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11화
새벽의 여신 윌키아는 상당한 격을 보유한 중상급신으로서 마음만 먹으면 물질계에 존재하는 필멸자에 대한 것이라면 대부분 관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관측이 불가능했다. 마치 영화의 필름 일부가 편집된 것처럼, 중요한 구간에서는 정보를 열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이유는 대개 두 가지로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볼 수 없는 등급의 정보이거나, 혹은 볼 수 없도록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간섭했거나.
하지만 전자라 보기는 어려웠다. 지금까지 황제에 대한 정보 열람권한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황제들에게 대대로 권능을 빌려준 터라 그들을 지켜보는 게 더 수월했다는 점도 있었다.
그렇다면 후자라는 이야긴데··· 이런 경우 간섭한 자의 신격은 그녀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가능성이 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여신 윌키아는 자신의 성지에서 곤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발생한지는 벌써 수십 년 이상 지났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갈수록 그녀가 관측할 수 없는 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황제의 모든 것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젠 알카데인 황제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주어진 정보가 적은 터라 뭐라 특정하긴 어려웠지만, 여신 윌키아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황제를 둘러싼 거대한 무언가가 이 우주의 큰 흐름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어쩔 수 없네. 그분을 찾아가는 수밖에···.”
작게 한숨을 내쉰 여신 윌키아는 곧 흔적도 없이 자신의 성지에서 사라졌다.
* * *
제노디안 리피라이터. 그 이름은 유태진에게도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아르탈 행성 연합의 창시자. 그리고 대부분의 영능학에 통달한 것은 물론 심지어 과학과 마도공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섭렵함으로서 모두에게 만능자라 불린 역사적인 인물.
그가 우주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해서 아르탈 행성 연합은 물론 공화국은 물론 제국 출신들까지 제노디안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극히 드물 정도였다.
하지만 유태진은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제노디안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제노디안이 본래 지구 출신이며, 그가 전설로 내려오던 카멜롯의 왕인 아서 팬드래건이란 사실을.
심지어 그가 사용했던 신기 엑스칼리버까지 물려받은 상황이니,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유태진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제노디안? 그건 연합의 창시자의 이름인데··· 난데없이 영문 모를 소릴 하는군. 1000년 전의 인물과 무슨 관계냐니? 뭘 묻고 싶은 거지?”
“그럼 정말로 아무 관계도 아니란 말이더냐?”
“황제, 당신도 알고 있을 테지만 난 지구 출신이다. 제노디안이란 이름도 연합에 소환된 이후에야 처음 들어본 사람에게 무슨 소릴 듣고 싶은 거냐?”
그 말에 잠시 당황해하던 알카데인 황제가 이내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그럴 리가··· 네 녀석은 분명 그와 관계가 있다. 없을 리가 없어.”
그 직후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한 존재감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황제로부터 비롯된 기세의 압력이었다.
“네 녀석이 가진 무공이란 게 짐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건 이제 알겠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리가 없어. 제아무리 용언을 다룬다 할지라도, 그게 제 힘을 발휘하려면 최소한 해당 영능에 대해 어느 수준까지는 통달해야 가능하지.”
황제의 두 눈이 유태진의 폐부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볼 듯 심유해졌다.
“하지만 짐이 말한 어느 수준이라는 것도 최소한 마이스터 급이다. 지구에서 소환된 지 불과 4년도 채 안 되는 녀석이 그 많은 영능들을 그런 높은 수준까지 달통한다고? 그건 제아무리 천재라 해도 불가능해. 천재가 어려서부터 기초를 갈고닦는다 해도 네 녀석 나이 때엔 그 수준이 가능할까 말까할 정도인데, 고작 4년만으론 불가능하지.”
“그래서 잘난 황제폐하께서 내리신 결론이 뭐지? 설마 날더러 제노디안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빈정대는 듯 묻는 유태진의 말투에 알카데인 황제의 눈매가 일순 사납게 꿈틀댔지만, 그는 분노를 참으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어떤 연관은 있겠지. 제노디안이 남긴 유산을 얻었거나, 지식과 깨달음을 전승 형태로 물려받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놀랍게도 황제는 사실에 거의 가깝게 맞췄다.
현재 대외적으로 드러난 사실이나 근거만으로는 유태진에게서 제노디안과의 연관성을 떠올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가 여러 영능을 다룬다곤 하나, 그 수준은 잘 쳐줘봐야 마이스터 급 수준. 사실 천룡무상의 힘을 빌어 재현한 8클래스나 최상급 정령술도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진짜 8클래스 마법사에 비한다면 부족했고, 정령술이나 그 밖의 영능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대부분의 영능을 반신 급까지 체득하여 그 이상의 경지까지 바라봤다는 제노디안에 비한다면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제노디안과 연관성을 추측해내는 걸 보면, 황제도 신들이 갖는 미래예지에 가까운 직감에 대해 조금씩 눈뜨고 있는 모양이었다.
허나 유태진은 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대꾸했다. 상대가 추측은 하더라도 아직 확신시켜줄 때가 아니었다.
“뭐, 그래. 충분히 가능할만한 추리야. 일단 그게 사실이라 치자.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당신과 난 적이고, 서로 싸우고 있지. 여기서 싸움을 멈추고 진실게임이라도 하자는 거야?”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다. 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던, 짐은 네놈을 이미 제노디안의 후신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
차갑게 가라앉은 황제의 시선에 유태진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몇 마디 더 말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이미 황제는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장차 짐이 이룰 대업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겠지.”
