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18화
* * *
아르센티아 주역을 장악한 제국함대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르센티아 주역일 뿐, 그곳을 허브로 삼는 주변의 다른 항성계들은 애당초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공화국 측에서는 대체 제국이 무슨 꿍꿍이속인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괜히 지레 겁먹고 후퇴한 것 아니냐며 베이노아 수상을 성토하는 목소리까지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알카데인 황제는 오히려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중이었다.
[쥐새끼 같은 것들. 감히 짐을 속이다니···.]
설마 이런 식으로 몰래 후퇴할 거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기껏 초월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전함 따위의 눈속임에 속아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분을 참기 어려웠다.
‘아직도 부족하다.’
그는 중급 초월자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한 지금도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여신 윌키아의 권능의 기생하던 처지에서 벗어나 이제 간신히 한 사람의 초월자로서 오롯이 설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부족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가 이룬 신격과 신위 신성은 중급신에 다다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의식을 통해 일궈낸 결과물일 뿐이다.
스스로의 노력과 깨달음으로 중급신에 도달한 존재들과 비한다면 연륜이나 경험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이걸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시간뿐이지만, 알카데인 황제는 그때까지 참고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지. 그들보다 더 압도적인 경지까지 올라서면 된다.’
황제가 바라는 것은 고작 중급신 따위가 아니었다. 상위신, 아니 그것을 넘어선 그 이상의 단계까지 올라서는 게 바로 그의 목표인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면, 감히 윌키아 여신을 배신하고 이렇듯 독자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오랜 기다림과 수고가 드디어 결실을 맺을 때가 왔다.
기함 로베르타인 중심에 있는 대전 안으로 한 인영이 다급히 들어섰다. 그 자는 황제 앞에 부복하더니 보고를 올렸다.
[폐하, 드디어 제단이 완성되었습니다.]
[오오, 그래? 수고했구나! 리겔, 짐은 그대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리겔을 크게 치하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토록 바라마지않았던 것이 이제야 겨우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리겔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은 부척이나 부드러웠다.
지금까지 수십 년 간 제국과 인베이더 사이를 오가며 이번 계획을 주도해온 리겔의 공이야말로 갑이라 할 수 있었다.
만일 리겔이 없었다면 이 계획은 적어도 수십 년 이상 더 늦춰졌을 것이다. 아니 계획이 완성되기도 전에 자신의 수명이 다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흥분에 찬 황제가 대전의 좌측에 서 있던 게리드를 돌아보며 외쳤다.
[가자, 게리드. 드디어 짐이 우주의 최고 자리에 오를 날에 왔다. 오늘로서 짐은 이 우주를 아우르는 진정한 신이 될 것이니라.]
[Yes, your majesty!]
게리드는 충성스런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고는 앞장서 나서는 황제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부복하고 있던 리겔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헌데 그 순간, 황제의 등 뒤를 응시하는 리겔의 두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아르센티아 주역의 중심에 자리한 무인행성 QX-NA01.
태양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거의 목성 급 규모와 맞먹는 거대 행성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자원도 매장되어 있지 않았고, 딱히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도 아니라서 이렇듯 버려진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제국의 함대가 그 주변에 가득 차 있었다.
[음, 이게 바로 마지막 의식을 위한 제단이로군. 좋구나.]
무인행성QX-NA01의 지표면 위에 내려선 알카데인 황제는 자신의 눈앞에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 앞에 작은 감상을 내뱉었다.
그것은 마치 신을 섬기기 위해 지어진 신전 같았는데, 하계의 미천한 것들이 자신에게 바치는 공물처럼 느껴져 무척이나 기꺼웠다.
리겔의 주도 하에 지어진 이 신전 형태의 제단은 그 크기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수도에 버금가는 크기였지만. 제국 함대의 공병부대가 총 동원되다보니 불과 이틀 만에 쌓아올릴 수 있었다.
황제는 제단을 향해 발을 내딛으며 말했다.
[짐은 이곳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 이 우주를 다스릴 위대한 존재로서!]
계단을 따라 천천히 제단 위를 향해 올라섰다. 중급신에 도달한 황제는 자신이 인지한 곳이라면 어디든 공간을 초월해 이동할 능력을 가졌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제단의 계단을 따라 직접 걸어서 올라가는 것 또한 의식의 절차 중 하나였다.
제단 위에 올라선 그는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는 크게 외쳤다.
[그러니 그대들도 잘 지켜보아라. 그리고 두 눈에 새겨라! 그대들이 세운 업적은 역사에 남을 것이니, 우주의 만민이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우우우우!
그 외침이 시발탄이 된 것일까? 제단이 기이한 반응을 보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제단 위에 새겨진 형이상학적인 문양들이 일제히 발광하면서 거대한 의례법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게리드는 넋 놓은 듯 바라보면서 감격에 차 외쳤다.
