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권-13화
그들은 해안가에 마련된 숙박시설로 자리를 옮겼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해안가였지만, 실제 행성의 해안가와 비교해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아름다운 해안가를 풍경으로 지어진 숙박시설은 고급스럽다 못해 호화찬란할 정도여서 사람의 시선을 절로 끌어당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해안가의 정경이 잘 보이는 장소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커다란 테이블 하나를 가운데 둔 채 얼굴을 마주했다.
먼저 조나단이 입을 열었다.
“옆에 이 분에 대해선 다들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요?”
조나단이 말한 이분이란 바로 그의 옆에 무덤덤한 얼굴로 앉아있는 아문 익스큐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물론 잘 알고 있지요. 문제는 제국의 신하였던 이분이 어째서 이곳에 있냐는 겁니다.”
유태진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아문을 향해 경계어린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안 그렇습니까, 아문 익스큐터 경.”
그것은 유태진 뿐만 아니라 연정운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이 적으로 돌변한 지금, 제국출신인 아문을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하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여전히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그 두 사람의 모습에 아문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뗐다.
“그럼 일단 자초지종부터 설명하겠네. 한때 제국을 대표하던 내가 어째서 황제와 적대시 하게 되었는지 말이야.”
그때부터 아문은 자신이 보고 겪은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째서 조나단과 합류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도.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유태진과 연정운은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역시 그렇게 된 거였나?”
“확실히 일리는 있어.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키는 금기의 의식이라니···. 하긴 그런 게 있었으니 윌키아 여신의 제약을 무시하고 이렇게 침략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겠지.”
제국의 황제가 하급신에 해당하는 막강한 권능을 휘두를 수 있지만, 그만큼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자신의 야욕을 위해 침공을 시작했고, 심지어 금기를 어기고도 예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그건 즉 더 이상 제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나는 제국의 번영을 바라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자신의 야욕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황제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었지. 그래서 론데니움크라스를 탈출해 이곳 아르센티아 주역에까지 오게 된 거다.”
“아문 경의 입장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황제와 적으로 맞서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겠군요.”
“그렇지. 황제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지 못하는 한 난 절대 제국으로 되돌아갈 생각이 없네. 내 이름을 걸고 말하지.”
단호하기까지 한 그 말에 유태진도 그것이 진심임을 알아챘다.
아문은 그냥 필멸자도 아니고 반신 급의 초월자였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할 정도면 결코 거짓일 리가 없었다.
거기에 아문이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리고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알아야 할 걸세. 지금의 황제는 얼마 전 나와 론데니움크라스에서 격돌할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더군. 아마도 추가적인 의식
을 치른 거겠지.”
유태진도 아문이 말한 추가적인 의식이 언제 벌어진 것인지 알아챘다. 아니, 애당초 아문의 첨언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짐작하던 바였다.
“그 점에 대해선 저희도 짐작 가는 바가 있군요. 얼마 전 강력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었는데, 그 시기를 계기로 황제가 급격히 강해졌지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말입니다.”
“아마도 론데니움크라스에서 치렀던 의식을 추가적으로 더 치른 결과겠지. 황제가 치르는 금기의 의식이 몇 번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완성된 게 아닐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가 이토록 침략에 목을 매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그 말은 혹시···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물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겁니까?”
“보통 그렇잖나? 어떤 의식이든 제물이나 시기, 혹은 지형이나 위치 등의 조건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마도 이 경우에는 지리나 위치 문제 때문이겠지.
사실 알카데인 황제는 우주를 통일하고 싶다는 그런 정복욕보다는 완전한 초월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명의 한계로 인해 골골대던 필멸자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금기의 의식을 치른 덕분에 간신히 수명 문제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아마도 더 격이 높은 초월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을 게 뻔해. 헌데 그런 황제가 굳이 우주정복 같은 것에 집착할까?”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아직 미개척지로 넘쳐나는 것이 우주인데, 굳이 타 세력과 전쟁을 벌여가며 제한된 영역 내에서 다툼 벌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다. 아문이 추측한 바가 사실일 경우였다.
“그렇다면 아문 경은 황제가 노리는 주역의 범위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까?”
“전혀. 황제는 그런 사실에 대해 내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네. 그도 알고 있었던 거겠지. 내 성격 상 이런 일에 절대 협조할 리 없다는 걸 말이야.”
“그렇군요.”
유태진은 아문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황제에게 그런 중요 사실들을 전해들을 수 있을 만큼 신뢰받는 입장이었다면 이렇듯 내쫓길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아주 짐작 가는 바가 없진 않았던지 아문이 덧붙여 말한다.
“그래도 지금 황제의 행보를 생각하면 대략적인 예측은 가능하지. 지금 제국 함대는 공화국을 장악하기 위해 아르센티아 주역을 노리고 있다. 아마도 의식에 필요한 지역적 조건은 공화국 영역 내부에 있다는 말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듯 집요하게 노릴 리가 없어.”
“확실히··· 일리는 있습니다. 가장 먼저 공화국을 노린 점부터가 단서였군요.”
