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20화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황제가 초조해 한다는 사실쯤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인베이더의 꼬드김에 넘어가 금기의 의식을 치르고 전쟁까지 일으킬 줄이야.
‘차라리 황제가 야욕에 불타서 자의적으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게 낫지. 하필 이 모든 게 다 인베이더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말 아닌가!’
심지어 여신 루네리아 같은 거물마저 이 사태를 주시하면서 만일을 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은 겉으로 드러난 상황보다 더 사태가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아문은 격렬히 들끓어 오르던 감정을 애써 진정시켜나갔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단 보다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나로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군.
이젠 더 이상 재보고 할 때가 아니었다. 인베이더의 개입이 확실한 이상 저들과의 협력을 갖는 게 현명했다.
특히 루네리아 여신은 인베이더와 절대 양립할 수 없기로 널리 알려진 존재. 그녀가 조나단의 배후가 확실하다면 이 제안은 아문에게 더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조나단은 아문의 결정을 크게 반겼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제 아문 님도 저희와 뜻을 함께 하는 동료가 되겠군요.”
“그래, 그렇게 되겠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렇게 서로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휴게실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곳이 함을 제어하는 기능을 한데 모아놓은 메인 브릿지라 하지만, 함선이 이렇게까지 거대하다 보면 승무원을 위한 편의시설 쯤은 따로 구비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간단한 음료수를 각자의 앞에 둔 채 휴게실에서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 중 아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부터는 어디로 향할 생각이지? 루네리아 여신이 계시는 본성인 아르탈 행성인가?”
“그보다는 아문 님과 함께 아르센티아 주역으로 향할 겁니다. 일단 지금은 그곳이 더 시급하거든요.
조나단의 대답에 아문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그동안 함선을 잡기 위해 중계 스테이션과 우주공간만 전전하고 다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래 벌어진 사건사고들을 아예 접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그가 거친 곳들은 인적만 없었을 뿐, 통신을 비롯한 여러 설비들은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아르센티아 주역이라. 본국과 공화국이 맞붙고 있다는 곳이군. 황제의 진격을 저지할 생각인가?”
“일단은 그럴 예정입니다. 아르센티아 주역이 점령당하면 여러모로 곤란하거든요.”
“하긴 그렇지.”
아문도 아르센티아 주역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제국 군부의 최고 위치에 있던 만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또다시 황제와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 건가.’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게다가 이번엔 황제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가 이끄는 제국의 대함대도 자신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마당이다. 인베이더라는 공공의 적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게 된 이상, 제국함대를 적대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는 건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본 함은 워프 항행에 들어갈 겁니다. 아르센티아 주역까지 대략 36시간 뒤면 당도하게 될 예정이니, 그때까진 편히 쉬셔도 됩니다. 본 함의 호화편의시설을 전부 개방해 드리지요. 황제가 누리는 호화시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잠시 즐기면서 피로를 풀기엔 충분할 겁니다.”
하지만 아문은 조나단이 제공하겠다는 그런 고급 편의시설 따위엔 별 관심도 없었다. 그는 그 배려에 감사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 전함은 뭐지? 지금까지 수많은 전함들을 봐 왔지만, 이렇게 크고 강력한 전함은 보지 못했다. 심지어 시류열광참도 상처 하나 없이 완벽히 막아냈지. 직접 보고도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천만에요. 오히려 전 아문 님의 절묘한 솜씨에 깊이 탄복했습니다. 시류열광참이라 했던가요? 시간간섭 능력을 검술에 접목시켰다는 점도 놀랍지만 좀 전의 일격은 더더욱 놀랍더군요. 시간을 파열시킴으로서 일시적인 유사 시공간 붕괴를 일으키다니. 저의 그라체우드가 아닌 다른 전함이었다면 단숨에 소멸됐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아무렇지 않게 견뎌낸 네 전함은 더 대단하지.”
“······.”
조나단이 어색하게 웃으며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문의 공격이 통했다면 모를까, 전함의 방어에 완벽히 막힌 상황에서 그걸 대단하다고 말해봐야 비웃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나단이 입을 뗐다.
“정확히 말하자면 셀프 메이드(self-made.자가제작)지요. 제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까지 한 작품인데, 아문 님과 같은 타인 앞에 선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일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조나단 너 스스로 만든 전함이다, 그런 소린가?”
“예.”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에 아문은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만큼 자신의 귀로 들은 내용이 하도 어처구니없어서였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혼자서 이런 괴물 같은 전함을 만들어냈다고?”
“유학 가서 배운 게 꽤 많았거든요. 그라체우드의 성능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원하는 수준의 전함을 건조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지요.”
문명이 발전하고 우주에 진출하게 되면서 수많은 우주전함들이 개발되긴 했지만, 이건 그런 차원을 한참 넘어섰다.
