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78화 (379/448)

16권-03화

좀 전까지 싸움의 여파가 지구에 닿지 않도록 일대를 뒤덮고 있던 차원의 이면 공간이 해제되었다.

현실의 우주공간의 정경과 더불어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입체 마법진이었다.

[이것은!?]

[네놈들 설마?]

[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거냐?]

그들은 이 거대한 입체마법진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는 즉시 깨달았다.

설마 이런 것까지 몰래 준비해두고 있었을 줄이야. 권능은 물론 인과를 더듬어 미래를 엿보는 예지까지 엑스칼리버에 봉인당한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공간이동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한 사내. 그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오래 기다렸군요. 당신들이 이 지경에 처할 때를 말입니다.”

기다란 석장과 로브가 돋보이는 그 자의 정체는 바로 다름 아닌 멀린. 그가 지금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구 전체, 아니 태양계 전역을 이용한 초광역 의례법진.

태양계 행성의 운행하는 것까지 술식에 포함된 이 의례법진은 신좌들을 제약함은 물론, 더 이상 지구의 위치를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당신들은 앞으로 더 이상 유니버셜 테라 코어의 위치를 인지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설령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를 열람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움직임에도 여러모로 제약이 있을 예정이니 지금처럼 여길 찾아오는 건 힘들겠지요.”

멀린의 그러한 선언에 그룬베일이 같잖다는 듯 대꾸한다.

[그래봐야 헛수고일 뿐이다. 이런 제약이 얼마나 오래 갈 것 같나? 천년, 2천년? 아니 그보다도 더 짧을지도 모르지. 고작 그 정도 시간을 벌자고 이렇게까지 발버둥 치다니. 참으로 가련하구나.]

“물론 그렇겠지요. 당신들 정도 되는 존재들을 영원히 제약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필멸자에게 그 정도의 세월은 결코 짧은 게 아니랍니다. 대비할 시간으론 충분하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놈들을 이끌던 성계신은 이미 소멸되었다. 최소한 수천 년 내로 다시 부활하진 못하겠지. 네놈들이 건 이 제약이 끝난 뒤에도 지금과 같은 행운이 또 따를 것 같더냐?]

“그건 앞으로 저희가 염려할 일입니다. 여러분 신좌들께선 이만 돌아들 가시지요.”

멀린이 의례법진을 활성화시킨 순간, 신좌들이 보내오던 영언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구속하는 제약이 급격히 강해져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언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 그룬베일이 남긴 마지막 영언이 멀린과 아서에게 닿았다.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허나 그걸로 끝이었다. 영언이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이곳에 있던 신좌들은 언제 존재했었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서의 엑스칼리버의 힘까지 더해진 의례법진이 본격적으로 발동되면서 그들을 지구에서 아득히 먼 우주로 추방해버린 것이다.

물론 물리적인 거리 따윈 의미가 없는 초월자들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지구를 침공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에게 가해진 제약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의미였다.

성좌가 소실된 이후, 멀린이 힘겨운 숨을 토해냈다.

“휴우··· 성공이군요.”

이만한 규모의 의례법진을 구현하는 건 멀린에게도 꽤 벅찬 일이었다. 심지어 그 대부분의 부담을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 행성들의 순환체계와 엑스칼리버가 감당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만일 그가 독자적으로 구축했다면 신좌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도박성 작전은 결국 성공했고, 성좌들을 태양계에서 완전히 추방시켰다.

그렇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서의 얼굴은 어둡고 우울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린··· 너무도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예, 그렇지요. 정말 많은 희생이 있었죠.”

멀린도 그 심정을 헤아린 듯 평소처럼 웃지 못했다. 아서의 읊조림처럼 너무도 많은 이들이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성계신의 쥬헬 그리아드는 소멸하였고, 신좌들과의 전투에 참여한 원탁의 기사들도 전부 사망하였다.

그리고 인베이더 군단과 대적하던 병력들도 상황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랜슬롯을 비롯한 기사들도 최대한 분전하긴 했지만 전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는지 피해가 극심했다.

살아남은 기사는 랜슬롯을 비롯한 원탁의 기사 몇몇 뿐, 정예 병력은 살아남은 이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지상으로 돌아온 아서 일행은 더 참담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럴 수가···.”

아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 앞에 너무도 기가 막혔다.

자신은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거늘, 지상에서는 이

런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있다니.

자신이 세운 나라 브리튼이 멸망해 있었다.

예전부터 브리튼을 호시탐탐 노려오던 로마의 황제 루키우스가 인베이더와 손을 잡았고, 원탁의 일원인 모드레드까지 그들과 한 편이 되어 브리튼을 멸망시킨 것이다.

그 결과 이 땅에는 더 이상 브리튼이라 칭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시여.”

랜슬롯이 참담한 얼굴로 아서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아서는 그저 허탈하단 표정으로 실소하고 있었다.

“세상은 구했지만 내 나라는 멸망하다니··· 이 무슨 기가 막힌 운명인지.”

하지만 이미 벌어진 결과를 다시 돌이킬 순 없었다. 멸망한 나라를 다시 되돌릴 순 없었고, 지금은 그럴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

물론 아서와 랜슬롯이 강하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몇 명 남지 않은 원탁의 기사로 브리튼 전역을 지켜낸다는 건 무리였다.

