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66화 (367/448)

15권-16화

허나 이번에도 멀린은 흐르는 물처럼 막힘없이 답변을 내놨다.

“아마도 그가 치른 의식은 미완성일 겁니다. 유태진 씨가 전해온 정보대로라면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고 했으니, 황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더 강력한 초월자로 성장해 가겠지요. 아니면 별도의 추가적인 의식을 치름으로서 지금보다 더 완성되거나 말입니다.”

베네트 국장도 그에 대해선 더 이상 반론하기 어려웠다. 유태진이 전해온 정보대로라면 황제의 신격은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싸우는 도중에도 그 성장세가 뚜렷이 느껴질 정도라고 했으니, 멀린의 말을 괜한 우려라 할 수도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 친다면··· 멀린, 당신은 어느 정도로 예측하지? 황제가 어느 수준까지 오를 수 있을까?”

“적어도 중급 신, 최악의 경우 그 이상일 지도 모르지요. 그 정도는 되어야 인베이더들도 오래 전 멈췄던 대업을 다시 시도해볼 마음이 들 테니 말입니다.”

“최소한 중급 신이라. 그것도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확실히 그쯤 되면 우주적인 재앙이지.”

중급 신이라 표현하면 그다지 격이 높지 못한 듯싶지만, 결코 낮은 게 아니었다. 작정하고 권능을 발휘하면 어지간한 성계를 박살내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윌키아만 해도 중상급의 여신으로서, 그녀가 진심으로 힘을 발휘할 경우 태양계보다 더 거대한 성계를 한순간에 먼지로 만들 수 있다.

단지 섭리에 의한 수많은 제약 탓에 그 힘을 온전히 물질계에 투사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중급 신은 말 그대로 우주적인 재해나 다름없는 존재.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주의 상당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황제가 강력한 초월자가 된다 해도 과연 인베이더의 뜻대로 움직여 줄까? 놈의 에고는 확고하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거나 지배당할 위인이 아니지.”

지금까지 론데니움 제국이라는 거대 세력 안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해온 황제였다. 설령 상대가 인베이더의 신좌라 해도 알카데인 황제가 그에게 머리를 굽힐 리가 없었다.

“결국 놈들 입장에선 절대 통제할 수 없는 무기를 만든 셈인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인베이더들이 그리 허술하게 일을 진행할 리가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이지?”

지금까지 인베이더들은 보기에는 마구잡이로 침략해오는 것 같아도, 철저한 계획에 따라 침략을 진행해오고 있었다. 그런 놈들이 그 정도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켰을 리 없었다.

멀린도 거기까진 미처 알아내지 못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저도 딱히 단서를 잡지 못했습니다만 아마도 뭔가 방법이 있겠지요. 허나 지금 이 시점에서 황제에 대한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하지 않다니. 중급 신에 버금가는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베네트 국장이 어이없어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멀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황제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단일 뿐, 그게 그들의 목적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인베이더들의 이번 최종 목적은 신좌들이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신좌들이 활동은 재개하게 만든다고!? 그게 정말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경우인지라 베네트 국장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인베이더의 신좌들은 지난 천년동안 단 한 번도 본격적인 활동을 한 사례가 없었다. 라인트라에서처럼 잠시잠깐 힘을 드러내 간섭한 경우는 더러 있어도, 본격적으로 개입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게 다 간섭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헌데 만년 간섭력 부족에 허덕이는 그들이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된다고 하면, 그걸 충당할 어떤 수단을 확보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음, 멀린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그럴만한 근거는 있는 거겠죠?”

이번엔 윌키아 여신의 물음이었다. 멀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설명을 이어나간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천오백년 전. 제 1신좌인 그룬베일은 유니버셜 테라 코어를 장악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그들이 보유하던 막대한 업과 간섭력을 소모하였지요. 물론 제노디안 님에 의해 상당한 타격을 입고 실패하긴 했지만, 그룬베일과 신좌들이 오늘날까지 침묵하고 있었던 건 당시 너무 막대한 양의 업과 간섭력을 소모했던 탓이 더 큽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모했던 업과 간섭력을 어떤 계기를 통해 회복할 길이 생겼다는 건가? 그게 바로 황제고?”

“예, 그렇습니다. 그게 어떤 원리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건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조사해온 인베이더의 행동방식으로 미루어 볼 때 그렇게 추측되고 있지요.”

“하지만 추측일 뿐, 딱히 뚜렷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인데.”

그랬다. 멀린의 말에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심증에서 그쳤다. 베네트 국장의 생각처럼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황인 것이다.

“베네트 국장님의 말처럼 확신할만한 근거가 조금 부족하긴 하지요. 헌데 그런 추측에 확증을 심어주는 건 바로 지금 이 시기입니다.”

“시기?”

“천오백년 전 당시 제노디안 님은 그룬베일을 비롯한 신좌들에게 강력한 의례주법을 시행함으로서 그들의 인지와 행동을 제약했습니다. 그 결과 성좌들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죠. 허나 공교롭게도 최근 그 의례주법의 힘이 약화되다 못해 아예 소실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슬슬 한계에 이른 것이지요.”