섬뜩할 만큼 명백한 적의. 지금까지 황제는 유태진과 대적해 싸우긴 했지만 딱히 유태진에게 적대감을 품어서가 아니었다. 이번 전쟁에서 걸림돌이 분명한 유태진을 우선적으로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드러내고 있는 이 적의는 명백히 유태진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그건 이 전쟁에 대한 승패를 떠나, 유태진의 존재 자체를 명백하게 경계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어느 정도 의도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살기를 드러낼 줄은 몰랐군.’
반신 급 초월자의 진심 어린 적의를 마주하게 된 유태진은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는 살기에 내심 감탄했다.
좀 전만 하더라도 반신 주제에 기교나 운용, 임기응변 등은 어설프기 짝이 없던 작자였다. 그런데 살기만큼은 이렇게 짙고 살벌하다니···. 심지어 갈수록 살기가 정련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야. 점점 역량이 상승하고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격인가?’
알카데인 황제의 격은 반신 급 중에서도 가히 상위 수준. 단지 그걸 효율적으로 다룰 역량이 없어 실제 드러난 실력은 반신 중하위권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알카데인 황제의 격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딱히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고, 어떤 성장할 계기가 주어졌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태진의 존재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황제의 신격이 조금씩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군. 외도의 방식으로 초월자가 되었다더니···’
그만큼 황제에 대한 경각심도 높아졌다. 지금은 반푼이라 할지라도, 그가 지닌 신격만큼은 진짜였다. 제아무리 기교나 운용 능력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다룰 수 있는 힘의 규모나 격이 지금보다 더 높아진다면, 제아무리 유태진이라 해도 감당한다고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지금 결판을 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지금 유태진이 발휘할 수 있는 전력은 어디까지나 반신 급인 황제를 묶어둘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보다 월등히 앞선 기교와 운용으로 어떻게든 팽팽히 맞서고 있지만, 상대의 역량이 갈수록 점점 높아진다면 그것도 언젠가는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황제는 즉각 덤벼들지 않았다. 오히려 죽일 듯 끌어올리던 살기와 기세를 조용히 거둬들이고 있었다.
유태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지? 말은 그렇게 해놓고 물러서겠다는 건가?”
그 말이 도발처럼 들렸던지 황제의 두 눈이 돌연 매섭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네 녀석을 도륙하고 싶다만··· 짐은 황제다. 아군의 전황도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지.”
그 말처럼 현재 제국 함대와 공화국 함대는 밀고 밀리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어느 한쪽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싸우다 보니 전체적인 전력은 공화국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끌고 온 친위함대와 게리드까지 출전한 만큼 확실히 밀어붙일 거라 여겼던 황제로서는 마뜩치 않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황제는 작전상 후퇴를 결심했다.
‘다시 판을 짜야겠군. 일단은 전투를 멈추고 물러난 뒤 태세를 정돈할 시간이 필요해.’
그는 결심하자마자 곧바로 바르투인 사령관에게 연락해 명령을 내렸다. 함대에 피해가 없도록 점진적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었다.
제국 함대가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하자, 공화국도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하고 전선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보통이라면 후퇴하는 적을 추격해서 전과를 극대화하는 게 옳은 전술이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적이 패퇴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태세를 정비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였다.
핵심주력은 별 피해 없이 무사한 제국 함대를 추격했다간 오히려 그들의 역습에 휘말려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더 높았다.
물러나는 제국 함대와 마찬가지로 알카데인 황제 또한 유태진과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도 이젠 슬슬 물러날 때인 것이다.
하지만 그냥 물러서긴 뭔가 아쉬웠던지 황제가 마지막으로 유태진을 돌아보며 엄포를 놓았다.
“짐의 기휘를 범한 네 녀석을 당장이라도 도륙하고 싶다만··· 오늘만큼은 참기로 하지. 며칠 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시 찾아오겠다. 그때까지 각오하며 기다리고 있도록.”
유태진이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일방적인 말만 남겨둔 황제는 순식간에 제국의 함대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그 뒷모습을 유태진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역시 제멋대로군. 각오하며 기다리라고? 누가 할 소리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그의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알카데인 황제의 발을 묶어두느라 전력을 다 끌어올리는 바람에 멀쩡한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육체의 데미지는 태을단목신공을 통해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지만, 급격한 심력 소모와 영적 데미지는 그런 방법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당분간은 휴식이 필요했다.
“그건 그렇고 신의 권능을 빌려 사용할 뿐인 필멸자가 하루아침에 반신 급 초월자가 되다니. 대체 무슨 금기를 저질러야 저런 게 가능하지?”
아서의 꿈을 경험한 덕분에 유태진도 꽤 많은 지식들을 섭렵하고 있었지만, 일개 필멸자를 아무런 깨달음 없이 초월자로 끌어올리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아니 황제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그보다 더 염려되는 것은 지금 수준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황제는 조금씩 더 높은 신격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아직은 반신의 테두리를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성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하급신의 신위에 도달하고 말 것이다.
“···일단은 대책을 강구해 봐야겠어.”
유태진은 한결 더 지친 목소리로 읊조린 뒤, 그 자리를 떴다. 바니아스 함대로 귀환해 자신도 휴식과 정비를 취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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