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62화 (363/448)

15권-12화

* * *

[···폐하.]

게리드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수십 년 이상을 철저히 준비하고 기다려온 대업의 시작이었다.

우라그리 요새의 귀환 코드를 손에 넣어 점령하고, 공화국이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파죽지세의 기세로 수십 개의 성계를 점령하면서 아르센티아 주역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도 초전의 유리한 기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아르센티아 주역의 장악에 실패하고 말았으니 황제가 실망하거나 분노를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예상과 달리 황제는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그렇게 불안해할 것 없다. 짐은 그렇게 진노하지 않았으니까.”

허나 게리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좀 전에 유태진이란 자와 대치하고 있을 때만 해도 이 일대의 우주 공간이 질식할 듯한 살기에 휩싸이지 않았던가.

“이진운 그 자가 최근에는 유태진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했지?”

[예, 얼마 전 입수한 정보대로라면 그렇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놈이 짐의 대업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 같다.”

그러자 게리드가 깜짝 놀라 반응했다.

[그럴 리가요. 놈이 번번이 저희의 계획을 방해하긴 했지만 그래봐야 필멸자에 불과합니다. 그 놈에게 대업 요소 따윈···.]

“아니, 놈은 평범한 필멸자가 아니다. 게리드, 그대도 똑똑히 봤을 텐데. 반신이 된 짐과 거의 대등하게 맞선 강자지. 그런 자가 평범한 필멸자일 것 같나?”

황제의 단호한 목소리에 게리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확실히 유태진은 평범한 필멸자라 보기 어려운 자였다. 자원위성에서 맞붙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본 드래곤과 언데드 군단을 단독으로 박살내지 않았던가.

분명 드러난 격은 그랜드 급인데, 보인 무위는 거의 반신 급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대는 아직 진리안을 뜨지 못해 보지 못했겠지만, 그 자의 영혼은 이미 반신에 이르렀다. 그 사실만 봐도 그냥 필멸자라 보긴 어렵지.”

[말도 안 됩니다. 육체는 필멸자고 영혼만 반신이라니요?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어째서 그런지는 짐도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실제로 그러하니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군.”

[폐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자로군요.]

“어쩌면 관리국장이나 수호의 검과 맞먹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 이상일 수도 있고.”

라인트라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하더라도 마이스터에서 그랜드 급 사이를 오가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불과 2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반신의 경지를 넘보는 수준도 모자라, 실제 무력까지 어지간한 반신 급을 웃도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아무리 반신 급의 영혼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비상식적인 성장이었다. 아니, 애당초 영혼은 진즉 반신에 도달한 자가, 육체만 고작 필멸자에 머물고 있다는 것조차 불가해한 일이었다.

허나 지금에 와서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알카데인 황제는 냉정하게 가늠했다.

“지금의 짐으로선 놈을 상대로 어느 정도 우위는 점할 수 있을지언정, 압도하진 못한다. 애당초 정명하게 쌓아 올린 신격이 아니라서 불완전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신격은 확실히 올랐지만, 그걸 다루는 내 역량이 부족함을 느낀다.”

[확실히··· 이 의식은 실행을 위한 최소 조건이나 요구하는 제물의 양이 천문학적인지라 테스트를 해보지 못한 게 문제였군요. 그래도 이론적인 부분만큼은 철저히 분석하고 검토했지만, 역시 완벽할 순 없었나 봅니다.]

“뭐,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유태진 그놈이 가진 기교나 운용능력이 특출한 것이었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저지당한다면 곤란해.”

무공이란 것을 극한으로 체득한 유태진의 운용능력은 격의 차이를 메울 만큼 대단했다. 사실 반신 급 강자인 아문을 상대할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차원의 운용능력이니,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기보다는 그 자가 유독 특출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하겠습니다.]

굳어진 얼굴로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게리드의 모습에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대응책이라고 해 봐야 지금에 와서 뭐가 달라질까?”

[그렇다면···.]

“아무래도 의식을 앞당겨야겠다.”

[그럼 2차 의식을!?]

황제의 결단에 게리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2차 의식은 아르센티아 주역을 장악한 이후에 치르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공화국의 필사적인 저지에 의해 점령 자체가 막혀버리고 만 상황. 물론 다시 함대를 재정비해서 전투를 치를 예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예정보단 조금 부족하긴 해도 2차 의식을 서두르는 게 옳을 것이다.

“아르센티아 주역을 장악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2차 의식을 치르기엔 충분할 것이다. 최근 전투에서 죽어간 자들의 원혼과 절규는 충분히 차올랐다. 그 정도면 부족하지 않다고 보는데.”

[예. 그렇습니다. 애당초 수치를 넉넉하게 잡았기 때문이지, 2차 의식을 치를 수준은 충분히 될 겁니다.]

“공화국 함대를 성공적으로 전멸시켰다면 여유 수치까지 도달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지.”

예정 수치까지 달성하지 못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 정도는 별 문제도 아니다. 혹시나 모를 돌발변수를 위해 넉넉하게 예정수치를 잡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1차 의식이 기초기반을 닦는 것이라면 2차 의식은 어디까지나 완성을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진정한 의식의 완성은 바로 그 다음 단계에 있었다.

