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17화
솔직히 그녀도 유태진에 의해 운 좋게 구조되지 않았다면 다른 엘프들과 같은 처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오래 버텼던 그녀에게는 기회가 주어졌고, 지금처럼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이 아쉬워질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현재의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는 편이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자신을 질시하거나 경원시하는 이들이 없었으니까. 유태진은 물론 그의 친인들이나 인피니티 킹덤의 승무원들도 이젠 그녀와 제법 친해져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친인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가끔씩은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기도 했지만, 그래봐야 그녀가 살아온 전체 삶에 비한다면 극히 일부분 뿐. 게다가 워낙 단편적인 터라 자기 자신의 것이란 실감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아쉬움을 토로하자, 슈티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차라리 잃어버린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그때의 너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제이나로서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실감하기 힘들었지만, 그런대로 납득하고 받아들였다. 슈티르가 최우선적으로 염려하고 우선시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안위였으니까.
그래서 과거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어도 굳이 슈티르에게 캐묻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세계수의 변질된 부분을 바로잡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전의 과거가 어쨌든 자신은 여전히 제이나였다.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헌데 그렇게 마음을 잡고 다시 세계수를 바로잡던 그녀는 뭔가 이상한 점을 포착하게 되었다.
분명 에메랄드 헤븐의 세계수들은 그녀의 노력으로 변질된 부분을 바로잡아가고 있었는데, 변질되었던 것 이상으로 이질적인 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예전엔 분명 없었던 것이었다.
제이나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던 슈티르가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했다.
[일종의 트랩형 술식이군. 특정 조건을 성립할 경우 발동되게 되어 있다. 설마 이런 게 세계수 안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어째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거죠?”
[술식 자체를 너무 잘게 쪼개서 분산시켜 놨다. 심지어 변질된 인자들 사이에 은밀히 감춰뒀더군. 네가 지금까지 이걸 바로잡느라 노력한 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발견되지도 않았을 거다.]
애당초 세계수 같은 유기체에 이런 술식이 존재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게 문제였다. 만일 이런 점도 고려하고 있었다면 좀 더 일찍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였다. 슈티르가 보기엔 너무 철저하게 숨겨져 있어서 작정하고 찾아봤다 하더라도 찾는게 쉬웠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요. 숨겨진 트랩형 술식이라니. 대체 무얼 위한 걸까요?”
어딘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제이나가 그렇게 묻자, 슈티르도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글쎄, 구체적인 건 모르겠군. 마법이나 각종 술식에 대한 지식이 내게 있긴 해도 이건 너무 지독하리만치 꼬아놨어. 적어도 수백 년 이상은 연구해 만들었을 것 같은데, 이걸 분석하려면 고작 하루 이틀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지.]
게다가 슈티르는 정령이었다. 마법이나 각종 술법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긴 해도, 그것이 전문 분야는 아닌 것이다.
[아무튼 인베이더 놈들은 정말 음흉한 것들이군. 세계수를 변질시켜 더럽힌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 이용해먹다니. 대체 뭘 어쩔 생각인 거지?]
“이걸 이대로 놔둬도 괜찮을까요?”
제이나로서는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들 안에 감춰져 있던 의도를 알 수 없는 술식. 심지어 에메랄드 헤븐 자체가 인베이더들이 구축한 행성요새인 만큼 그 위험성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다른 놈들도 아니고 인베이더들이 숨겨놓은 술식이다. 아마 놔뒀다간 변변치 않은 일이 벌어지겠지. 하지만 제거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이는군. 술식 자체가 세계수를 이루는 조직과 너무 많이 동화되어 있어.]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겠어요.”
그때부터 제이나는 세계수들과 교감하며 변질된 부분 안에 숨겨져 있던 술식의 인자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완전한 제거는 어려웠다. 너무 깊게 동화되어 있어, 술식 또한 세계수의 일부나 다름없었으니까. 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술식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험요소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제이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세계수 안에 내제된 이 술식이 특정 조건을 성립할 때 파편화 된 인자들끼리 저절로 조합되면서 발동된다는 점에서 착안한 방법이었다.
‘서로 공통되는 연결점을 끊어 놓으면 돼.’
물론 암호화 된 파편들을 분석하고 그 연결점마저 차단해야 하는 번거로운 방식이었지만, 어차피 제이나에게 시간은 많았다. 인피니티 킹덤 내에서도 배식 일 외에는 딱히 업무를 맡지 않은 그녀로서는 느긋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제야 간신히 끝냈군. 정말 지긋지긋한 작업이었다.]
제이나를 도와 트랩형 술식인자를 구분지어 분리하는 작업을 해왔던 슈티르는 진저리를 쳤다. 오랜 삶을 살아온 정령답게 그의 인내력도 평범하진 않았지만 참으로 지난한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게 발동되기 전까지 어떻게든 끝냈으니 다행이에요.”
[네 말대로다. 지금도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술식인데··· 만일 이게 발동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이 안 되는군.]