결국 아서가 결단을 내렸다.

“배신자부터 처단하지. 나머진 그 뒤에 생각하기로 하고.”

그들은 브리튼을 배신한 모드레드를 처단했다. 놈을 찾아가는 건 쉬웠다. 멀린의 환상으로 모든 걸 속인 뒤, 밤중에 몰래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모드레드의 역량은 원탁의 기사 중에서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자 답게 상당했지만, 랜슬롯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죽이기 전에 일단 묻겠다. 어째서 배신한 거냐?”

아서는 죽어가던 모드레드에게 마지막으로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모드레드가 킬킬대더나 곧 대답하기 시작했다.

“···크크크, 설마 왕께서 성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야말로 티끌만큼이나 희박한 확률을 무사히 성공시키시다니.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업적을 이루셨군요.”

“그래였군. 우리가 실패할 거라 생각하고 그들과 손잡았다는 건가?”

“예, 맞습니다. 당신께서도 보지 않았습니까? 신좌들의 강대함을. 특히 그룬베일의 강력함은 절대적이지요.”

“······.”

아서도 그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아니 직접 싸웠던 아서이기에 그들의 강대함을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실감했었다.

일개 필멸자 따윈 벼룩보다도 더 하찮을 뿐인 최상급 신 그룬베일.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손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만일 성계신이 없었더라면, 아니 엑스칼리버가 자신의 손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아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는 와중에도 모드레드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저도 처음부터 배신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쪽에서 먼저 제안해 오더군요. 지구를 혼란케 만들어 더 이상 인간들이 인베이더에게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브리튼의 멸망을 시작으로 무수한 전쟁을 일으켜 지구의 전반의 전력을 쇠퇴시킬 생각이었지요.”

“흐음, 확실히 효과적인 방법이군요. 전쟁에 있어서도 확실한 전략입니다. 적의 보급과 병력충원을 막는 거야말로 전쟁의 승리조건 중 하나니까요.”

멀린은 비교적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물론 계획이 성공한 지금은 이런 게 무슨 의미이겠냐만은, 그래도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인베이더들의 전략은 확실히 먹혀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놈들이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성체들의 멸망과 유니버셜 테라 코어인 지구의 점령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모든 조건에 해당되는 모드레드가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네게 주어지는 보답은 뭐냐? 놈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건 그만한 대가가 있었다는 말일 텐데.”

“별 거 아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소수의 인간들을 다른 행성에서 살아남게 해주겠다는 게 전부였지요. 그들은 제게 확실한 생존을 약속했습니다.”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 말에 아서가 놀란 듯 소리를 내었다.

“전 그렇게라도 막고 싶었습니다. 지구는 멸망하겠지만 적어도 인류가 전멸하는 건 막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

모드레드에게 강한 배신감을 느끼고 적대감을 보였던 랜슬롯조차 표정을 잃어버렸다. 그만큼 그가 배신하게 된 동기가 충격적이어서였다.

잠시 뒤 아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린 실패하지 않고 계획을 성공시켰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모드레드.”

“예, 전부 쓸데없는 일이었지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리고 계획을 무사히 성공시키신 왕께서도 말입니다.”

“쓸데없다고? 무슨 뜻이냐?”

“왕께서는 훌륭하게 신좌들에게 제약을 가하고 추방시키셨습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천년, 아니면 2천년? 결국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지요. 전 소수의 인간만 살아남더라도 보다 안전하게, 불안하지 않은 확실한 생존을 원했습니다. 저희들의 후대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생존 말입니다.”

“그럼 경은 설마!?”

그제야 아서는 모드레드가 자신과 브리튼을 배신한 이유를 깨닫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이런 이유가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었다.

“예, 제 한 목숨 따윈 상관없었습니다. 우리들의 후대가 무사히 살 수 있는 토대만 만들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지요. 이젠 모든 게 다 틀려버렸지만요.”

그 목소리는 거의 절망에 가까웠다. 아서가 계획을 성공시킨 이상 자신이 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깨달아서일 것이다.

“이 어리석인 자식!”

랜슬롯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좀 전과 같은 증오와 미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왕의 계획에 충실하는 건데···.”

그렇게 회한에 찬 넋두리 같은 말을 내뱉은 모드레드는 아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몸이지만···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왕이시여. 부디 인간들을··· 우리들의 후대를··· 부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모드레드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영영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다.

멀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랜슬롯도 고개를 무겁게 떨어뜨렸다. 배신한 줄 알았던 모드레드의 본심을 알게 되고 나니 그를 도저히 증오할 수가 없었다.

아서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랜슬롯 경. 모드레드 경의 시신을 수습해라.”

“예.”

“그도 부끄러움 없는 원탁의 기사였다. 아발론에서 장례를 치러야겠지.”

그들은 모드레드의 시신을 수습한 뒤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로마로부터 임명을 받은 브리튼의 총독인 모드레드의 실종으로 잠시 혼란이 빚어졌지만, 그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습되면서 그의 실종도 결국 묻힌 듯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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