“···그렇군. 멀린 당신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제야 알겠어. 시기가 공교로울 정도로 들어맞는군.”

오랫동안 신좌들의 발을 묶어두던 의례주법의 힘은 소실되었고, 황제는 인베이더의 지원 하에 필멸자의 위치에서 초월자의 영역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그렇게 초월자가 된 황제는 난데없이 공화국과의 전쟁을 일으켰다. 심지어 인베이더들은 연합이 공화국으로 대규모 함대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놈들이 차라리 전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서 침공해 왔었다면, 이쪽도 대응책을 세우기는 한결 편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력을 모아서 격퇴하면 될 뿐이니까.

그렇지만 인베이더들은 의외로 성가시고 까다로운 전술을 꺼내들었다. 바로 함대들의 전력을 한데 집중하지 않고 수백 개로 분산시킨 뒤, 연합의 세력권을 거의 무작위나 다름없는 경로로 공격해온 것이다.

이러니 연합도 전력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디로 쳐들어올지 짐작할 수도 없는 만큼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게다가 놈들은 한 군데도 아니고 무려 수백 군데의 포인트를 동시에 침공해 왔다. 각 포인트를 침공해온 인베이더의 전력은 우려할 만큼 대단치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정도도 아니었다.

특히 변변한 함대 전력조차 없는 연합의 변두리 성계는 이미 놈들에 의해 점령당해버렸고, 그 피해는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상황.

물론 관리국에서도 즉각 함대를 파견해 대응하고 있지만, 그래봐야 뒤늦은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는다. 놈들의 움직임을 침공 경로를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이상 선제공격에 의한 피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인베이더의 신좌 놈들이 짜놓은 판이라 이거지?”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연합의 발을 사실상 묶어두는 거나 다름없는 공세. 전에는 단순히 공화국의 지원을 막기 위해 수작을 부리나 싶었지만, 설마 이런 내막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알카데인 황제가 치른 의식이란 건 단순히 필멸자를 초월자로 끌어 올리는 게 전부가 아닌 것 같더군요.”

“그럼 뭐가 또 있다는 건가?”

“거기까지는 저도 확인해보질 못해서요. 짐작일 뿐이죠. 제 나름대로 조사는 꾸준히 해 왔지만, 깊은 내막까지 파헤치기엔 너무 위험하더군요. 하지만 인베이더들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든 그들의 목적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걸 확실히 인식하면 답은 간단하지요.”

인베이더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놈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베네트 국장이 작게 읊조렸다.

“···지성체의 멸망.”

“예,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지성체의 멸망인 이상 답은 결국 한 가지뿐입니다. 신좌들의 활동 재개지요.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그들이 바라는 지성체의 멸망은 절대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인베이더의 세력이 강성하다고는 하나, 그 정도로 모든 지성체들의 멸망을 운운하긴 어려웠다. 여기 있는 빛과 생명의 여신 루네리아나 새벽의 여신 윌키아를 제외하더라도 이 우주에는 무수한 초월자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제 1신좌인 그룬베일이 직접 나선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최상위 신들조차 이 우주에 여럿일 정도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신좌들이 직접 나설 수도 없는 인베이더의 힘은 나름 강대하긴 해도 크게 두려워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나마 지금의 세력구도가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다른 상위의 초월자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초월자들에 의해 인베이더는 진작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골치 아프군. 지금 날뛰는 황제조차 중급신에 버금가는 재앙이 예정되어 있는 판국인데, 신좌들까지 활동을 재계할 가능성이 크다니. 이걸 어떻게 감당한다?”

연합과 공화국이 축적해온 힘이 크다고는 하나 신좌들을 감당할 정도는 못 된다. 은거하고 있는 자들 중 반신급이나 하급신에 버금가는 초월자는 더러 있지만, 중급이나 상급 신에 버금가는 자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중상급 신인 윌키아나 상위신인 루네리아는 신좌들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고위의 신격들이지만, 그들도 간섭력의 제약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

그들이 직접 나서서 싸울만한 간섭력을 축적했을지는 의문이었다.

베네트 국장의 시선이 루네리아를 향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에요. 활동을 재개한 신좌들과 직접 대적하기에는 제가 보유한 간섭력이 턱없이 부족하군요.”

“그렇습니까?”

대답을 들은 베네트 국장은 실망에 찬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르탈 행성 연합이라는 거대한 세력 안에서 연합인들이 보내오는 수많은 신앙을 끌어 모으고 있었지만, 모인 만큼 소모되는 신앙도 적지 않았다.

얼마 전 지구에 자신의 신앙 심기 위해 간섭력을 대량 소모한 경우만 해도 그러했다. 신도들에게 섬김을 받으려면 신도 지성체들에게 그만큼 베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좌들을 견제하는 데에도 막대한 간섭력이 소모된다. 그들이 섣불리 경거망동 하지 못한 데엔 그녀가 그동안 쏟아온 보이지 않는 노력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좌들이 활동을 재개하게 될 경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아닌가.

막막해진 베네트 국장이 고뇌에 찬 얼굴이 되었을 때, 루네리아가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너무 실망할 것 없어요. 베네트 국장. 우리도 그냥 손 놓고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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