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67화 (368/448)

15권-17화

“너무 실망할 것 없어요. 베네트 국장. 우리도 그냥 손 놓고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니랍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베네트 국장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퍼뜩 깨닫고 말았다.

“여신님께서? 그렇다면··· 설마 오랫동안 칩거하고 계신 것도 그래서였습니까?”

상위 초월자들이 어지간해서는 물질계에 간섭하기 어려운 처지라고는 하지만 마냥 그런 것도 아니다. 특히 연합이라는 거대 세력으로부터 열렬한 신앙을 한 몸에 받아들이고 있는 루네리아라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네리아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나서는 법이 없었다. 지난 라인트라 대전 때만 하더라도 아무런 간섭조차 하지 않았던 게 바로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빛과 생명의 여신으로서의 역할에는 넘치도록 충실했다. 자신을 믿는 신도들에게 일일이 응답하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신성력을 베풀어 주었으니까.

하지만 연합이라는 거대 세력의 지주적 존재라고 하기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도 그녀의 긴 침묵에 의아해 하고 있었는데, 설마 훗날을 위해서 남몰래 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놀랍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베네트 국장에게, 루네리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애당초 이 사태는 오래 전부터 예견되어 있었어요. 신좌들이 꾸미는 음모의 과정은 짐작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그들의 최종 목적이 변하지 않는 이상 어떤 결과를 만들어갈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니까요.

그래서 저도 남모르게 오랫동안 준비해 왔습니다. 멀린은 그런 저의 손발이 되어주었죠.”

그 말에 윌키아와 베네트 국장은 멀린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 뿐이었다.

‘그랬군. 그래서 멀린이 본 모습을 감추고 지구의 소환자 흉내를 내면서 활동을 한 거였나?’

안 그래도 그동안 수상쩍었던 멀린의 행적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관리국의 지시에는 충실히 따르긴 했지만, 종종 알 수 없는 행동이나 종적을 읽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일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게 다 여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니.

“하지만 저희의 대비책이 완벽한 건 아닙니다. 아직도 여러 가지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그렇군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신좌들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루네리아와 멀린이 오랫동안 암중에서 준비해왔다 하더라도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관리국은 물론 연합 전체가 적극 지원하면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허나 기대와 달리, 루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요. 베네트 국장. 하지만 지금 현재 필요한 건 물질적인 지원이 아니랍니다.”

“예? 그렇다면···.”

“물질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어요. 우리의 대비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어떤 특정 조건들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건 물질적인 지원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군요.”

베네트 국장으로선 여신이 준비한 대비책이란 게 무엇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특정 조건이 갖춰져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안배라니··· 관리국의 국장으로 수많은 것들을 보고 겪어온 그로서도 도무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하지만 애써 캐묻진 않았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다면 그녀 쪽에서 먼저 청해올 테니까.

그래도 궁금하다는 그의 속마음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던 모양인지, 멀린이 이를 보고 피식 웃어보였다.

“우리 국장님, 어지간히도 궁금하단 얼굴을 하고 계시군요. 하긴 그 심정 이해는 갑니다. 제가 반대 입장이라도 충분히 그랬을 테니까요.”

“······.”

베네트 국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눈을 치켜뜨면서 멀린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 작자가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예나 지금이나 멀린은 얄미운 구석이 많았다. 멀린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된 지금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 상대하기 성가시고 껄끄러웠다. 그의 진짜 신분을 생각하면 직책상으로도 더 이상 베네트 국장의 아래가 아니었다.

예전같이 권위로 찍어 누를 수 없게 되어 불편한 표정만 짓고 있는 그 모습이 딱해 보였던지 루네리아가 슬쩍 끼어들었다.

“멀린, 짓궂은 장난은 그쯤 해두세요. 베네트 국장도 알 자격은 충분하잖아요.”

“예, 예. 평소에 워낙 딱딱하고 고지식한 양반이라서요.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놀려보겠습니까? 안 그래도 이것저것 대비하느라 바쁜 절 수시로 불러들여 알뜰살뜰 부려먹었으니 이참에 조금이라도 갚아줄까 싶어 골려준 거지요.”

굳이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멀린도 그동안 나름대로 고충이 많았다. 특히 천외오천으로서 바쁘게 활약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준비를 해왔으니, 그가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서 신좌들에 대한 대비책이란 게 도대체 뭐죠? 이제 속 시원히 말 좀 해 봐요.”

잠깐의 기다림을 참지 못한 윌키아가 급히 재촉하자, 멀린도 결국 지금까지의 장난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예, 윌키아 여신님. 저와 루네리아 님이 지금까지 준비해온 대비책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이 자리에서 밝히도록 하지요.”

베네트 국장과 윌키아 여신의 집중된 시선 속에서 멀린은 그동안 감춰온 사실을 밝혔다.

