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74화 (375/448)

15권-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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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계신은 문명이 존재하는 행성이라면 그 어디에든 존재하는 수호자들이었다. 그들은 행성에서 자라나는 지성체들을 지켜보면서 문명이 일정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보호해준다.

허나 보호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행성 바깥에서 오는 위협에 대한 것이지, 행성 내에서 벌어지는 원주민들 간의 문제까지 간섭하는 건 아니었다.

설령 세계대전이 벌어져 해당 행성의 지성체들이 서로 상잔해 멸종하는 한이 있더라도 성계신은 끝까지 방관할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어디까지나 외부의 침략이나 외적 요소에 의한 멸망으로부터 문명을 지켜내는 것이지, 정당한 운명을 타고난 지성체들의 행위는 제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간혹 해당 문명에 대해 애착을 가진 성계신들은 간섭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그것도 극히 제한적일 뿐. 섭리의 제약 탓에 직접적인 간섭은 극히 어려운 만큼 대부분 방관자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다르다. 인베이더의 침공은 어디까지나 외부로부터의 침입.

성계신으로서는 절대 방관할 수 없는 사태였다.

멀린을 따라 공간을 뛰어넘은 아서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대체 여긴!?”

온 사방이 화염으로 충천해 있었다. 붉거나 푸른 화염이 넘실대며 공간을 불태우고 있었고, 그 열기는 가공할 지경이어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폐가 탄화되어버릴 것 같았다.

“놀랍지? 이곳은 그분의 신전. 불을 관장하시는 만큼 화염으로 충만하단다. 우리는 정당하게 초대를 받은 입장인 만큼 태워지는 일은 없겠지만, 여러모로 성가시긴 해.”

“···이런 곳이 신전이라고요?”

아서는 놀랍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그가 알던 지구상의 신전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온통 불길로 가득 찬 공간. 그리고 눈앞에는 불길이 뭉쳐 이루어진 것 같은 거대한 형상이 존재했다. 말 그대로 불길을 모아서 만든 건축물이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권능을 다룬다는 신에게 인간의 상식을 바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신전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열기가 밀려왔다.

멀린의 말처럼 강렬한 열기가 피부로 느껴지긴 했지만, 그것이 몸을 불태우진 않았다. 성계신이란 자가 방문자인 자신들을 배려해준 모양이었다.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이곳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역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 존재하는 격리된 차원.

물론 그 규모는 지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겠지만, 이조차도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얼핏 느껴지는 공간의 규모만 봐도 어지간한 대영지 이상이군. 아니 내 감각이 닿는 범위가 그 정도가 한계이니 그 이상일 수도 있어.’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 이런 규모의 격리차원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성계신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를 미루어 짐작케 해주었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만일 상대가 존재감을 거두지 않았더라면 아서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미친! 이런 게 진정한 신위라는 건가?’

수많은 영능을 마이스터 급 이상으로 터득한 아서조차 이런 지경이었다.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줄어든 존재감만으로도 아마 죽을 때까지 경배하며 성계신을 찬양했을 것이다.

그는 마음을 견고히 다잡으며 상대방을 응시했다. 성계신은 아서와 같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그건 마치 화염 그 자체를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낸 듯했다.

하지만 겉모습이 인간이라 해서 정말로 인간과 다름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미적 조형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는 마치 심연 같았다.

높은 곳에 앉아있던 그가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제야 왔군, 멀린 엠리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성계신이시여.”

멀린이 그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성계신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더니, 천천히 시선을 옮겨 그 옆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서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 오지 않고 동행을 데려왔군.]

“예, 전에 한번 말씀드렸던 저의 제자입니다. 현재 브리튼의 왕위를 맡고 있지요.”

멀린이 자신을 소개하자, 아서도 급히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아서 팬드래건. 보잘 것 없긴 하나 브리튼을 다스리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 알고 있다. 내가 주시해서 지켜보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니. 그대라면 이곳에 올 자격이 있지.]

단지 몇 마디 말만 나눴을 뿐인데도 신위에서 비롯된 강력한 영압이 아서의 심신을 무겁게 짓눌러왔다. 그는 내심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으음, 이게 신적 존재의 존재압인가?’

성계신에 대해서는 멀린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간혹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지구의 성계신이자 폭염을 관장하는 신 [쥬헬 그리아드].

지구인들에게는 전혀 익숙지 않은 이름의 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무명의 신인 것은 아니다. 단지 지구에서 활동할 적에는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기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한때 그는 북유럽 신화의 한 축이자, 실질적으로 신화를 종결시켰던 불의 거인 수르트라 불리기도 했다.

그로 인해 신들이 지상에 기거하던 신화의 시대는 종지부를 맺었고, 지금과 같은 인간의 시대에 이른 것이다.

잠시 아서를 내려다보던 성계신이 그를 향해 조금 안타깝다는 감상을 내비쳤다.

