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75화 (376/448)

15권-25화

허나 이건 겨우 형태만 빚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막대한 사상과 염원이 모였다 하더라도 이를 고정화 시키지 못한다면 언제든 다시 흩어질 수 있는 허상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성계신이 확실한 쐐기를 박는다.

[여기에 나 쥬헬 그리아드의 권능이 임하나니, 만상을 불사르는 폭염으로 연단함으로서 여기에 담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한 자루 검을 자아내노라.]

화르르!

신전과 주변 공간에 가득 차 있던 화염들이 일제히 검의 형상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격렬한 기세로 불사르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검의 형상은 빨갛게 달아오르기만 할 뿐 타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이 거셀수록 그 형상이 더 뚜렷해지는 것이 아닌가.

허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불길을 모아 연단하던 성계신이 돌연 크게 외쳤다.

[멀린! 자, 지금이다! 그대가 해야 할 책무를 다하라. 검의 마지막 완성을···!]

그러자 멀린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그가 평소 들고 다니던 석장의 끝이 한 차례 지면을 내리찍더니, 힘 있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멀린 엠리스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모든 이들의 염원을 대신해 이 자리에서 최강의 환상을 새길지니···”

우우웅!

점차 뚜렷해져가던 검의 형상 위로 이젠 완벽한 물질적인 외형까지 갖춰져 간다.

붉은 색과 황금색이 서로 조화를 이룬, 세련되고 아름다운 한 자루의 검.

그것이 점차 완성에 다다르고 있었다.

멀린은 완성되어가는 검을 앞둔 채 마지막으로 존재의의를 우주에 새기는 진명을 토해내었다.

“그 이름은 엑스칼리버(Excalibur)! 만인에게 세세토록 칭송받을 구세(救世)의 성검이니라!”

그 순간 사방이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그 빛은 다름 아닌 멀린이 엑스칼리버라 이름붙인 한 자루 검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빛이 점차 사그라진 뒤, 그 자리에 남아 둥둥 떠 있는 것은 영롱한 광채를 뿌리고 있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후우우··· 정말 간신히 완성되었군요. 확률이 그다지 높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멀린은 숨을 몰아쉬며 창백한 안색으로 투덜거렸다. 그만큼 막대한 힘을 일시에 소모했다는 말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자들의 염원과 행성의 사상으로 형상을 맺고, 성계신의 신성한 불길로 연단해 이를 묶어 융화시키며, 멀린의 환상으로 검의 존재를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형태로 완전히 고정화시켰다.

그리고 끝으로 쓰임새에 합당한 이름을 검에 부여함으로서, 존재의의와 방향성을 명확히 확정짓기까지 했으니 지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계신 또한 마찬가지. 상위신으로서 거의 무한이나 다름없는 힘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그만큼 막대한 심력을 쏟았다는 말이었다. 그는 피곤이 묻어나오는 시선으로 완성된 검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칼리버라. 좋은 이름이군.]

엑스칼리버의 뜻은 [구세의 빛]. 다가올 멸망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한 무기의 이름으로는 그 이상 가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자루의 검이 신전의 바닥에 그대로 꽂혀들었다.

아서는 바닥에 수직으로 꽂히는 엑스칼리버를 따라 멍하니 시선을 옮겼다. 그것이 창세성검의 일부를 사용해 만든 강력한 검이라서가 아니었다.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서는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검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성계신이 웃으며 물었다.

[한번 쥐어보지 그러나?]

“아!”

그제야 퍼득 정신이 든 아서가 발걸음을 멈추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대체 내가 왜 이랬던 거지?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군.’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즉시 사죄하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탐하지 말아야 할 검인데, 저도 모르게 어느새···.”

방금 이 자리에서 만들어진 엑스칼리버는 장차 지구의 명운을 결정할지도 모를 성검이었다. 신위는커녕 그랜드 급에도 닿지 못한 자신이 쥐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 신기인 것이다.

그러나 성계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건 네가 이 검을 탐해서가 아니다. 자격이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끌림을 느낀 거다.]

“자격··· 말입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된 아서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난데없이 자격이라니! 지금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 자격. 네게는 이 검을 쥘 자격이 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널 눈여겨보고 있었지.]

