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22화
[축하드립니다, 폐하.]
의식을 주관했던 게리드가 다가와 피곤한 목소리로 축하의 말을 전해왔다.
“수고하였다, 게리드. 그대 덕분에 짐은 이제 진정한 신이 되었다. 정녕 불멸의 존재가 된 것이지. 이 모든 게 그대의 공 때문이다.”
[별 말씀을. 전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그만한 공을 세웠으면 대가를 받아야지.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지금으로선 널 끌어올려줄 수가 없구나.”
알카데인 황제는 아쉽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윌키아 여신의 권능을 휘둘렀을 때보다는 한층 더 강한 힘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봐야 하급신보다 조금 나을 정도에 불과했다. 굳이 표현한다면 하급신과 중급신 사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 정도만으로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력하겠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못 아쉬웠던 것이다.
“여기서 만족할 순 없지. 게다가 두 번째 의식도 불완전했고 말이지.”
알카데인 황제가 치른 의식은 총 삼 단계 중 두 번째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마저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첫 의식 때는 수많은 엘프 아종들을 제물로 삼았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 하나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니 불완전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실제 여기에 사용된 제물은 그보다 훨씬 더 막대했다는 것이다.
아르센티아 주역에서 그동안 흘린 수많은 피와 원념,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발생한 깊고 무거운 업(業)이 바로 이 의식에 바쳐진 제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예정된 목표치보다는 턱없이 부족했다. 번번이 자신을 가로막은 유태진의 방해 때문에 충분한 피를 흐르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유태진만 없었다면 목표치는 넉넉하게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공화국 함대를 전멸시키거나 그에 준하는 타격을 줬다면 충분하고 넘쳤을 것이거늘···.’
그랬다면 목적한 대로 완전한 중급신이 되었을 것이고, 그랜드 급 리치에 불과한 게리드를 반신 급인 데미 리치로 승화시켜주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쉽긴 했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계속 미련을 둬봐야 무의미했다. 두 번째 의식이 불완전했다면, 다음 세 번째 의식을 완벽 그 이상으로 치르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그 놈도 더 이상 짐의 행사를 막을 수 없을 거다.’
황제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어렸다. 그토록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던 유태진이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고작 그랜드 급 수준으로 반신이었던 자신의 공세를 버텨내던 게 용하긴 했지만, 이젠 그런 분전조차 무의미해졌다.
어느새 중급신에 가까워진 자신의 힘을 고작 필멸자에 불과한 유태진 따위가 당해낼 리 없었다.
“게리드.”
[예, 하명하시지요. 폐하.]
“오늘로부터 이틀 뒤, 다시 진격을 시작한다. 이번에야말로 아르센티아 주역을 장악하고 주변 성계를 확실히 점령하는 거다.”
자신감에 찬 황제의 눈빛이 더욱 섬뜩하게 빛났다. 이젠 더 거칠 것이 없었다.
* * *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유태진은 곧바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 현재 내 경지는 현경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었다. 원영신이 완성될 때까지는 최대한 경지의 상승을 지연시킬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게 됐어.’
무학에서 일컫는 원영신이란 바로 신체(神體)를 의미한다. 기운과 정신, 그리고 육신이 하나로 융화되면서 필멸의 개념을 벗어나 초월에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도달한 것은 간신히 원영신의 기초의 토대를 이룬 수준. 정석적으로 간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사실 죽기 직전에 깨달음을 얻었을 때도 지금과 큰 차이가 없었지.’
생사경의 깨달음을 얻긴 했지만, 원영신은 만들지 못했다. 심장이 터져나가는 찰나에 얻은 깨달음으로는 원영신을 만들 새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초월자의 깨달음을 얻어놓고도 죽음을 맞이해 윤회전생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었고, 다시금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원영신을 완성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에는 반드시 완성해야 해.’
그의 영혼은 깨달음으로 반신에 도달했지만, 다른 것들이 그에 못 미쳤다. 이 상태로는 생사경의 무위를 발휘한다는 건 절대 무리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몸이 견디지 못했다.
전생 때야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만큼 거침없이 생사경의 무위를 발휘하여 천마와 동귀어진 했지만, 이번에도 그럴 순 없었다.
물론 그때처럼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지금 상태론 목숨을 건다 해도 생사경의 무위를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육체의 단련 수준은 턱없이 부족하고, 내공의 깊이도 훨씬 얕지. 이래선 어림도 없어.’
아르탈 행성연합으로 소환된 이후 매우 빠르게 성장하긴 했지만, 수십 년 이상 고된 수련을 거치면서 완성된 육체와 막대한 내공을 보유하던 전생 시절과 비교하면 아직도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몇 년 정도 더 수련하면서 차근차근 반신의 경지를 넘볼 생각이었는데, 황재의 존재가 그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올라서야겠지.”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유태진은 영혼과 정신에 해당하는 신(神)은 넘칠 정도로 충분했지만, 기(氣)와 정(精)이 부족했었다.
정기신(精氣神)을 완전히 일원화 시켜, 원영신이라는 진정한 소우주로 거듭나려면 어떻게든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 중 하나가 천룡무상신공이었다.
이무기가 우화(羽化)하여 여의주를 가진 천룡으로 거듭나듯, 천룡무상신공 또한 그러했다.
천룡무상신공은 그가 쌓아올린 점창의 모든 심법과 신공을 아우른 무학의 총아.
어떻게든 이를 통해서 승천을 시도해 볼 수밖에.
우우웅!
