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19화
“···재앙이라니. 대체 이 우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여기서 풀어나가기엔 너무 장황해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저희는 장차 다가올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해 아문 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폭주하고 있는 제국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은 사소하다 싶을 만큼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지요. 이건 절대 과장이나 허풍이 아닙니다. 명백한 사실이지요. 저희들과 손을 잡으시겠다고 하면 보다 상세한 정보와 지원을 약속해 드리겠습니다.]
아문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상대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았다.
‘저 자의 말대로라면 황제가 금기의 의식을 치러 초월자가 되고 침략전쟁까지 시작하게 된 게 다 어떤 자들의 농간에서 비롯됐다는 건데··· 그냥 듣고 넘길 문제가 아니군.’
아문은 저 자와 제대로 대화를 해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전쟁까지 사소한 일로 취급할만한 재앙이 무엇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당장 결정을 내리긴 어렵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볼 순 없을까?”
[하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이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기엔 장소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일단 제 함으로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날 그 전함 안으로 초대하겠다고?”
[예, 보시다시피 머무실 공간은 충분합니다. 아문 님이 머무시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숙소를 특별히 배정해 드리지요.]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이었다. 설마 적아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자신을 함에 태울 생각을 하다니 대체 무슨 의중이란 말인가?
‘날 안으로 들이겠다고 하다니. 무슨 꿍꿍이속이 있기라도 한 건가?’
그 의도가 조금은 의심스럽긴 했지만 제안을 거절하진 않기로 했다. 상대가 보유한 전함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 내부까지 견고할 순 없는 법. 자신이 안에서 힘을 쓰면 얼마든지 박살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뭐 그것도 좋겠지. 기껏 초대까지 해 줬는데 이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닐 거고.”
[잘 결정하셨습니다. 그럼 안으로 모시지요. 이제부터 본 함 안으로 이동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항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름 모를 함의 측면에서부터 푸른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그것은 아문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아문은 저항하지 않았다. 마도공학이나 기술에 대해선 깊은 지식이 없는 그였지만, 지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저 빛에 어떠한 공격적 성질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정도는 금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위이잉!
빛이 아문의 전신을 휘감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시야에 비치는 광경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광활한 우주의 풍경만이 눈에 담겼는데, 지금은 전함의 실내로 짐작되는 광경이 고스란히 들어오고 있었다.
아문은 내심 깜짝 놀랐다.
‘공간이동이군. 설마 이런 식으로 외부 인원을 함 내로 이동시키다니.’
이런 공간이동 기술은 3대 세력 중 어떤 곳에서도 개발된 적 없는 것이었다. 기존에도 공간이동을 활용한 기술이나 설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규모가 크거나 사용 과정이나 절차가 복잡한 것들이 많았다.
헌데 단지 이동시킬 대상에게 레이저와 같은 빛을 쏘이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목적지로 공간이동 시키다니. 이건 가히 혁신이라 할 만한 기술이었다.
허나 놀람도 잠시 뿐. 주변을 한 차례 돌아본 아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메인 브릿지인가?”
그에게는 꽤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오래 전부터 제국 군부에서 활약해온 그에게 있어 함을 통솔하고 제어하는 장소인 메인 브릿지는 제아무리 형태나 구조가 달라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하지만 뭔가 좀 이상했다. 이 거대한 전함을 통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오퍼레이터나 화기관제 담당, 혹은 조타수 같은 운용인원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아문이 함장석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 없는 젊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꽤 대담도 하군. 무슨 배짱으로 날 메인 브릿지 안으로 곧장 이동시킨 거지?”
“일단 저와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이쪽으로 모셔야 했으니까요.”
“내가 마음을 바꿔 이 함을 탈취하거나 파괴하려고 했으면 어쩌려고?”
아문이 짐짓 위험한 표정을 지으며 거짓 협박을 날렸지만, 상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실 리 없을 거라 믿고 있었으니까요.”
‘생각보다 더 대담한 놈이군.’
아문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냥 말로만 위협한 게 아니었다. 제대로 기세까지 드러내서 상대를 압박한 상황이었다.
물론 정말로 공격하거나 함을 탈취할 생각은 없었지만, 기세만큼은 진짜였는데 상대는 이를 가볍게 흘려보냈다.
나름대로 본인의 실력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적어도 그랜드 급의 강자.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타난 거지? 놈이 가진 이 규격 밖의 전함도 그렇고.’
물론 아문이 작정한다면 굳이 제압 못할 것도 없겠지만, 먼저 호의를 보내온 상대에게 굳이 손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무력을 사용하기보다는 먼저 질문부터 던졌다.
“일단 그 이름부터 듣고 싶군. 네가 누군지도 모른 상태에서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제야 사내가 너스레를 떨며 제 이름을 밝혔다.
“어이쿠,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조나단 프론사이드]라고 합니다.”