“그 방법이란 바로 제 1신좌 그룬베일을 패퇴시키고 연합을 세운 제노디안 님의 초월신기, 엑스칼리버를 다시 부활시키는 겁니다.”

* * *

론데니움크라스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아문 익스큐터는 우주라는 거대한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적당한 중계지점을 거치면서 여객함이든 뭐든 붙잡아 타고 곧장 공화국으로 향해야 했지만, 현재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중간에 만난 중계 스테이션이나 거점 행성들마다 제대로 남아 있는 함선이 없었다.

“작은 소형함 한 척 안 남았군. 이미 전쟁이 시작된 건가?”

그것 밖에 다른 이유는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그가 거친 스테이션이나 거점 행성에는 함선은 물론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다급히 도피한 흔적만이 어수선하게 남아 있었다.

내부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비상시 스테이션을 탈출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을 작은 구명함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전부 이 주역에서 도피하기 위해 사용된 모양이었다.

“결국 맨몸으로 아르센티아 주역까지 우주공간을 유영해 날아가야 하는 건가?”

상상만으로도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먼 거리를 맨몸으로 날아간다는 게 과연 쉬울 리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반신인 만큼 먹고 마실 필요가 없으니 아예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끔찍할 만큼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전쟁이고 뭐고 다 결판나서 론데니움크라스를 목숨 걸고 탈출한 것이 전부 무의미해질 터였다.

“지금부터 스테이션이나 중계기지 따윈 무시하고 전력으로 날아간다 해도 제 때 도착하진 못하겠군. 상황을 보니 벌써 전쟁이 시작된 모양인데···.”

제 때 도착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대로라면 아마도 전쟁이 끝난 수년 뒤에나 도착할 것이 뻔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검술이 전문이었지, 마법 따윈 곁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자잘한 하위 마법이라면 모를까 공간이동 같은 고위 마법은 다루지도 못하며, 설혹 다룰 수 있다 하더라도 수백 수천 광년 이상 떨어진 거리를 평범한 공간이동 따위로 이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히 먼 주역을 이동하는 데에 중형 이상의 전함의 워프항법이 사용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상황이 이렇다 하더라도 아문은 알카데인 황제의 폭주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는 제국을 사랑했다. 본디 제국 출신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제국에 몸담게 되었고 제국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였다. 황제보다는 제국의 안녕을 우선시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내버려둘 수 없었다. 황제의 걷잡을 수 없는 폭주가 제국을 전화의 불길로 밀어 넣을 것을 뻔히 아는데, 어찌 그냥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그래도 일단 하는 데 까지 해 보긴 해 봐야겠지. 이번 고비만 어떻게 넘기면 내 공간이동 반드시 익히고 만다.”

푸념 섞인 말을 내뱉은 그는 마지막으로 찾아낸 중계 스테이션으로부터 서서히 몸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공화국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 날아가려던 그 순간!

중계 스테이션 측면의 우주 공간이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변동중력원 생성에 의한 워프 아웃 반응이었다. 아문은 잠시 멈칫 놀라면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지? 다 도망가고 중계 스테이선들이 전부 텅 빈 상황에서 정기선이 도착한 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전쟁 때문에 중계 스테이션들이 전부 비어 있는 상황에서 정기선이 정상운행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바로 눈앞에서 워프 아웃이라니.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싶어 호기심에 지켜보았지만, 점점 갈수록 아문의 얼굴이 경악의 감정으로 번져나갔다.

“이럴 수가! 이런 규모의 워프 아웃이라고!?”

점점 크기를 키워나가는 변동중력원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평범한 정기선 한두 척이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대규모 함대가 이동해오고 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아문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설마, 황제가 날 잡기 위해 여기까지 추격함대를 파견한 건가?”

그것 밖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이만한 대규모 함대를 별다른 전략적 가치조차 없는 텅 빈 중계 스테이션까지 보낼 만한 사건이라곤 자신이 이곳에 머문다는 것 단 한 가지 뿐이었으니까.

‘워프 아웃이 시작된 지금 도망가 봐야 이미 늦었다. 여기서 추격함대를 완전히 박살내고 떠나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 추격의 끈을 끊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황제도 자신의 전력을 감안해서 보낸 함대일 테니까.

아문이 결연한 표정으로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상대가 워프 아웃을 하자마자 선제 타격을 가함으로서 전력을 대폭 깎아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고오오오!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힘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반신이란 피륙으로 된 육신을 초월하여 정기신이 하나로 일체화 된 원영신을 완성한 자. 그 그릇은 가히 무진장에 달하는 힘을 담아낼 수 있으며,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의 모든 영자를 지배하에 둘 수 있었다.

그렇게 아문의 전신을 기점으로 집속된 힘이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구현되려던 순간, 드디어 변동중력원으로부터 생성된 거대한 웜 홀과 함께 어떤 거대한 형체의 선두가 웜 홀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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