“그럴 리가요. 전 평범한 인간입니다. 어쩌다 보니 왕이 됐지만, 사실 저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수련해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전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성검을 쥘 만한 재목이 못 됩니다.”

자기비하 같은 말이었지만, 그건 부정하기 힘든 명백한 사실이기도 했다. 아서는 냉정할 만큼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너 스스로를 너무 낮춰 보고 있구나.]

“세상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과대평가하기보단 차라리 과소평가 하는 게 더 낫지요.”

이를 지켜보고 있던 멀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런 이런··· 본래 제 제자가 자기평가가 좀 박한 편이랍니다. 좀 이해해 주시죠.”

[그런 거 같군. 하긴 허세 가득한 것보다는 낫겠지.]

한 차례 피식 웃은 성계신은 자격을 언급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널 눈여겨보고 있었던 건 다름이 아니다. 바로 이 검을 쥘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기 때문이지.]

“저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서는 자기 자신을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이였다.

그가 왕이 되고자 했던 건 어디까지나 세상의 멸망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결심이었을 뿐,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겨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는 역으로 성계신으로부터 질문이 던져졌다.

[그럼 저 검을 쥐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그 누구보다 압도적인 강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검을 쥔다 하더라도 결코 사사롭게 사용하지 않을 올곧은 마음이겠지요.”

아서는 상식적인 답을 내놓았다. 엑스칼리버가 그렇게 강력한 성검이라면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높은 역량과, 올바른 곳에 사용할 수 있는 심성은 필수불가결인 것이다.

하지만 성계신은 그 말에 일부분 동조하면서도 그게 핵심 조건은 아니라고 했다.

[물론 그런 요소들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 전에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다. 그에 따라 이 검을 쥘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가 바로 정해지지.]

“무엇입니까?”

[엑스칼리버를 쥐기 위해선 가히 초월적인 정신력이 필요하다.]

“정신력?”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자들을 지켜봐왔다. 너보다 더 뛰어난 성품을 지녔거나, 혹은 놀라운 자질을 가진 자들도 제법 많이 봤었지. 하지만 그들 중 엑스칼리버를 쥘 수 있는 조건과 합치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

[하지만 아서 팬드래건. 너는 다르다. 정신이 붕괴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긴 세월을 오직 수련 하나만 바라보면서 버텨내기까지 했지. 이건 일개 필멸자에게 가능한 정신력이 아니야.]

성계신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서의 입이 무겁게 다물어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엑스칼리버를 쥐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진 게 맞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납득하기 어렵군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저인 겁니까? 성계신께서 엑스칼리버를 잡으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아서의 정신력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초월자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초월자도 아니고 무려 상위 신격을 보유한 쥬헬 그리아드보다 더 적합한 자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성계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나는 불가능하다. 그 검이 날 허락하지 않는구나.]

“어째서 말입니까?”

[창세성검의 일부가 담긴 엑스칼리버의 힘은 놀라울 만큼 강력하다. 아마 제대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가히 우주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겠지.

그렇기에 안 되는 거다. 이 검은 질서를 바라니까. 상위신인 내가 그 이상의 힘을 얻게 된다면 그럴 우려가 있지.]

아서로서는 내심 기가 막혔다. 그 말 대로라면 검에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 때문에 일이 꼬이고 있었다.

하지만 성계신이 검을 쥐지 못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닌 듯 보였다.

[게다가 이 검이 완성되는 데에 사용된 사상과 염원 중 너의 사상과 염원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재능이 없더라도 더욱 강해지고 싶다는 염원과, 멸망의 그날로부터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 근 이천년에 달하는 세월 속에서 쌓인 감정과 염원은 지구상의 그 어떤 필멸자들보다도 크고 거대했을 터. 그래서인지 지구에서 끌어 모은 사상과 염원들이 가공 과정을 거치면서 너의 사상과 거의 비슷하게 동질화 되어버렸다. 이젠 너밖에 사용할 수 없는 검이 되었지.]

“그런···!”

아서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설마 수련에 전념했던 기나긴 세월들이 그런 결과를 낳게 될 거라고 어찌 예상할 수 있을까?

아니, 이건 그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성계신은 검지로 아서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똑똑히 말했다.