“조나단 프론사이드!? 아아, 그렇군. 연합의 5대 가문인 프론사이드 가가 최근 배출했다던 두 천재 남매 중 하나가 바로 그런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아문은 곧바로 상대의 신분과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문 님 정도는 아니지만 저도 나름대로 유명했던 몸이었죠. 역시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래 모를 수가 없지. 3대 세력의 고위층에 이름을 올린 자들 가운데 네 녀석의 이름은 들어보지 못한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나단은 어려서부터 수많은 마도공학 기술들을 개발해 그 싹을 드러내 보였으며, 어느 정도 장성한 이후에는 가히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신기술들을 연거푸 내놓아 우주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한때 제국에서도 그 때문에 조나단의 존재를 심각하게 경계하지 않았던가. 이대로 가다간 연합과 제국, 공화국 3대 세력이 유지해오던 오랜 균형이 연합 쪽으로 급격히 기울게 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런 우려가 구체화되기도 전에 조나단이 먼저 종적을 감추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터라 누구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세간에서는 그의 천재성을 노린 자들에게 강제로 납치된 거다, 혹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자들에 의해 살해되어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을 거라는 온갖 유언비어들이 떠돌았지만, 어느 누구도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게 조나단은 실종 처리되었고, 그의 행적을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헌데 그랬던 조나단이 난데없이 규격 밖의 거대전함을 끌고 자신 앞에 나타나게 될 줄이야.
“실종되었던 녀석이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나타나다니, 역시 헛소문은 헛소문이었군.”
“아하하··· 저도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별의별 소문들이 다 돌았더군요. 코미디를 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근거도 없는 억측들이 나돌다니, 세상은 여전히 재밌더군요.”
자신에 대한 온갖 좋지 못한 소문들이 떠돈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걸 재미있다고 말하는 조나단도 아문의 눈에는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무튼 몇 년 동안 종적을 감추고 사라지더니, 그냥 이유 없이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군. 방금 전에 재앙 운운하는 걸 보면 조나단, 네가 사라졌던 것도 그와 관련된 문제 때문인 게 맞나?”
“예, 정확합니다. 그 때문에 나름 대비를 하고자 잠시 유학을 좀 갔다 왔지요. 그래서 몇 년 자리를 비웠던 게 그런 ”
“유학이라고? 대체 어디로? 너 정도 되는 천재라면 어딜 가든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너 자신에 대한 소문조차 듣지 못했던 거지?”
아문으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알기로는 조나단은 마도공학을 비롯한 온갖 지식들을 섭렵해 더 이상 배울 게 없을 정도라고 알고 있었는데, 3대 세력 중에 그가 배울만한 수준 높은 지식을 보유한 곳이 존재했었다는 건가?
그리고 근래에 와서 자기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 그동안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는 건가?
그러자 조나단이 그 의문에 대답을 내놓았다.
“아, 이곳과는 연락 자체가 거의 닿을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먼 곳이라서요. 하긴 제가 유학간 곳이 바로 이 우주와는 전혀 다른 타 차원에 속한 곳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뭣? 타 차원이라니! 그럼 정말로 차원이동을!?”
아문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설마 여기서 타차원이 언급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예, 여러 모로 도와주신 분이 있었죠. 그리고 제가 좀 전에 말한 재앙을 막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분의 의사였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대비해 오셨지요.”
“그럴 리가. 차원이동은 지금으로선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영역인데···.”
현재 3대 세력이 다다른 마도공학의 기술과 영능학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긴 했지만, 차원이동이 가능한 수준에는 아직 다다르지 못했다. 타차원의 존재는 이론적으로 인지하고 있지만, 실제 차원이동을 시도하는 건 아득히 먼 훗날에나 가능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조나단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져왔다.
“물론 기술적으론 그렇겠죠. 하지만 그게 과연 신적인 존재들에게까지 그럴까요?”
신적 존재가 언급된 순간, 아문은 차원이동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자신 같은 반신 급에게는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보다 상위의 초월자들이라면 간섭력만 충분할 경우 타차원을 넘나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 보았다.
“그 말은 널 타 차원으로 보내주고, 재앙에 대비해왔다는 자가 바로 신이라는 말인데··· 대체 어떤 분이시지? 평소에도 관망만 하시던 본국의 윌키아 여신께서 타국의 인재에게 굳이 그러실 리는 없고··· 설마 그렇다면!?”
불현 듯 머릿속에 떠오른 존재에 대해 아문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짓자, 이를 눈치 챈 조나단의 뒤이은 말이 그 사실을 확신시켜주었다.
“예, 그 분은 빛과 생명의 여신 루네리아. 저를 타차원까지 유학 보내주신 것도, 당신에게 진실을 알리고 조력을 요구하신 것도 바로 그 분입니다.”
“······.”
조나단의 배후 정체를 확인하게 된 아문은 일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마 그런 거물의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해서였다.
하지만 덕분에 그동안 의문점으로 남아 있던 부분에 대한 해답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분이 움직이신다는 걸 보면, 혹시 황제를 부추겼다는 놈들이 바로 인베이더인가?”
“예, 그 정도 사안이 아니고서야 그분이 직접 나서실 리가 없지요.”
“빌어먹을!”
어김없이 돌아온 예상대로의 대답에 아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욕설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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