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16화
“누군가, 그대는?”
브라운 하이더가 묻자, 상대방이 곧장 대답했다.
[아마페레오스의 주인인 조나단 프로이나트라고 합니다.]
“아. 당신이 바로···.”
그제야 상대방의 정체를 알게 된 브라운 하이더가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한계가 어디인지 짐작조차 안 가는 강력한 전함의 주인이 이렇게 젊은 사내였다니.
물론 통신을 통해 목소리를 듣긴 했었지만, 이렇게 화면상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조나단이 통신 중에 끼어든 것 자체가 조금 불쾌하긴 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브라운 하이더는 넌지시 물었다.
“이렇게 갑자기 통신에 끼어든 걸 보면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대체 뭐요?”
[일단 우선 한 가지 여쭙지요. 총사령관께서는 황제의 목적이 아르센티아 주역을 발판으로 공화국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그게 당연한 수순 아니오? 그렇지 않다면 애당초 이곳을 노릴 이유가 없지.”
황제의 행보를 생각하면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나단은 이를 부정했다.
[물론 상식적으로 본다면 그렇습니다만, 이번 경우만큼은 예외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예외?”
[예. 이번 전쟁으로 황제가 노리는 바는 분명합니다. 단지 그 목적이 단순한 정복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브라운 하이더는 조나단의 눈빛을 통해 방금 그 말이 진실임을 읽어냈다. 물론 거짓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겠지만, 이 상황에서 거짓을 말해 그가 얻을 이득이 없었다.
“정복이 아니라면··· 그럼 대체 목적이 뭐란 거요? 뭔가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알려줬으면 하오.”
[거기까진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이 또한 섭리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거든요. 어떤 분에게 듣긴 했지만 제 입으로 발설할 수 있는 바는 아닙니다.]
“섭리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고? 그 말은 그 정보를 입수한 게 조나단 당신이 아니라···”
그가 아는 한 딱히 금제가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뭔가를 입 밖으로 내뱉는데 제약을 받는 이들은 이 우주에서 단 한 부류밖에 없었다. 바로 초월자들이었다.
신안으로 아카식 레코드를 열람하고 세상의 진실을 꿰뚫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조차 편린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존재들.
그들이 아는 정보와 지식들은 우주의 흐름을 뒤틀 수 있는 만큼, 이를 발설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섭리에 의한 제약이 따랐다.
아마도 조나단이 알고 있는 정보도 그런 경로로 얻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나단의 입에서 짐작했던 내용이 흘러나왔다.
[예, 정확히 말하자면 저희 연합을 보살피는 신이신 루네리아 여신님께서 보고 알려주신 정보들이지요.]
“으음.”
브라운 하이더 총사령관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평범한 초월자도 아니고 무려 연합의 상급 신인 루네리아 여신의 입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거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내놓은 정보일 테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해는 했소. 하지만 무슨 정보인지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믿을 수만도 없는 노릇 아니오?”
브라운 하이더 총사령관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했다. 제아무리 신이 내놓은 판단이라 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근거나 이유도 모른 채 따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조나단도 그런 그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어째서 그렇소?”
[아마 지금쯤이면 베네트 국장님과 연합의 수뇌층 분들이 베이노아 수상과 공화국 인사들과 함께 이번 사태를 두고 협의 중에 있을 겁니다. 조만간 결론이 날 테니 브라운 하이더 총사령관께서도 후퇴를 준비하시는 게 좋겠군요. 아마 이쪽으로도 곧 연락이 닿을 겁니다.]
브라운 하이더 총사령관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 말은 이미 이 사태를 예견했다는 뜻이군.”
[완전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요. 그리고 베이노아 수상이라면 저희와 뜻을 함께 할 거라 생각됩니다.]
그 말대로였다. 베이노아 수상의 평소 성향이라면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을 경우 연합의 제안을 따를 가능성이 높았다.
“···알겠소. 그럼 우리도 후퇴를 준비하도록 하지. 괜한 희생을 낼 필욘 없으니까.”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그때부터 공화국 함대는 서둘러 후퇴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아마페레오스의 도움으로 제국 함대의 광범위 센서를 속인 뒤 별 탈 없이 아르센티아 주역으로부터 물러날 수 있었다.
* * *
제이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에메랄드 헤븐에 머물면서 세계수들을 돌보는 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대로 놔둬도 별 문제 없이 성장하는 바로 것이 세계수지만, 여기 있는 이것들은 인베이더들에 의해 변질된 형태로 개조된 상태.
그래서 이를 본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매일같이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제이나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제아무리 하이 엘프의 혈통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지식과 옛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상황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최근 조금씩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물게나마 기억이 되돌아오는데다,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어서였다.
오늘도 그녀는 세계수들과 교감을 나누며 비틀려버린 부분들을 바로잡으려 했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있었다.
[참으로 악마적인 발상이군. 자연과 조화를 이뤄야 할 세계수를 이런 식으로 만들다니 말이야.]
