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18화
그리고 그 짧디 짧은 찰나의 타이밍을 아문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가 손에 쥔 한 자루 검으로부터 피어나는 거대한 섬광! 그것은 막강한 힘으로 시공간을 단열하면서 작용하는 극대의 참격이었다.
익스큐터 류.
시류열광참(時流裂光斬)
막강한 영력으로 시간 자체에 간섭해 파열시킴으로서 해당 시간에 종속된 모든 것을 파괴하는 강력한 비기.
시간은 물론 공간까지 단열되면서 발생하는 소멸 현상인 만큼, 평범한 방어수단으로는 절대 막아낼 수 없었다.
콰드드드!
검 끝에서 시작된 거대한 참격이 우주 공간 위로 번뜩인 순간, 시간과 공간이 광범위하게 뭉개지면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분쇄되기 시작했다. 근처에 떠돌던 제법 큰 소행성들 다수가 이에 휘말리면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일격조차 아문의 목적을 이루진 못했다. 정작 그가 박살내고자 했던 목표는 여전히 건재한 상황이었다.
아문이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외쳤다.
“말도 안 돼! 이걸 막아낸다고?”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쥐어짠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이랄 수는 없겠지만, 나름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준대형 전함은 물론 대형 전함이라 해도 일단 적중되기만 하면 충분히 대파시킬 수 있는 위력의 시류열광참이 이렇게 완벽히 막혀 버리다니.
그가 아는 한 현존하는 전함들의 기술력과 성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웜 홀조차 붕괴되지 않았다. 시공간 간섭에 가장 취약한 웜 홀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그런 혼란에 빠진 아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체불명의 거대한 실루엣이 웜 홀의 입구를 벗어나면서 그 형체를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쿠우우우!
사방으로 널리 울려 퍼지는 묵직한 파동.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담고 있었다.
설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한 척의 전함.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알카데인 황제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강대한 위압감을 지금 저 전함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까지 크고 강력한 전함이 존재했다고?’
지금까지 수백 년 이상 살아오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전함들을 봐 왔지만, 눈앞에 나타난 이건 그런 기존의 규격을 아득히 초월했다.
작은 위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전함이 위성처럼 둥글게 생겼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 규모만큼은 그에 충분히 필적했다.
그리고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다. 저 미칠 듯한 크기에 걸맞는 강대함마저 갖추고 있었다.
‘이런 게 황제의 추격함일 리가 없다. 황제가 이런 강력한 전함을 제조할 기술력을 보유했다면 진작 전쟁을 일으켰어야 해.’
은연중에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최대급 병기라 일컫는 행성요새마저 능가했다. 이 정도면 전세의 판도를 뒤집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문은 경직된 표정으로 모든 기세를 끌어올렸다. 전함의 소속과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선 전력을 다해 대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쿠구구구!
반신 급 강자인 그가 모든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우주공간이 삐걱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전력을 다해 적을 배제하려던 그 순간, 이름 모를 전함으로부터 느닷없이 영언이 전해져 왔다.
[아문 익스큐터 님 맞으십니까?]
“뭐? 넌 누구냐? 내 이름을 아는 걸 보면 네놈은 내 적이냐?”
서릿발 같은 그 반문에, 상대방이 또다시 영언을 보내온다.
[아아, 그렇게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아문 님의 적이 아니니까요.]
적의는커녕 느긋하기까지 한 목소리. 하지만 아문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적이 아니라면서 잘도 날 이곳까지 찾아왔군. 내 위치까지 파악할 정도면 내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물론 소식은 들었습니다. 알카데인 황제에게 쫓겨 도주 중이시라고요? 론데니움크리스에서 이곳까지 경로를 이어보니 대충 공화국으로 향하시는 것 같더군요.]
“······.”
자신의 정체는 물론 그동안의 행적까지 읽어내는 상대방의 능력에 아문은 내심 소름이 다 끼쳤다.
본디 아문은 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반신 급 강자이긴 했지만, 그의 실제 얼굴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문 편이었다.
군부나 제국 최고 회의 같은 중요한 비공개회의에는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었지만, 대중들도 볼 수밖에 없는 공식석상의 자리에는 참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런 자신의 얼굴을 알아본다? 그렇다면 상대의 정체를 추론할 수 있는 범위도 그만큼 좁혀진다.
‘적어도 3대 세력의 고위층 인사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겠지.’
짐작컨대 그의 본 얼굴을 아는 자는 그 정도가 전부였다.
아문은 어지간해서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가끔 외교적 문제 때문에 공화국이나 연합의 고위층과 마주한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기록이나 영상을 남기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하긴 했지만, 상대가 기억력을 토대로 몽타주를 구성하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분위기를 보니 날 적대하는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방심할 순 없지.’
아문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 꽤 많은 걸 아는 것 같군. 대체 정체와 목적이 뭐냐? 그런 소릴 주절주절 대는 걸 보면 내 적은 아닌 것 같고··· 뭘 원하는 거지?”
[하하. 꽤 단도직입적인 물음이군요. 그렇다면 저도 거두절미 하고 용건부터 꺼내지요.]