“어쨌든 2차 의식을 마치는 즉시 공화국 함대를 밀어내고 이 주역을 완전히 점령한다. 마지막 3차 의식을 치르려면 아르센티아 주역을 장악하는 건 반드시 필요해.”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그리고 후방에서 대기 중인 함대를 일부 이쪽으로 충원시키도록.”

[예!? 그들은 제국의 영역을 방어하기 위한 병력입니다. 그들까지 동원하면 제국의 방어선이 허술해지는 결과가···.]

현재 제국에 남아 있는 병력과 함대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예비 전력이었다. 제국은 우주 3대 세력 중 하나답게 광활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병력의 최소 규모도 차원이 달랐다.

허나 그만큼 막대한 규모라고 해서 그들을 일부 차출해 뺄 수도 없었다. 그들을 빼는 만큼 제국의 방어선에 빈틈이 생긴다.

그렇지만 황제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우려 섞인 게리드의 말을 자르며 대꾸했다.

“애당초 이 전쟁의 승패는 짐이 의식을 완성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제국의 방어가 조금 취약해진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 애당초 인베이더 그 작자들도 짐에게 협력하기로 한 이상 제국을 침범할 리도 없고.”

확실히 일리는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인베이더들이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 전제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게리드는 그런 인베이더들이 영 못미더웠다. 이미 수십 년 이상 협력을 지속하고 있는 관계긴 했지만, 지금도 놈들의 진짜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어차피 서로 주고받는 관계이긴 했지만, 놈들은 모든 지성체들의 적이다. 수틀리면 언제 뒤를 찌를지 모를 놈들이야.’

물론 놈들도 제국과의 협력으로 얻은 게 적지 않았다. 아르탈 행성 연합을 당황케 했던 위상전환을 비롯해서 에메랄드 헤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신기술들은 제국이 제공한 여러 자료와 기술들을 토대로 개발된 것들이었다.

그냥 무에서 탄생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인베이더들의 태도는 여전히 납득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성체들과 전혀 타협하지 않고 싸워온 역사를 생각하면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놈들과의 오월동주도 어차피 폐하께서 진정한 신격으로 완성되실 때 까지만이다. 그때가 되면 인베이더 놈들에게 무슨 속셈이 있든 다 의미 없는 일이 되겠지.’

의식을 완성하기만 하면 황제는 진정한 초월적인 신격으로 거듭나게 된다. 지금처럼 고작 반신 수준이 아니라 우주에서도 상대할 자가 많지 않은 상위의 신격까지 올라설 거라 예측되었다.

그때가 되면 제국에 가호를 내려준 새벽의 여신 윌키아마저 능가하게 될 터. 어차피 섭리의 제약에 묶여 물질계에 제대로 간섭조차 못하는 인베이더의 신좌들을 더 이상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명에 따라 서둘러 후방의 함대들을 차출하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겠다.”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게리드는 그런 황제의 모습을 눈에 담은 뒤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부터는 그 누구보다도 더 바빠질 때였다.

* * *

아르센티아 주역으로부터 날아온 소식을 전해 들은 베이노아 수상은 말 그대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제국의 침공을 인지한 순간부터 공화국이 동원할 수 있는 대다수의 함대를 움직여 아르센티아 주역으로 파견했었다.

헌데도 제국을 밀어내기는커녕 버티는 것조차 힘겹다니.

물론 막대한 에너지를 공유해주는 에메랄드 헤븐의 등장에 대해선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황제가 친정을 시작한 것도 모자라, 직접 나서서 싸우기까지 했다니. 게다가 신위를 발위했다고.”

“예. 예전만은 못하지만 어지간한 상위의 반신 급에 달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힐 일이로군. 황제가 어떻게 그 제약을 무시한 거지?”

건국황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황제들은 전부 새벽의 여신 윌키아의 권능을 대행해 부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황제들은 대를 이어가며 제국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어떤 세력도 제국을 넘보지 못했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제약도 만만치 않아서, 그가 여신의 권능을 발휘하려면 몇 가지 상황과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했다.

제국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어떤 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했다.

또한 보편적인 정의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며, 무분별한 침략을 위해서는 절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이외에도 여러 조건들이 붙어 있었지만, 대체적인 내용은 그러했다.

그런데 어떠한 명분도 없이, 무분별한 침략전쟁을 벌인 주제에 어떻게 신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황제가 예전에 발휘했던 하급신 수준의 권능에 비한다면 반신 급의 힘은 격이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시할 순 없었다.

반신 급 존재 하나만으로도 전세가 뒤집히는 건 여반장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존재했다.

“유태진이란 자가 말하기를 황제가 발휘하고 있는 신력이 윌키아 여신의 것이 아니라, 황제 본인의 것이라더군요.”

“뭐라? 그게 황제 스스로의 힘이라고!?”

보좌관의 말에 베이노아 수상은 더더욱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었다. 신의 권능을 대행할 수 있는 사실을 빼면, 황제는 아무런 영능도 체득하지 못한 무능력자였다.

그런데 그가 하루아침에 반신 급의 격을 손에 넣었다고?

‘설마 지금까지 우주의 모두를 속여 왔던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일 그가 진짜로 반신 급의 힘을 갖고도 숨기고 있었다면, 그에게 권능을 빌려주고 있던 여신 윌키아가 더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가 그렇게 반신 급이 된 것에는 어떤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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