제국과 연합, 공화국은 세력권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 그런데도 연합을 제외하고 공화국을 먼저 침공했다 함은, 그곳을 노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뭘 해야 할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이곳 아르센티아 주역을 사수하는 것이겠군요.”
황제의 목적이 공화국의 어떤 지역을 장악해 세 번째 의식을 치르는 것이라면 절대 내줘서는 안 된다. 지금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인데, 세 번째 의식까지 치르면 얼마나 더 강대해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유태진과 다른 모양이었다.
“아르센티아 주역을 사수한다고요? 할 수 있다면 그렇겠지요. 그런데 무슨 수로요?”
생각지도 못한 조나단의 되물음에 유태진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유태진도 황제의 목적을 생각하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 어떻게 사수해야 할지에 대해선 아직 방법을 강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나단의 느긋한 목소리가 거듭해서 이어졌다.
“대체 황제를 무슨 수로 막냐고요, 유태진 씨. 당신 좀 전에 황제를 막기 위해 엑스칼리버까지 소모해버리지 않았습니까? 신좌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까지 잃은 상황에서 중급 신에 버금가는 황제를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조나단··· 당신이 그걸 어떻게?”
유태진은 깜짝 놀라 조나단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놀랐던지 등줄기가 다 섬뜩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엑스칼리버의 존재는 리스티 외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리스티도 그가 직접 이야기 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몰랐을 것인데, 그걸 어떻게 조나단이 알고 있는 것일까?
“지금의 황제는 자극을 받을수록 점점 더 위험천만하게 변하는 존재입니다. 이번에 밀어붙였다고 해서 다음에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을 정도죠.”
“조만간 공화국과 연합의 지원군이 합류할 예정이야. 그래도 어려울까? 반신 급 강자들도 여럿 참가할 모양이던데.”
이번엔 연정운이 그렇게 반론을 제기했지만 조나단은 딱 잘라 말했다.
“예, 어려울 겁니다. 다들 황제의 저력을 너무 가볍게 보시는군요. 오늘 봤던 게 황제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게··· 정말이야?”
연정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오늘 본 황제의 힘은 끔찍할 정도였다. 우주의 어둠을 자신의 힘으로 삼아 만들어내는 무한한 묵룡들은 지금까지 봐온 어떤 전장보다도 더 끔찍했다.
그런데도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예, 장담하지요. 제 목을 걸라고 해도 걸 수 있답니다.”
별로 진지해 보이지 않던 녀석이 저렇게까지 확신에 차 말하면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조나단, 당신의 전함은 어떻지? 분명 알카데인 황제에게도 꽤 유효한 것 같던데. 그만하면 황제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연정운은 아마페레오스가 황제의 공격을 방어해낸 것은 물론, 실제나 다름없는 태양을 만들어내어 묵룡을 소멸시켰던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힘이라면 황제에게도 조금은 먹히지 않을까?
하지만 이어진 조나단의 대답은 기대와 달리 부정적이었다.
“제 작품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지만, 황제는 이미 유태진 씨의 엑스칼리버에 의해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죠. 만일 그가 멀쩡한 상태였다면 제 아마페레오스로도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황제가 그 정도였나?”
황제를 물러나게 했던 아마페레오스의 강력했던 모습만 깊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연정운으로선 그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상황이 너무 암담해서일까? 모두가 무거운 침묵에 잠기자, 조나단은 더욱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가장 최선의 방법은 후퇴입니다. 지금으로선 정면으로 싸워봐야 승산이 없어요. 오히려 나머지 함대까지 위험에 빠뜨릴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르센티아 주역을 내주고 전력을 보전한 뒤에 황제를 제압할 패를 마련하는 것이 더 급선무입니다.”
유태진도 조나단의 주장에 어느 정도 동감했다.
그만큼 황제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엑스칼리버에 의해 권능이 봉쇄된 상태에서도 감당하기 벅찰 정도였으니까.
하물며 지금은 엑스칼리버조차 없다. 권능봉쇄라는 목줄마저 풀린 황제는 무공이란 강력한 힘까지 손에 넣음으로서 이젠 대적불가의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엑스칼리버에 의해 입은 타격까지 회복하고 나면, 그 힘은 어지간한 중급신보다 강할 것이 분명했다.
잠시 뒤, 작게 한숨을 내쉰 아문이 조나단을 향해 의문을 표했다.
“좋아, 조나단. 그대의 말이 일단 맞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대로 후퇴한다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생긴다는 보장이 없잖나? 황제를 제압할 패? 중급 신을 제압할 수단이란 게 과연 존재하긴 했던가? 그랬다면 이 우주를 주름잡는 중급신들은 제대로 행세도 못하고 있었을 테지.”
조나단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문이 지적한 내용을 부정하진 않았다.
“맞습니다. 중급신을 제압할 방법이란 게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죠. 딱히 약점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통합니다.”
“그게 뭔가?”
아문이 솔깃한 표정으로 묻자, 조나단이 분명한 어조로 단언했다.
“이번에 황제에게 유일하게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유일한 가능성이지요. 그것만이 황제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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