[이 정도로 쩔쩔 매다니. 앞으로 인베이더의 신좌들을 상대하려면 이런 압박감을 받아내가면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너의 노력이 부족한 건 아니나,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문제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앞으로 더 정진하는 게 좋을 것이다.]

“···예.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서도 그 외엔 별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피나는 노력을 하긴 했지만 부족한 재능 탓에 진전이 지지부진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성계신이 자신의 성취를 눈에 차지 않아 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막막할 따름이었다. 노력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 노력하라고 한다면 뭘 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성계신은 더 이상 아서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멀린을 향해 있었다.

[이곳까지 찾아온 걸 보면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군.]

“예, 말씀하신 것을 무사히 손에 넣었지요.”

멀린은 가져온 창세성검의 편린을 자신의 손 위에 꺼내놓았다.

[역시··· 혼의 결정인가.]

“예. 창세성검이 허락해준 건 이게 전부였지요.”

멀린은 온전한 창세성검을 갖고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성계신은 이런 결과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애당초 창세성검 그 자체를 가져올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건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거니까. 아니, 지금 멀린 그대가 가져온 작은 결정조차도 내겐 너무나도 버겁군.]

“···그 정도였던가요?”

[그래, 창세성검은 창조주가 남겨준 우주의 멸망이나 혼란을 대비한 최후의 보루. 제아무리 일개 파편이라 해도 상위신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뜻밖의 사실에 멀린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쥬헬 그리아드는 우주에서도 보기 드문 상위의 신격으로서, 그가 다룰 수 있는 권능과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각 신화의 주신이나 여러 신격들도 그 앞에선 비루 맞은 개처럼 떠는 판국인데, 그가 이런 조그마한 파편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하니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기에 우리에겐 비장의 한 수가 되어줄 수가 있는 것이다.]

“하긴 그렇군요.”

상위신조차 버거운 이 힘이라면 인베이더의 신좌들에게도 확실히 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이대로는 아무도 다룰 수가 없었다.

[혼의 결정이긴 해도, 이것의 본질은 본체와 마찬가지로 무기의 성질을 갖고 있지. 이걸 제대로 다루려면 결국 무기의 형태로 가공을 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요?”

반드시 가공해야 한다는 그 말에, 멀린이 조금은 회의적인 투로 물었다.

고작 파편에 불과하다 해도 성계신마저 감당하기 버거워할 정도의 물건이었다. 이걸 대체 누가 가공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쉽지 않겠지. 나도 본신의 힘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고. 신들 중에 대장장이의 신이 있긴 하지만, 그런 얼뜨기들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저희가 괜한 헛수고를 한 셈이군요.”

대장장이의 신조차 가공할 수 없는 재료라면, 제아무리 강력한 힘을 내재한 혼의 결정이라 해도 아무 쓸데가 없었다.

멀린이 그답지 않게 허탈한 표정을 짓던 그때, 성계신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완전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공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아 떨어지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는 알고 있는가? 이곳은 시간과 공간의 틈새이긴 하나, 이곳과 실질적으로 맞닿아 있는 현실좌표는 지구의 내핵에 해당하지. 그건 즉 지구의 모든 업과 지성체들의 염원, 그리고 신앙이 이곳으로 흘러든다는 의미다.]

“아, 그렇군요! 그런 방법이!”

수많은 지식을 섭렵한 멀린은 그 말만으로도 성계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렇다. 지구의 모든 염원과 사상을 모아, 그 힘으로 검을 연단할 생각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역량을 넘어선 진정한 초절신기를 탄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구를 지켜내기 위한 수호의 성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훗날 전설이 된 아서왕의 상징, 엑스칼리버가 탄생하게 된 기원이었다.

쿠오오오오!

그 순간, 성계신을 중심으로 막대한 영압이 휘몰아쳤다. 그것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지구의 모든 이들이 가진 갈망의 집합체인 것이다.

멀린에게서 혼의 결정을 건네받은 성계신이 그것을 자신의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자, 보아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염원을! 생을 이어가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와 오랜 신앙들! 그리고 수십억 년 이상 유지되어 온 지구의 사상이 하나로 결합되어 가는 과정을!]

“크으!”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 앞에, 아서는 신음을 내뱉으며 전율하고 말았다.

단순히 막대한 힘이 유동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제 슬슬 마이스터의 끝자락에 도달해 그랜드 급을 넘보고 있는 그에게는 지금 몰려들고 있는 무형의 기운들이 무엇인지 너무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백 수천만, 아니 수억에 달하는 지성체들의 염원과 오랜 신앙들이 이곳 한 자리에 일제히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개별적으로 볼 땐 아주 작고 희미할 뿐이지만, 이렇듯 일제히 하나로 모인 순간 그것은 신의 권능마저 넘어섰다.

화아악!

지구상의 염원과 사상이 혼의 결정을 중심으로 집결하더니 어느새 하나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직은 형태가 고정되지 않아서 불완전한 탓인지 유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완연한 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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