그 정도로 고도화 된 술식이었다. 게다가 파편화 된 상태로 암호화 처리까지 되어 있어, 이걸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수십 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주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모양이군.]
“예, 제국이 공화국을 침공하기 시작한 모양이더라고요.”
그녀는 시간 대부분을 에메랄드 헤븐에서 보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거처는 모함인 카멜롯에 있었다. 덕분에 우주에서 벌어지는 소식은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하긴 알카데인 황제 놈은 예전부터 좀 음흉스러운 구석이 있었지.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나?]
슈티르는 오랫동안 살아온 정령인데다가 다른 정령을 통해서도 여러 가지 정보들을 접해왔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번 대 황제의 성향이 어떤지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윌키아 여신의 권능에 기생하던 것이 이젠 스스로 초월자가 되었다더니···. 무슨 꼼수를 부린 모양이군.]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심각해 보였다. 인베이더들은 다시 준동하기 시작하고, 공화국은 제국의 갑작스런 침공 때문에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분열된 3대 세력이 인베이더를 감당하지 못하고 멸망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인피니티 킹덤은 어떻지?]
“조만간 저희도 그쪽으로 출정을 가게 될 것 같아요.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되겠죠.”
[하긴 더 이상 지구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구가 인베이더의 침공가시권에 접어들기 시작한 상태라지만, 당장 놈들이 쳐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연합과 공화국에 닥친 위기가 더 시급했다.
게다가 인피니티 킹덤이 보유한 전력의 비중은 연합 측에서도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그동안 인피니티 킹덤이 이룬 성과를 생각하면 어지간한 대함대에 비견할 만 했다.
그러니 이만한 전력을 지구에 처박아두고 그냥 놔둘 리 만무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황제가 음흉한 구석은 있어도 멍청하진 않았는데···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전쟁을 일으킨 거지? 게다가 공화국 내부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냥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겹치는 게 많다.’
슈티르는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는 우주의 정세들이 뭔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암중의 거대한 흐름이 지금과 같은 거대한 형세를 만들어내는 듯 보였다.
‘조만간 뭔가 큰 게 닥쳐오겠군. 우주의 정세를 뒤흔들만한 거대한 격변이···.’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딱히 이유나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쌓은 경험과 지식들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예감한 조짐은 생각지도 않던 부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갑자기 때 아닌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발밑에서 시작된 이변에 제이나의 두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지··· 지진!?”
처음에는 미약하던 흔들림은 이젠 지진을 방불케 할 만큼 커져나갔다. 심지어 이 현상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에메랄드 헤븐 전체에 걸쳐 일어나고 있었다.
[조심해라, 제이나! 결코 평범한 지진이 아니야. 자연적인 게 아니라고!]
“예!?”
정령인 슈티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지진이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님을 파악했다. 그가 땅의 정령이 아니라 바람의 정령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표면을 흔드는 파장을 읽어 내려가던 슈티르가 흠칫 놀라 외쳤다.
[설마 세계수가!?]
그랬다. 지금 에메랄드 헤븐을 뒤덮고 있는 진동은 바로 세계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뿌리에서부터 이 진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말만으로도 사태의 원인을 알아챈 제이나는 즉시 세계수와 교감을 시도했다. 세계수들 중에서도 에메랄드 헤븐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눈앞의 거목은 모든 세계수들을 통제하고 아우를 수 있었다.
교감을 시작한 그녀의 의식이 세계수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행성 전체에 뿌리 내리고 있는 세계수의 근본은 마치 심연과도 같이 깊고 거대했지만, 그녀에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깊게 파고들어간 그녀는 진동을 일으키고 있는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건!?’
에메랄드 헤븐의 땅을 움켜쥐고 있는 세계수의 뿌리들이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진동하기 시작한 원인은 바로 그 안에 존재하고 있던 정체모를 술식인자 때문이었다.
그동안 파편화 상태로 존재하던 술식인자들이 서로 결합하지 못하도록 연결점을 끊어놓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세계수와의 교감을 통해 그것들이 아득히 먼 우주로부터 날아온 외부의 파장과 서로 공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그동안 감춰져 있던 술식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슈티르, 이건 대체!?’
[그래, 나도 보고 있다. 이런 미친!]
제이나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던 슈티르는 저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만큼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어서였다.
세계수에 숨겨져 있던 트랩형 술식.
그것은 행성의 막대한 에너지와 업을 집어삼키는, 악의 그 자체로 이루어진 특이점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제이나가 장악한 에메랄드 헤븐은 외부의 파장과 공명은 하고 있어도, 파편화 된 술식의 연결점을 전부 끊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이 완성될 일은 결코 없다는 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걸로 위험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크··· 큰일이다! 세계수들이 뿌리내렸던 행성들이 위험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슈티르의 생각이 이젠 다른 행성에까지 미쳤다.
현재 인베이더는 자신들이 침략중인 행성마다 이 세계수들을 전진기지마냥 키워내고 있었다. 만일 이 세계수들이 전부 이와 같다면, 그리고 지금처럼 감춰져 있던 술식이 발동 중이라면 곧 상상도 못할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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