한 차례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린 정체 모를 상대는 잠시 뒤,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물음을 던져왔다.
[아문 님. 혹시 이번 전쟁, 막고 싶으시진 않습니까?]
“뭐?”
아문의 얼굴이 일순 허를 찔린 듯 당혹스럽게 변했다. 설마 정체도 모를 상대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전혀 예상 못해서였다.
[그리 놀라실 거 없습니다. 단순한 추론이죠. 아문 님은 현재 황제에게 쫓기는 입장 아닙니까? 그런 분이 굳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아르센티아 주역으로 향하시는 걸 보면 누구든 짐작할 수 있는 부분 아닙니까?]
상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아문은 그게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고작 그 정도 단서만으로 거기까지 읽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덕분에 아문은 상대가 상당히 높은 지능의 보유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별다른 전투 없이 대화와 합의만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을 듯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체 모를 상대를 향해 자신의 속내를 사실대로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굳이 숨겨야 할 만큼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고작 내 행적만 갖고 잘도 알아냈군. 그래, 네 말대로지. 난 황제의 폭주를 막고 아무 의미도 없는 이 전쟁을 중단시키고 싶다.”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혼자서는 무립니다. 아문 님이 반신 급의 강자라 해도. 더군다나 지금의 황제는 윌키아 여신의 권능 없이도 초월자의 힘을 손에 넣기까지 했죠. 심지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첩보까지 입수되고 있는 판국입니다. 아문 님 한 사람이 더해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상대의 말은 지극히 정론이었다. 반신 급 강자가 수많은 함대를 대신할 정도로 강력하긴 하지만, 제국이나 공화국 정도 되는 거대 세력의 주력이 부딪치는 전장의 판세를 한순간에 뒤엎을 만큼의 절대적인 전력은 되지 못한다.
특히 황제에게 패한 지금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아문은 곧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제국은 내 조국이 되었다. 고작 황제 한 사람의 야욕에 수많은 제국민들의 피가 무의미하게 흐르는 것만큼은 막고 싶다.”
아문이 처음부터 제국민이었던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제국에 한동안 머무르게 되었고, 어떤 계기를 겪으면서 완전히 눌러앉게 되었다.
처음엔 딱히 소속감이나 애착도 없었지만, 그것도 수백 년 이상 긴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으로 지켜온 제국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아문의 진심이 전해진 건지, 상대도 보다 진지해졌다.
[···진심이시군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저도 아문 님을 돕도록 하지요.]
“돕겠다고?”
아문이 무슨 소리냐며 거대 전함 쪽을 쳐다보자, 상대가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예, 아르센티아 주역까지 타고 갈 함선이 없어서 곤란하신 것 같던데, 제가 그곳까지 태워 드리지요.]
맨 몸으로 우주를 가로질러야 하는 아문의 입장에서는 가히 천금 같은 제안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에 기뻐하는 대신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아니지. 그런 게 아니야. 네 녀석은 애당초 전쟁에 끼어들 생각이었군.”
[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난데없이 던져진 아문의 말에도 상대는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흥미를 느낀 듯 보였다. 목소리에 실린 감정만으로도 상대방의 감정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굳이 내 행적을 추적해 이곳까지 찾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내가 황제에게 쫓겨 도망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자들은 이 우주에서도 아주 극소수일 텐데,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넌 보통 인물이 아니야. 게다가 이런 터무니없는 전함까지 보유한 녀석이 아무런 이유나 목적도 없이 이런 외진 지역을 한가하게 돌아다닐 리도 없고. 애당초 날 전쟁에 끌어들일 생각이었지?”
[아하하, 너무 얕은 수작이었나 보군요. 역시 수백 년의 연륜이 어디 가는 건 아닌가 봅니다. 예, 맞습니다. 제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아문 님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지요.]
“역시 그랬군. 그래서 내 힘을 이용해 제국의 전력을 깎아낼 셈인가?”
황제와 틀어지긴 했어도 제국을 아끼는 아문으로선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대방의 대답여하에 따라 이 자리에서 적으로 돌릴 각오를 다지던 그때, 이름 모를 상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럴 의도가 아주 없었다곤 할 수 없겠죠. 지금 당장 우주의 정세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는 건 제국의 침략이니까요. 일단 제국의 침략전쟁을 막으려면 아문 님의 힘도 일정부분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저희의 핵심 목적은 아닙니다.]
“그게 진짜 목적이 아니라고? 그럼 또 뭐가 있는 거냐!”
[아문 님께서 현재 어디까지 파악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사태는 단순히 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문 님이 아시는 것보다 더 깊고 어두운 내막들이 숨겨져 있지요.]
“내가 알지 못하는 내막이 있다고? 황제가 단순히 정복욕에 불타올라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예, 황제의 야욕이 크긴 했지만 진짜 전쟁을 벌일 정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단지 그것을 알아채고 오래 전부터 부추긴 작자들이 있지요.]
“······.”
아문은 지금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단순히 제국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더니, 이건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의혹이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물론 상대방이 거짓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반신이 된 그의 영감이 전해주는 초월적인 분별력은 그게 전부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