삼단전을 중심으로 끊이지 않고 도도하게 흐르던 진기가 돌연 격렬한 형태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속화 된 진기의 회전력은 강력한 인력을 발생시켰고, 그것은 전신을 쥐어짜는 듯한 압력으로 작용되었다.
그렇지만 유태진은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전신을 쥐어짜는 듯한 격렬한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몇 가지 무공을 더했다.
철환극강기(鐵換極强氣)
천중무한신공(天重無限神功)
지부현운신공(地浮縣雲神功)
만유합원신기(萬有合原神氣).
하나같이 점창의 기존 무공을 토대로 새롭게 창안한 유태진의 절학들이었다. 무학의 이치에 그가 배운 첨단 물리학과 온갖 영능의 지식들이 더해진 이것들은 신공이란 명칭조차 무색할 만큼 더 완벽하게 탈바꿈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공들이 만들어내는 강대한 흐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천룡무상신공은 이 모든 것을 아울러 포용하고 있었다.
만유합원신기로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기운이 그의 진기를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하고, 철환극강기가 그의 육신을 강건하게 만들어 버티게 해줬으며, 천중무한신공은 진기를 극한까지 압축하여 무지막지한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지부현운신공은 맹렬한 진기의 흐름이 엇나가지 않도록 통제하였다.
이것을 굳이 비유한다면 달궈진 쇠를 두들겨 정련하는 것과 다를 것 없는 과정이었다.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원영신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철환극강기는 혼체강신(魂體剛身)에 목적을 두고 있는 외공이었다. 흔히 위기가 닥치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정신에는 불가해하면서 강인한 힘이 존재한다.
그것을 육체의 단련과 접목시킨 것이 철환극강기였다.
고통스럽고 힘든 수련으로 육체를 단련함으로서 정신을 강화시키고, 그것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정신이 육체와 동화되면서 금강불괴에 이르게 된다.
정신이 다하지 않는 한, 혼의 강인함이 육체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렇게 강화된 혼은 육체를 보호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점차 동화되면서 육체의 구성성분을 혼 그 자체로 만든다. 즉 정신이 육체가 되고 육체가 정신이 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육체는 필멸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정신이 굴하지 않는 한 육체가 부서져도 다시 혼으로 육체를 복원할 수 있으며, 가루조차 남지 않고 소멸한다 해도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혼체강신. 반신 급 존재들이라면 반드시 갖추게 되는 원영신이자, 원영신을 초월한 경지인 것이다.
유태진은 지금 혼체강신을 단시간에 완성함으로서 원영신의 기틀을 마련할 셈이었다.
하지만 이건 도박에 가까웠다. 본래라면 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단련해 나가 완성해야 할 것이 혼체강신이지만, 지금 그가 시도하는 것은 그 긴 시간과 과정들을 완전히 압축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럴 경우 버틸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혼체강신이 완성되겠지만, 만일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유태진이라 해도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부르르르!
전신이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칠공에서는 진즉부터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허나 그가 체득한 태을단목신공은 무너져 내리려는 그의 육체를 어떻게든 지탱하게 만들었다. 머리와 심장이 박살나지 않는 한 죽지 않게 해준다는 신공의 공능은 놀라워서, 당장 죽을 것 같은 유태진의 목숨을 계속 연명시켜주고 있었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갈 것인가.
제아무리 대단한 신공이라 하더라도 한계는 있었다. 지금과 같은 무지막지한 진기의 제어가 어긋나거나, 혹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먼저 무너져 내리기라도 하면 그땐 대라신선이 와도 되살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크으···.’
전생과 현생을 거치면서 유태진의 정신력은 가히 필멸자의 수준을 넘어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단순 고통이었다면 얼마든지 버텼을 테지만, 혼체강신의 과정은 오로지 육체에만 압력을 가하는 게 아니다. 이미 정신을 육체와 동화시키는 과정에 접어든 그의 정신까지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유합원신기에 의해 무한정 유입되는 진기는 그러한 압력을 한정 없이 강화시켰다. 지금도 압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중이었다.
‘역시··· 지금의 내겐··· 너무 무리한 도박이었나.’
나름대로 강인하다고 자부했던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점멸하는 등불처럼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이젠 그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혼체강신의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신공들은 이젠 유태진의 제어 없이도 관성대로 운용되면서 압력을 가중시켜가고 있었다.
‘이대로··· 끝인가?’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던 그는 절망감을 느끼며 그만 의식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환상 속에서 천년의 수련을 마친 아서는 비로소 왕이 되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멀린의 도움으로 세력을 키우고, 재능 있는 자들을 수하로 받아들였다.
물론 저항하는 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기존의 지배세력들은 아서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물론 아서의 뜻에 호응하는 자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아서는 그들과 대적하기 위해 일단 자신의 뜻에 따르는 자들을 가르쳐 성장시켰다. 부족한 세력의 열세를 메우려면 이것이 최선이었다.
아서는 본디 재능이 없었다. 그렇기에 마스터에 이를 때까지 남들은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과정을 거쳐야 했다. 만일 멀린 덕분에 천년이란 시간을 환상 속에서 보내지 못했다면 마스터란 경지는 죽었다 깨나도 도저히 닿지 못했을 것이다.
헌데 그랬던 경험이 뜻밖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막혀 있는지 훤히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한번 거쳐 온 과정인 만큼, 풀어서 설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만일 아서가 그 과정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난하게 넘길 만큼 재능 있는 자였다면, 그들이 헤매고 있는 과정들을 제대로 풀어 상세히 설명해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