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65화 (366/448)

15권-15화

“정말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윌키아 여신님. 무려 971년 만이던가요?”

그의 첫 인사말을 듣는 순간, 윌키아 여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방금 건네 온 상대의 인사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짜 멀린이 아니고서는 절대 건넬 수 없는 인사였다.

“그럴 리가! 내가 아는 멀린은 당신과 전혀 달라. 대체 뭐죠, 당신은?”

그녀가 멀린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은 정확히 971년 전. 바로 제국이 창설되던 그 시기였다.

그것도 공식적인 만남이 아니라서 당사자가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진짜 멀린으로 보이지도 않는 이 자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내가 볼 수 없는 필멸자라고?’

그녀는 중상급 신으로서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수많은 인과와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멀린을 자칭하며 나타난 사내에 대해선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루네리아가 입을 열었다.

“윌키아.”

“예, 언니.”

“믿기지 않는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야.”

설마 루네리아마저 이렇게 말할 줄은 정말 몰랐다. 윌키아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멀린이라 자칭한 자의 얼굴과 루네리아를 번갈아 보면서 다시 되물었다.

“언니··· 그러면 정말 이 자가 그 멀린이란 말인가요, 우리가 알던?”

“그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기질은 전혀 달라도 그가 예전의 [멀린 엠리스]임은 틀림없어.”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베네트 국장조차 이 사실에 크게 경악했다.

“맙소사···. 서브컬처 컨셉러인 줄 알았던 녀석이 정말로 그 멀린이었다고?”

그가 알던 천외오천의 멀린은 먼 지구에서 소환된, 서브컬쳐 컨셉에 충실한 캐릭터였다. 물론 천외오천들 대부분이 골수 오타쿠들이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멀린은 좀 더 특별했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성향과 종잡을 수 없는 행동패턴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로 비밀스런 부분들이 많아서였다.

베네트 국장은 이게 다 신비주의 컨셉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게다가 그가 다루는 강력한 환술도 그런 이미지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아르탈 행성 연합의 창시자인 제노디안의 스승이자 신하였던 그 멀린이라니. 정말이지 너무 경악스러우면서도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한편 냉정을 되찾은 윌키아가 멀린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멀린, 당신이 정말로 멀린이라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거죠?”

“가벼운 환술입니다. 진짜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할 처지가 못 되서 말이지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겉모습이 달라진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윌키아는 전혀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다.

“당신이 환술을 다루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 눈까지 속인다는 건 그런 차원이 아니잖아요.”

초월자는 아카식 레코드와 연동되는 진리안, 즉 신안을 갖고 있다.

물론 초월자라도 격에 따라 꽤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인과를 읽고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그들의 눈을 일개 필멸자가 속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멀린의 환술이 대단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지 않은가.

“제 환술은 단순히 눈속임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환술의 역할을 극히 일부분으로 한정짓는다면 인과정보 그 자체를 날조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요.”

“인과를 날조? 당신 정말 필멸자 맞나요? 환술이 평가규격 외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황당할 지경이구요.”

윌키아의 얼굴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변했다.

필멸자들 중에서도 유독 강력한 사상기를 보유한 자들은 더러 존재해 왔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인과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 멀린의 환술처럼 인과 자체를 제멋대로 날조하는 식의 직접 간섭하는 건 아예 차원이 다르다. 중상위 급 신인 자신조차 간단히 속여 넘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그 모습도 환술인 건가요?”

“예, 제 주군 덕분에 저도 꽤 유명세를 타서요.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죠.”

“···그런데도 대놓고 멀린이란 본명으로 활동해온 걸 보면 당신도 정상은 아니군요.”

“모습이 워낙 다르다 보니 제가 멀린이라 이름을 밝혀도 믿는 사람도 없더군요. 다들 코스프레 컨셉 정도로 여겨줘서 활동하기 아주 편했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멀린은 자신에게 걸린 환술을 풀었다. 그러자 기존의 모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이 그 위에 덧씌우듯 나타났다.

단발로 자른 듯한 금발 대신 길게 기른 갈색 머리카락이 드러나고, 좀 전의 앳된 모습 대신 훤칠한 청년의 모습이 되었다.

그것이 멀린이 그동안 감춰온 그의 본 모습. 윌키아나 루네리아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아!”

그 순간 윌키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동안 환술에 의해 감춰져 있던 그의 본질이 비로소 그녀의 신안에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멀린, 당신 설마 이미···?”

하지만 그녀는 미처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멀린이 자신의 오른손 검지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녀가 하던 말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쉬잇! 아직은 언급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당분간은 비밀이거든요.”

“···그렇게까지 할 정도면 나름 이유가 있겠죠. 좋아요. 비밀로 해 두죠.”

멀린은 한없이 가볍고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유 없는 행동이나 발언을 하는 자는 아니다. 당시에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허튼 소리들도 나중에 가면 다 그럴만한 근거나 뜻을 담고 있었으니까.