[그러니 네가 쥐어라! 그리고 네 손으로 지구를 멸망에서 구제하는 거다.]

‘···내가?’

일순 수많은 상념들이 아서의 뇌리로 스쳐지나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의심이었다.

정말로 자신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혹은 자신보다 더 나은 적합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고개를 쳐든 것이다.

그 다음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저 검을 손에 쥐고 장차 다가올 멸망으로부터 지구를 지켜낼 수 있을지, 괜히 부족한 자신이 엑스칼리버를 쥐는 바람에 모든 걸 그르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가 스스로 결의를 다지고 목표를 향해 정진해 왔다지만, 그건 그만큼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재능이 부족함을 절감한 그로서는 그 길 외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남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아서로서는 도저히 엑스칼리버를 향해 다가가 선뜻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가 주저하는 모습을 본 성계신이 다시금 입을 뗐다.

[왜지? 왜 그냥 멈춰 서 있는 거냐? 너에게 주어진 짐이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더냐? 아니면 멸망을 막지 못할 결말이 두려워 앞으로 내딛지 못하는 거냐?]

그 말에 흠칫 놀란 아서가 이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굳이 말한다면 둘 다라고 해야겠지요. 저 자신의 부족함 탓에 이 땅의 모든 게 멸절된다면 제가 어찌 감당해야 하는 겁니까? 전 언제나 부족한 자였습니다. 뭘 하든 실패를 거듭해야 했고, 남들이 한 번에 해내는 걸 수십 수백 번 시도해야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었죠. 차라리 제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재능 넘치는 이였다면 이렇게까지 두렵고 망설여지진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이 절감해온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고백이었다. 만일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절대 입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계신도 그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네가 아니면 우리는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다. 그 검이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희망! 그리고 그 검을 쥘 수 있는 건 아서 너 한 사람 뿐이지.]

그렇기에 원하는 원치 않든 아서는 엑스칼리버를 쥘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정해진 운명이자 필연이었다.

[그러니 굳게 마음먹어라. 어느 누구도 널 대신하지 못한다. 그리고 네가 그동안 쌓아온 노력을 믿어라. 지금까지 넌 무얼 위해 노력해온 거냐? 세상의 멸망을 막겠다며 첫 각오를 다지던 애송이 시절 때의 넌 재능부족을 이유로 목표를 포기할 만큼 나약했더냐?]

아서는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의 자신은 재능은 턱없이 부족하고 딱히 쌓아놓은 실력도 없는, 말 그대로 애송이였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겠다는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피나는 노력을 해왔고,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의 각오는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었다.

단지 그가 주저한 것은 자신이라는 선택지보다 더 나은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계신은 그런 아서의 우려를 읽고 부정하였다.

[그래, 네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너보다 현명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는 적지 않겠지. 하지만 너만큼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 어디에도 없다. 재능이 넘친다고 반드시 높은 경지에 닿는 건 아니며, 현명하다고 해서 항상 옳은 길을 선택하는 건 아니지.

그러니 너 자신을 믿어라. 네가 선택해온 길은 틀리지 않았고, 네 노력과 고민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진정으로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건 오로지 너 뿐이다. 나 폭염의 신 쥬헬 그리아드의 이름을 걸고 보장하겠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서의 머릿속으로 그 어떤 고민도 주저함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 자신이란 존재가 정녕 최선의 선택지라면,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는 서슴없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좀 전만 해도 천근만근 무거워 발을 내딛을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가볍고 경쾌했다.

그리고 손을 내뻗어 바닥에 꽂힌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착 달라붙는 듯한 일체감.

그건 단지 손바닥과 닿는 완벽한 그립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검과 자기 자신의 영혼이 서로 이어지면서 깊게 와 닿는 일체감 때문이었다.

“아아!”

그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큰 희열과 고양감이 되었다. 그리고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치솟는 영감이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동안 부족한 재능 탓에 이해되지 못했던 것들이 상당수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천 년 가깝게 노력하고도 쉬이 무너지지 않을 듯한 벽이 너무나도 가볍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런 아서의 귓전으로 성계신의 영언이 울려왔다.

[아서 팬드래곤. 브리튼의 왕이여! 너야말로 구세를 위한 성검 엑스칼리버의 진정한 주인이다.]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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