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64화 (365/448)

15권-14화

하지만 제아무리 그런 힘을 가졌어도 베네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의 몸은 오직 하나뿐이었고, 그에 반해 이 우주는 그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넓고 광활했으니까.

그렇기에 인베이더 측에서도 그런 점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베네트가 아르탈 행성을 벗어나기란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베네트 국장 본인도 그 점이 영 답답하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자리를 지키는 것이 최선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베네트 국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인베이더의 신좌들은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겁니까?”

하지만 루네리아 여신도 속 시원하게 답해주지는 못했다.

“그건 저라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특히 제1신좌인 그룬베일은 저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신격을 보유한 최상위에 버금가는 신. 그가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를 은폐하고자 하면 저도 그걸 열람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랍니다.”

“역시 그렇군요.”

하긴 여신이 그 모든 것을 내다볼 수 있었더라면 인베이더와 연합의 싸움도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당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해본 베네트 국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카데인 황제의 초월자 등극에, 제국의 침공.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인베이더들의 공격···.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라인트라 대전 따위는 소규모 접전으로 취급할 만큼 거대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예, 그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어요.”

“그렇다면 이 사태의 배후에는 인베이더가 있는 게 맞습니까?”

“······.”

“맞군요.”

여신 루네리아는 그 물음에 대해 어떠한 긍정이나 부정에 대한 대답도 내놓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까지 수백 년 이상 살아온 베네트 국장은 눈치만으로도 그녀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사실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제약 같으니!’

베네트 국장은 내심 욕지기를 내뱉었다.

여신 루네리아가 괜히 정보를 알려주기 싫어서 입을 다문 게 아니었다. 이 또한 섭리에 의한 제약에 저촉 받는 만큼 자기 입으로 직접 내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런 섭리의 제약은 여신뿐만 아니라, 정명한 인과를 대부분을 소모한 베네트 국장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인베이더가 이 사태의 배후가 확실하다면 황제가 초월자가 된 것도 납득이 갑니다. 그들이 개입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초월자라 해도 반신 급은 그 중에서도 가장 최하위에 속한다. 상위의 신들이 손을 쓴다면 일개 필멸자를 반신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만도 않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인베이더들이 얻을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베네트 국장이 그런 의문을 내놓자, 루네리아 여신은 이 또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상위신인 만큼 많은 것을 내다볼 수 있었지만, 그렇기에 받는 제약도 많았다.

알아도 입 밖으로 낼 수 없고, 보고도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는 건 바로 그래서였다.

그런 사정을 눈치 챈 베네트 국장이 입가에 쓴웃음을 띄우던 그때, 바로 옆에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건 저도 알고 싶네요.”

“당신은!?”

베네트 국장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이렇게 지척에 나타나다니. 하지만 그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상대의 정체 때문이었다.

베네트 국장 옆에 나타난 인영은 조용히 웃으며 여신 루네리아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래간만이에요, 언니.”

“응, 오래간만이야. 윌키아.”

그랬다. 베네트 국장의 감각조차 속이고 이 자리에 나타난 여인은 바로 론데니움 제국을 가호하는 새벽의 여신 윌키아였다.

연합을 수호하는 여신 루네리아는 그녀와 서로 아는 사이였으며, 평소에도 서로 교류를 나눠왔다.

그렇기에 그녀가 루네리아를 서슴없이 언니라고 호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쩐 일로 다 찾아왔니?”

“언니는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그래, 알고는 있어.”

루네리아는 쓰게 웃으며 동생과 같은 윌키아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거동이 더 이상 인지되지 않고 있는 거지?”

“역시 알고 계셨네요.”

“모를 수가 없었어. 인베이더들이 꽤 오래 전부터 그와 접촉해 왔었으니까.”

“신좌들이 손을 썼군요.”

“그들이 직접 쓴 건 아니야. 단지 너의 눈을 가릴 만한 뭔가를 건네줬을 뿐이지.”

윌카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알아들었다. 무언가를 건네줬다는 건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는 뜻. 그럼에도 신의 인지를 흐릴만한 건 하나밖에 없다.

‘분명 권능을 불어넣은 아티팩트겠네. 대체 그게 언제 황제에게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물론 제국이 수백 년 이상 별 탈 없이 유지되면서 이번 대 황제에 대해 딱히 신경 쓰지 않게 됐었다는 이유도 컸다. 제아무리 그녀라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상대의 24시간을 전부 인지할 순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인지의 공백을 이용해 건네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황제가 권능이 담긴 아티팩트를 받게 된 과정을 보지 못했던 거겠지.

그래서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었다. 그녀가 제국과 끈끈한 인연을 맺었던 것은 초대 황제였고, 그 후대로 이어질수록 그녀의 관심도 예전만 못했으니까. 그나마 계약은 계약인 만큼 황제에게 권능을 빌려주는 것만큼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황제의 존재가 가끔씩 그녀의 인지를 벗어났다. 당시에는 자신이 황제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러려니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점점 황제를 인지할 수 없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손을 쓸 수도 없었다. 황제가 딱히 악행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빌려준 권능도 정해진 경우 외에는 남발하지 않았으니까.