‘그랬군. 이게 멀린이 감추려 하던 비밀이었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네트 국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멀린이 비밀이라면서 윌키아 여신이 하던 말을 중도에 막아버리긴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도 나와 같은 처지라는 거겠지.’

멀린이 뭔가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닌 것처럼, 그에게도 나름대로 비밀이 있었다. 물론 대단할 것 없는 비밀이긴 했지만, 알려져서 좋을 것도 없었다.

특히 정체를 숨기고 활동해야 하는 멀린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으리라.

‘헌데 그런 멀린이 굳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걸 보면 그만큼 이번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멀린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춘 이후로 수백 년에 이르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랬던 그가 자신들 앞에 본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건, 그럴만한 큰 일이 발생했다는 이야기일 터였다.

그것을 먼저 입에 담은 것은 바로 윌키아였다.

“멀린, 지금까지 정체까지 숨겨가며 활동해왔던 당신이 이렇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죠?”

“물론입니다. 윌키아 여신님. 지금이야 말로 우주의 판도를 뒤흔들만한 비상사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게 말문을 연 멀린은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갔다.

“이번 제국의 침공은 단순한 정복전쟁이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밑그림일 뿐, 그들이 그리는 큰 그림은 따로 있지요.”

“그건 앞으로 지금 벌어진 사태보다 더 큰 사태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 같은데···.”

베네트 국장이 찜찜하다는 듯 그렇게 묻자, 멀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정확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전쟁의 목적을 뭐라 보십니까? 제국이 전쟁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정황일 뿐이죠. 이 전쟁의 배후는 따로 있어요.”

멀린의 말에 베네트 국장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답을 내뱉었다.

“역시 인베이더인가?”

“예, 그들 밖에 없죠. 우주에 혼란이 빚어지면 이득을 볼만한 자들은 그들이 유일하니가요.”

“지긋지긋한 것들.”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에 베네트 국장은 진저리난다는 듯 이를 갈아붙였다.

“그리고 두 분 여신님들께선 이미 짐작하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그러자 윌키아가 먼저 한숨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애당초 이런 일을 꾸밀만한 자들은 인베이더뿐이니까요. 이번 대의 황제인 알카데인은 야욕은 커도 그걸 정말로 실천할만한 그릇은 아니었죠. 하지만 그는 제 눈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이런 커다란 전쟁을 아무도 모르게 획책하기까지 했어요. 심지어 필멸자였던 그가 정체 모를 금기의 의식을 치러 반신 급 이상의 초월자가 되었죠. 이건 외부에서 누군가가 그를 부추기고 돕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제국은 윌키아 여신을 믿는 신도들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민간과 기업은 물론 정관계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는 만큼, 황제가 제아무리 자신의 인지를 방해하는 아티팩트를 보유했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의 눈을 속인다는 건 지극히 어려웠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고 한다면 외부세력의 조력 밖에 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만한 조력을 해줄 수 있는 힘과 규모를 가진 세력은 이 우주에서 몇 곳으로 한정된다.

공화국은 제국에게 침공당하고 있는 상황이니 예외고, 연합은 베네트 국장과 루네리아가 건재한 이상 이런 음모에 개입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결국 제국은 인베이더에 의해 선택된 장기 말인가?”

생각을 정리한 베네트 국장의 물음에 멀린은 이를 긍정하며 말했다.

“예. 그런 셈입니다. 황제가 치른 의식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막대한 자원과 오랜 준비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 의식이겠지요. 그걸 통해 황제를 초월자로 만든 것은 아마도 그를 자신들의 검으로 쓰기 위함일 겁니다.”

“검으로?”

“예, 대부분의 초월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겠지만, 이 물질세계에 간섭하기 위해선 그만한 간섭력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 간섭력을 부여해주는 인과는 대부분 신앙이나 연이지요.

하지만 아직 필멸자인 시절에 주어진 수명에 의한 연이 남아 있지 않은 이상, 초월자가 물질계에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신을 섬기는 지성체들의 신앙에 힘입어 간접적으로 간섭하는 게 전부지요. 간혹 모아둔 신앙이나 연, 업을 통해 움직인다 해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나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범위는 극히 한정적입니다. 지성체들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인베이더들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걸림돌이지요.”

이쯤 되니 멀린이 무슨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베네트 국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대충 알겠군. 그래서 인베이더는 누군가를 초월자로 만들어서 물질계에 간섭할 생각이다 이건가? 그리고 그 대상이 알카데인 황제고?”

“예.”

비록 노년이긴 해도 황제는 필멸자로서의 연이 상당부분 남아 있었다. 그가 초월자가 된다면 가장 문제가 되는 기본 수명 자체가 크게 늘어나는데다, 정명자로서 물질계에 간섭할만한 연도 대폭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일리 있는 추측이지만 여전히 몇 가지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베네트 국장은 곧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 점은 좀 이해가 안 가는군. 반신 급이 강력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신좌들의 검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지금의 황제 정도론 공화국도 전복시킬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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