[오오, 드디어 폐하께서 정점의 자리에 올라서시는구나!]
이 날을 위해 그가 음지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활동해 왔던가. 오직 황제를 위한 변치 않는 충심이 없었더라면 결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이로서 황제는 절대적인 존재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게리드 자신도 황제의 권능에 힘입어 그동안 바라마지 않던 초월자로 발돋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쿠구구구!
제단에서 시작된 공명이 진폭이 커질수록 이를 감싸고 있는 의례법진도 더욱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덧 끝없이 확장해 나가더니, 무인행성QX-NA01의 지표면 전체를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제단의 공명이 우주공간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물리적인 거리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듯 아르센티아 주역을 벗어난 뒤에도 끝없이 뻗어나가 저 먼 우주 끝까지 닿아가고 있었다.
투두두두!
“···뭐지?”
“설마 지진?”
오베른 행성 주둔군 병력들은 때 아닌 진동에 당황해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연합의 병력이 주둔한 지도 어언 백 년에 가까워져 있었다. 헌데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지진을 경험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 진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베른 행성 주둔군 사령관 로베르타인은 갑작스런 이변에 당황스러워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지진이라니···. 이곳에서 지진이 난다는 말은 들은 적 없는데. 오퍼레이터, 확인해봐라! 원인이 뭔가? 지금까지 비축된 데이터에 이런 현상에 대한 기록이 있나?”
그가 오퍼레이터들을 닦달하자 즉각 대답을 내놓았다.
[백 년 전부터 이때까지 축적해온 데이터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원인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판의 이동이나 맨틀의 대류변화에 의한 지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럼 이 지진은 어디서 시작된 거냐? 지진파를 역추적을 해 봐라! 그러면 대충 원인이 뭔지는 알 수 있을 게 아닌가.”
[일단 지진 자체는 행성의 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만··· 뭔가 비정상적입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파장이 그곳에서 발생하는 게 관측되었습니다. 행성의 수명이 다 된 것도 아니고, 어떤 공격에 의해 핵이 파괴되거나 폭주하는 것도 아닌데도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오퍼레이터의 당혹한 심정이 절절이 느껴지는 보고였다. 그들로서도 이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 건지 알 수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이 원인불명의 지진 현상은 오베른 행성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인베이더에게 침공 받으면서 단 한 번이라도 세계수가 뿌리 내렸던 곳이라면 어김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무인행성 QX-NA01의 제단 위에 서 있던 황제는 직접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꼈다.
세계수가 뿌리 내렸던 행성들이 가진 막대한 힘이 자신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오오, 느껴진다. 막대한 업과 인과의 흐름이! 정녕 놀랍도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수백 수천에 이르는 행성에서 비롯되는 업과 인과율이 오직 황제 한 사람을 향해 집중되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반신 급 초월자라면 수백 수천 명을 탄생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양이었다.
[하하하! 과연··· 절대신들은 바로 이러한 눈높이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던가. 정녕 놀랍구나.]
신성과 신위 신격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상승하면서 황제는 우주를 한 눈에 관조하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최상위신을 뛰어넘는 절대신들은 우주 전체를 관조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시야 안에 담는다더니, 바로 지금과 같은 황홀감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게 분명했다.
가히 믿기지 않는 전능감.
물론 이건 격이 상승하면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일 뿐이지만, 이런 감각을 맛보는 와중에도 그의 격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중급신의 테두리를 벗어난 지는 오래였고, 이미 상급신에 도달하였다.
이제 그의 말 한마디면 어지간한 항성계 하나가 삽시간에 붕괴될 정도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받아들이고 있는 막대한 업과 인과율은 수백 수천 개의 행성을 쥐어짜 만들어낸 양이다.
그런 걸 황제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으니 격이 급격히 상승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면, 알카데인 황제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상위의 초월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막대한 업과 인과율만 받아들인다고 해서 무조건 초월자의 격이 높아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결과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그가 치르고 있는 금기의 의식 그 자체에 있었다.
초월자란 대체적으로 스스로의 노력과 깨달음을 통해 완성될 수 있지만, 섭리에 의해 자연히 탄생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예가 바로 성계신. 일정 수준 이상의 지성체가 어느 규모 이상 생겨나면 이를 보호하기 위해 우주의 섭리가 해당 행성의 업과 인과율을 뭉쳐 인격을 가진 형태의 신격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물론 성계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섭리에 의해 자연적으로 탄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러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성계신은 해당 행성의 지성체를 보호할 의무를 떠맡게 된다.
그렇기에 성계신은 해당 행성을 보호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권능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알카데인 황제가 치르고 있는 금기의 의식 또한 그러했다.
지성체가 사는 각 행성들의 사상인과율시스템을 해킹함으로서 황제 자신을 일종의 성계신화 하는 게 바로 이 의식의 진정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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