허나 찝찝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윌키아도 마냥 방관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엄연히 제국의 수호신이었고, 지금도 제국 내에는 그녀를 믿는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녀는 자신의 신도들을 통해서 간접적이나마 여러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입수된 정보들은 대부분 편린적이거나 자잘한 것들이지만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나름 쓸모 있는 정보로 가공되기도 한다.

그래서 알 수 있게 된 게 있었다.

“그동안 알카데인 황제는 제 눈을 피해 뭔가를 꽤 오랫동안 준비해온 모양이에요. 그때는 아주 가끔씩 인지를 막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막혀버렸어요. 아마도 언니의 말처럼 신좌들에게 인지를 방해하는 아티팩트를 전해 받았던 거겠죠.”

“신좌들이 꽤 교활한 수를 썼어. 그런 식으로 하면 섭리에 의한 제약도 어느 정도 경감되니 말이야.”

권능을 직접 발현하는 것보다 이렇게 특정 물건에 불어넣음으로서 상대방에게 건네주는 방식은 제약이 훨씬 더 적은 편이었다.

물론 물건에 담을 수 있는 권능의 힘은 한정되어 있었고, 인지 방해 같은 권능은 사실 권능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보잘 것 없는 힘이지만 그만큼 제약도 덜 받는다. 놈들은 그 점을 철저히 이용한 것이다.

“그래도 신도들의 눈을 통해 황제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요. 이번 전쟁이 터지기 얼마 전에 제국의 황궁이 폭발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더군요. 그 직후부터 황제들에게 부여해준 제 권능과 힘이 계약파기와 함께 되돌아왔죠.”

신과의 계약이란 건 쉽게 파기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사자들 간에 어떤 합의가 있지 않는 한 외부의 간섭으로는 거의 끊기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계약이 끊어졌다는 것은···.

“···너와 확실히 인연을 끊겠다는 의미네. 아니면 최근에 반신이 됐다고 하더니, 어떤 모종의 의식을 치루면서 자동적으로 계약이 파기됐던가.”

루네리아의 말에 윌키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요. 그리고 그 의식이란 게 뭔가 좀 불길한 느낌이 들어요. 수도의 황궁이 폭발할 때 지독한 피비린내와 원념을 많은 신도들이 똑같이 느꼈다고 했어요.”

“역시 그날 어떤 금기의 의식을 치룬 게 분명해. 어떤 의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념과 피비린내가 많이 느껴졌다는 걸 보니 결코 정명한 방법은 아닌 것 같아.”

문제는 황제가 그런 외도의 의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일개 필멸자를 하루아침에 반신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의식이라면 제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어쩌면 윌키아의 인지를 방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베이더의 신좌들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더 위험했다. 이 모든 게 인베이더의 거대한 계획 중 일부라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윌키아가 안타까운 듯 푸념의 말을 내뱉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 대체 아문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문은 제국의 반신 급 초월자. 속을 알 수 없는 현재의 황제 알카데인과 달리, 그는 정도를 추구하는 올곧은 무인이었다.

그가 제국에 건재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황제가 피비린내 나는 의식도 모자라 공화국을 침공하는 터무니없는 일들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 대해선 두 여신님들께 제가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윌키아의 말을 받듯, 돌연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윌키아는 물론이고 베네트 국장까지 깜작 놀라 그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긴 석장을 쥐고 있는 로브를 걸친 사내가 서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내 인지를 속이고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했다고?’

윌키아는 무려 중급 신이었다. 심지어 중급 신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 그녀의 힘은 상당해서 그룬베일을 제외한 상위 신좌들과도 비견할만하다 할 수 있었다.

헌데 그런 그녀의 인지능력을 속이고 일개 필멸자가 바로 코앞까지 접근한다?

이건 절대 불가능해야 할 일이었다. 심지어 상대에게는 황제와 같이 인지를 방해하는 권능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신안으로도 상대의 정체를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윌키아가 날카로운 눈매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누구지, 당신은?”

하지만 그에 대한 정체는 본인의 입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베네트 국장이었다.

“멀린? 네 녀석이 어떻게?”

베네트 국장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분명 지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저 자는 천외오천의 일인인 멀린 엠리스였다.

그 이름을 들은 윌키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멀린이라니! 그럴 리가 없어! 베네트 국장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요?”

윌키아는 진짜 멀린을 알고 있었다. 아르탈 행성 연합의 창시자 제노디안을 가르친 진정한 스승이자 신하. 그는 제노디안고 함께 연합을 세웠으며, 연합의 기본 구조체계와 법을 체계화 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전혀 달랐다. 베네트 국장에게 멀린이라 불린 사내의 생김새는 물론 풍기는 기질까지 자신이 아는 멀린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베네트 국장이 대답했다.

“예, 여신님 말씀처럼 진짜 연합의 공신인 멀린 공과는 다릅니다. 저 자는 일종의 컨셉이라 하더군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본 연합에 몸담은 천외오천이란 자들이 죄다 그런 부류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죠? 저조차도 느끼지도 못했는데? 심지어 그랜드 급의 필멸자가···.”

상대가 진짜 멀린이 아니라는 건 확인되었지만, 그가 어떻게 자신의 감각을 속였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런 윌키아 여신의 경계 어린 모습에, 멀린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미소 짓는다.

“정말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윌키아 여신님. 무려 971년 만이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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