기술의 개발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계단을 오르듯 기반을 다져가면서 순차적으로 높아지는 것이지, 이렇게 비약이라 할 만큼 급격히 상승하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우주에 이름난 석학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댄 결과물도 아니고, 조나단의 단독 개발이라니. 어려서부터 천재로 유명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규격 외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도 만족을 못하고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니. 조나단의 천재성이 얼마나 괴물 같은 것인지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게다가 조나단이 방금 타차원이라고 했지? 거기서 배운 게 많다고 했는데, 그만큼 우리보다 크게 앞선 문명을 가졌다는 건가?’
아문은 이 모든 걸 준비해온 루네리아의 심모원려 함에 탄복하고 말았다. 조나단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타차원으로 유학까지 보낼 정도면, 얼마나 이번 사태를 오래 전부터 대비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조나단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전함 그라체우드가 전면에 변동중력원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곧 거대한 시공의 터널, 웜 홀로 화했고 거대한 함체가 그 안으로 미끄러지듯 진입해 들어갔다.
* * *
알카데인 황제의 전용 기함 로베르타인의 최상위 기밀 구역, AD-924ka. 이곳에서는 제국함대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의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게리드, 시작하기로 하지.”
[예, 폐하.]
황제의 명령에 따라 게리드는 준비하고 있던 의식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사실 딱히 준비랄 것도 없었다. 필요한 제단과 진의 구축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갖춰두고 있었으니까.
그들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이런 물질적인 부분 보다는 다른 부분이었다.
고오오오!
불길하기까지 한 기운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그것은 이 기밀 구역의 폐쇄된 공간에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이름 모를 의례법진을 타고 흐르면서 더욱 강렬하게 변했다.
우우우우웅!
일순 거대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격렬히 고동치는 심장처럼 공명하면서 황제의 호흡과 동조를 이루기 시작했다.
“흐으으으···.”
황제가 흥분에 찬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럴 때마다 그 주변을 휘감은 검붉은 기운이 요동치면서 체내를 반복적으로 드나들었고, 그럴 때마다 황제의 존재감은 더욱 강렬해졌다.
“오오오··· 느껴진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알 것 같군.”
알카데인 황제는 자신의 신격이 더욱 상승되어 가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반신 급에 머물 때는 자신이 가진 힘을 온전히 다루지 못하고 휘둘릴 뿐이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다루고 사용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어···엄청나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게리드가 질린 듯 중얼거렸다. 그랜드 급 네크로맨서이면서도 리치가 된 그는 생전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됐지만, 지금은 황제의 존재감을 받아내는 것조차 힘에 겨울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그 뿐만 아니라 제국함대에 속한 모든 이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일대를 잔잔히 뒤흔들고 있는 이만한 존재감과 힘의 파동을 못 느낄 리 만무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국의 각 전함에서는 난데없는 거대한 영력의 계측에 비상이 걸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힘이 갑자기 제국 함대의 진영 한 복판에서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거···거대 영자 반응 포착!]
[상상을 초월합니다. 계측수치 계속적으로 급격히 상승 중!]
[하필이면 아군 함대가 밀집해 있는, 가장 한복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건 평범한 영력이 아닙니다. 보다 상위 차원의 영자 반응 검출! 라이브러리 데이터와 대조해 본 결과, 이건 거의 신좌 급 인베이더의 신성 반응 수치와 비슷합니다.]
[설마 신좌 급 인베이더가!?]
오퍼레이터와 승무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잇따라 보고를 올렸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체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초유의 거대 영력이 아군의 중심부에서 맹렬하게 분출하고 있으니 당황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심지어 인베이더의 신좌들과 비슷한 영자 반응이 검출됐다고 하자 동요는 더욱 급격하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바르투인 사령관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이게 무슨 꼴이냐? 다들 진정해라! 지금 발생한 대규모 영력은 적의 공격이 아니다. 지금 발생한 영자 반응은 황제 폐하가 진행하고 있는 일종의 실험이니 동요하지 말고 태세를 정비하도록.”
대충 둘러댄 말이었지만, 그 말은 생각보다 잘 먹혀들었다. 왜냐면 황제의 기함에서 발생한 거대한 규모의 영력이 딱히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승무원들을 진정시킨 바르투인의 두 눈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분명 이 반응이 발생된 곳은 황제 폐하의 기함인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바르투인은 사전에 게리드로부터 언질을 받았었다. 조만간 거대한 힘과 여파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하라고.
하지만 그로서도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한 이유를 듣지 못한 탓에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현 제국 함대의 총사령관씩이나 되는 위치에서 승무원들 앞에 당황한 꼴을 보일 수 없는지라 애써 태연한 척 했을 뿐이다.
한편 황제의 기함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영자 분출은 공화국 함대에서도 감지되었다. 특히 반신 급 경지에 한발 걸친 단계에 올라선 유태진은 그 누구보다도 더 선명하게 영력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
“이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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