던 황제의 혈통답군. 내 화신으로 사용하기엔 이만한 육체가 없어.]

알카데인 황제가 치른 의식은 사실 필멸자를 초월자로 이끄는 의식이 아니라, 인베이더의 수좌인 그룬베일을 강림시키기 위한 의식이었다.

하지만 욕망에 두 눈이 멀어버린 알카데인 황제는 의식에 숨겨진 진의를 알지 못했고, 결국 오늘날 육체를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상태는 어떠십니까? 만반의 준비를 거쳐 치른 의식입니다만 부족함은 없으신지···.]

게리드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지만, 황제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괜찮군. 이 정도면 쓸 만한 것 같다. 충분히 예상했던 수준이군. 하긴 론데니움 제국의 황제들은 대대로 윌키아의 권능을 부여받았었지. 그것이 수대에 걸쳐 이어지다 보니 이젠 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부족함이 없는 몸이 되었구나.]

그룬베일이 황제의 육신을 노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의식을 치르기 위한 막대한 제물을 충당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영향력을 지닌 데다, 신을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는 육체마저 가졌기 때문이었다.

윌키아 여신의 권능을 대대로 받아들인 덕분에 그들은 상위신 이상의 존재의 강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일종의 영매체질로 진화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의 몸은 그룬베일이 강림하기도 전에 그 영압을 감당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부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그룬베일의 눈매가 일순 살며시 일그러졌다.

[그런데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크기가 예상했던 것보단 조금 부족한 것 같군. 데이모드, 어떻게 된 거냐? 제물이 부족했었나?]

그룬베일이 가진 본신의 힘은 여전히 변함없었지만, 문제는 알카데인 황제의 육체였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3차례에 걸친 의식을 거치면서 그룬베일처럼 최상위 신격의 힘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바뀌었을 테지만, 지금의 육신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자 게리드, 아니 데이모드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지만··· 저희들로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공화국 함대를 전멸시키는 게 본래의 계획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자들의 등장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긴 그렇군. 유태진에 아문, 그리고 조나단이라 했던가? 확실히 그들의 역량은 무시할 바가 못 되지. 특히 초월신함의 등장은 내게도 조금 충격이군.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그룬베일은 알카데인 황제의 앞을 막아섰던 초월신함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한낱 필멸자의 손에 의해 건조되었지만, 그런 한계를 뛰어넘어 초월자의 힘을 가지게 된 전함. 그것이 바로 초월신함이었다.

물론 그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 우주의 문명 레벨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도대체 조나단이란 녀석은 어떻게 그런 초월신함을 건조한 것일까?

[역시··· 대충 타차원의 문명과 얽힌 듯 하군. 정확히 읽혀지지는 않지만, 이곳의 문명과 지식수준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

그룬베일은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최상급 신에 다다른 그의 열람 레벨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상위신 급이나, 혹은 타 차원과 관련된 고위 정보는 그도 보지 못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아마 조나단이란 녀석이 건조한 전함도 그런 것들과 관련된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초월신함 따위가 감히 내 행보를 가로막을 순 없을 테니까.]

제아무리 초월신함이라 해도 그룬베일이 가진 힘에 비한다면 하찮을 뿐이다. 알카데인 황제야 정상적인 초월자가 아닌 만큼 어설픈 면이 있어 후퇴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에게는 한낱 애들 재롱거리조차 못되는 게 현실이었다.

그룬베일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의식마저 완성한 지금, 더 이상 이 무인행성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몸을 띄우자 데이모드와 리겔도 마찬가지로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날아오르기 시작한 셋은 어느새 대기권을 넘어 우주공간에 도달하였다.

그룬베일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우주의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지구로 향할 것이다. 1500년 전에 이루지 못했던 그 과업,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달성하겠다.]

지구가 존재할 저편을 향해 손을 뻗는다. 마치 눈앞에 지구가 존재한다면 당장이라도 손아귀 안에 움켜쥘 듯한 모습이었다.

리겔과 데이모드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해야 할 게 있군.]

그룬베일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무인행성을 보호하듯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 제국 함대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편 제국 함대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사태에 직면한 나머지 다들 큰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황제의 안위를 위해 항시 모니터링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제의 고유 영자패턴이 생판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달라진 것이다.

[폐하의 영자패턴이!?]

[이럴 수가! 어떻게 된 거지? 폐하의 고유 영자패턴과 전혀 다릅니다!]

오퍼레이터의 바르투인 사령관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럴 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해봐라!]

[틀림없습니다. 이 영자패턴은 황제폐하의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조성은 분명 황제폐하의 것이 맞는데 영자패턴은 전혀 일치하는 바가 없습니다. ]

[그럼 지금 황제폐하가 우리가 보는 앞에서 다른 자와 바꿔치기라도 되었다는 말이냐?]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던 바르투인 사령관은 불현듯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리고 말았다.

육체는 같으면서도 영자패턴만 달라지는 기존의 사례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도무지 현실성이 없었다. 바로 고스트 계열의 언데드에게 빙의당하는 바람에 육체를 빼앗긴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황제는 그냥 필멸자도 아니고 무려 중급 이상의 초월자가 되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그런 신적 존재에게 빙의하여 육체의 주도권을 강탈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이 우주에 존재할 수 있을까?

[서둘러! 기존의 영자패턴 데이터들과 대조해서 확인해봐! 어서!]

바르투인은 이를 악물며 오퍼레이터들을 재촉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애써 부정하던 그때, 전혀 상상도 못했던 사실이 곧 그의 귓전으로 전해졌다.

[영자패턴 분석 확인. 본 함의 중앙 시스템 멜데리스의 라이브러리에 기록된 역대 영자패턴 누적 데이터들과 대조한 결과······ 이, 이건!?]

보고를 이어가던 오퍼레이터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굳어지더니,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간다.

[···믿을 수 없게도 인베이더의 제1 신좌··· 그룬베일의 영자패턴과 일치합니다.]

[뭐라고!?]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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