제이나의 옆을 날고 있던 푸른 새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푸른빛을 띤 반투명한 형상의 새.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최상급 바람의 정령 슈티르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기억과 힘을 회복하기 시작한 제이나는 어느덧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기에 이른 것이다.
유태진에게 구조되었던 당시를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다.
“휴우···.”
세계수들과 교감하던 제이나가 드디어 눈을 떴다. 그녀의 입에서는 지친 숨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그녀의 호법을 선 채로 지켜보고 있던 슈티르가 염려스러운 투로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세계수가 제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너 하나만은 못하니까. 네가 잘못되면 모든 게 틀어지고 만다.]
“괜찮아요. 이 정도로 무리가 올 정도로 나약하진 않거든요.”
힘겨운 와중에도 제이나는 괜찮다며 픽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슬그머니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그녀의 열기를 슬그머니 식혀주었다. 바로 슈티르 나름의 보이지 않는 배려였다.
가만히 바람을 쐬며 지친 몸을 달래던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슈티르.”
[왜?]
“저 말이죠. 세계수들과 교감하면서 잃어버렸던 옛 기억들이 점점 돌아오고 있어요.”
[좋은 일이군. 기억을 되찾을수록 예전의 네 모습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하지만 제이나의 안색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제 과거를 되찾는 게 좋은 일일까요?”
[···어째서 그런 의문을 품는 거지?]
“기억을 찾아갈수록 알겠더라고요. 제 과거가 그다지 행복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나는 조용히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엘프들의 상위 종족이라 일컫는 하이 엘프의 혈통.
그들은 태어날 당시부터 특별함을 타고난다. 세계수와 직접 교감할 수 있으며, 일반 엘프들보다 몇 배에 이르는 긴 삶을 보장받는다. 그렇기에 인간으로 친다면 왕족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제이나는 그렇지 못했다. 하이 엘프의 일부만 타고났을 뿐,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순혈주의자들인 하이 엘프들 사이에서 철저히 경원시 되었다. 특히 그녀가 다른 하이 엘프들보다 더 높은 교감능력과 정령력을 타고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런 차별은 더욱 강해졌다.
때문에 항상 외톨이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 가까이 지낼 수도 없었고, 마음을 터놓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늘 가까이 하는 것은 솔직하게 자신을 대해주는 정령들뿐이었다.
그렇게 외롭고 쓸쓸히 지내던 자신이 어떻게 기억을 상실했으며, 아이틀란 행성까지 끌려가 실험체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동안 차별하고 따돌렸던 다른 하이엘프들도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는 사실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한 장면만이 또렷하게 새겨진 채 잊혀지지 않았다. 사방이 활활 불타오르는 엘프자치구의 모습과, 바닥을 비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는 무수한 주검들···.
그건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괴로운 기억이었다.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군. 엘프자치구인 엘베로사는 세계수의 가호로 철저히 보호되는 지역이었는데, 어째서 그토록 허무하게 뚫린 거지?]
슈티르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세계수는 엘프들을 철저히 보호하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항상 격리시켜준다.
세계수의 보호영역은 현실과 격리된 이계나 다름없어서 허가받지 못한 자들이라면 결코 침입해올 수가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세계수의 경계를 열어줬던 거겠죠. 그 방법 외에는 외부인이 침입할 방도는 없다고 봐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엘프가 동족을 배신하고 길을 열어준다니 말이야. 너희 선조들이 알았다면 아마 기절초풍했겠군.]
엘프들의 고지식함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마 엘프 역사상 배신자가 나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래, 분명 어렴풋이 기억이 나. 그때··· 날 시기하던 그녀가 처음 보는 자들을 몰래 안으로 들이던 광경이···.’
슈티르에게는 기억나지 않는 척 했지만, 그에 관한 약간의 기억을 되찾은 상황이었다. 분명하진 않았지만, 당시 분명 낯선 자들과 함께 들어서는 광경을 몰래 목격했었다.
그녀의 이름은 비르나. 완벽한 순혈 하이엘프이자, 차기 엘핀라엘의 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질과 타고난 능력은 반쪽짜리 혈통인 제이나보다 뒤떨어졌고, 그것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열등감이 되었다.
그것이 그녀가 저지른 배신의 이유일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끌어들인 자들이 순순히 그 의도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애당초 그자들은 비르나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속이고 이용했을 뿐, 비르나를 도울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엘베로사에서는 잔혹한 살육의 현장이 펼쳐졌다. 비르나가 끌어들인 자들은 인정사정없이 엘프들을 도륙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항하는 자는 가차 없이 죽였고, 항복하거나 저항을 포기한 자들은 굴비 엮듯 그대로 생포해 끌고 갔다.
그리고 엘프들의 고향인 엘베로사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였지. 아무런 저항도 못했어.’
그렇게 죽은 엘프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들에게 사로잡혀 끌려간 엘프의 수도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간 엘프들은 온갖 실험과 제물로 사용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중 예외가 있다면··· 제이나 단 한 명뿐이었다.
#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